108화 검은 무리 (2)
눈을 뜬 곳은 내 방이었다. 트라프비체 제국의 내 방. 어떻게 이런 공간 이동이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아마, 검은 무리가 사용할 수 있는 흑마법인가 뭔가 그러겠지.
칸나는 여전히 기절해 있었다. 내가 뭘 해야 하지. 잠깐 멍해졌다. 군단은? 그거야 그냥 마력구를 통해서 얘기하든 전서구를 통해서 얘기하든 회수하면 된다.
그나저나 지금 내 몸 상태는 어쩐다. 스킬 창을 열어 보니 깨져서 못 알아보는 글씨가 가득했다. 스킬을 사용하려 해도 스킬이 나오질 않았다. 오직 남은 건 원죄뿐이었다.
“칸나, 일어나 봐.”
“…으.”
일단 난 칸나를 흔들었다. 칸나는 눈을 반쯤 뜨더니 곧 정신을 차린 다음 나를 노려보았다.
“너, 결국 나를 못 믿었구나.”
“못 믿는 게 아니야.”
“그러면?”
칸나는 내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한숨을 쉬었다. 이것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아니, 하기는 해야 하는 걸까.
“됐어. 아직 얘기할 마음이 없구나.”
내 눈빛을 보던 칸나는 일어났다. 칸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 날 다시 돌아보았다.
“언제 회군한 거야?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던 거야?”
“그건, 나도 모르는데.”
“…하.”
칸나는 눈살을 찌푸리고선 내 손목을 붙잡고 복도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복도를 지나는 시녀가 있어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하나 내 손은 자연스럽게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넘어질 뻔한 나를 칸나가 붙잡아 주었다.
난 그때 오싹한 기운을 느꼈다. 칸나 역시 시녀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우리의 몸은 투과되었다.
“뭐지?”
“…몰라.”
우리가 소리 나게 말해도 그들은 우리를 보지 않았다. 우리의 존재가 아예 없어진 느낌이었다.
칸나의 손이 내 손목이 아니고 손으로 얽혀 온다. 강하게. 그녀의 손에는 온기가 있었다. 내가 그녀의 온기에 위로받는 것처럼 그녀도 내 온기가 필요했다. 당장 우리가 직전에 충돌할 뻔했던 건 모두 잊어버렸다.
그때 나는 칸나의 손을 붙잡고 대전으로 나아갔다. 대전까지 가는 길에 수많은 근위병이 있었지만, 우리를 막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금일 자 대전 회의 시작한다.”
“황제 폐하, 감히 말씀 올리옵니다만, 주치의가 쉬라고 권고한 것으로 압니다. 당분간은 쉬시는 게…….”
뭐야, 리얀은 또 언제 황제가 됐대. 하긴, 리얀 말고 황제가 될 사람이 없기는 했지. 그러나 그 이후에 나오는 말들은 칸나와 내가 감당하기에는 조금 힘든 말들이었다.
“아직도 에퍼리 후작과 칸나 소령 실종 사건 때문에 그렇습니까?”
“어허, 사테 장군. 그분들 이야기는 대전에서 지양하도록 하게.”
이건 또 뭔 소리야. 나나 칸나나 어리둥절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것도 3년이 다 지나간 얘기가 아닌가.”
“뭐? 이런 미친……”
당연히 뒤의 말은 내가 한 것이었다. 칸나는 입을 열고 얼기까지 했다. 리얀은 피곤한 듯 손사래를 쳤다.
“됐어요. 그것 때문이 아니니. 그보다 제논 왕국, 아니 제논 공화국과의 휴전 협약도 이번 주까지군요.”
“그건 본인이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뭐죠, 라피테스 공작?”
깜짝이야. 이건 또 뭐야. 나나 칸나나 리얀만 바라봤기에 라피테스 공작은 보지도 못했다. 라피테스 공작은 가테스 황자파 아니었나. 왜 여기에 있지.
하긴, 가테스 황자 측의 귀족들을 다 청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겠다. 우리가 흡수하려고 했던 가토스 황자파는 모두 곱등이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곱등이가 된 귀족들도 몇몇 보인다. 꽤 인간의 예절을 많이 배운 걸로 보이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휴전 협정을 늘리면 됩니다. 대신 받을 건 받아 와야겠죠. 아직 에퍼리 후작과 칸나 소령의 실종 책임은 제논 공화국에 있으니까요.”
수많은 정치적인 얘기들, 경제적인 얘기들이 오갔다. 우리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 마나를 작동해 보았다. 과연 노을이들이 느낄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 역시 헛수고였다. 내 몸 안에 마나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칸나를 톡톡 쳤다.
“왜?”
“마나 한번 운용해 볼래?”
“스킬?”
칸나의 표정이 궁금증에서, 경악에서, 사색으로 변했다. 아마 그녀도 스킬이 안 써지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왜? 여신이 스킬을 부순 건 나만이 아니었던가.
갑자기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흘러넘쳤다. 난 깜짝 놀라서 칸나를 감쌌다.
“왜?”
“…스킬, 스킬이 없어졌어.”
그녀는 주저앉아 계속 눈물을 흘렸다. 난 너무 당황해서 같이 주저앉아서 칸나를 보았다. 언제나 강건했던 그녀가 눈물을 흘릴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탓이다.
내가 너무 무심했던 걸까. 여기 사람들에게는 스킬이 전부다. 그게 한 번에 없어졌을 때의 허탈감도 나와는 다를 터였다. 그렇다고 이렇게 한 번에 무너질 줄이야.
“괘, 괜찮아.”
“어떻게 괜찮아? 나는 여신님의 저주를 받은 거야.”
칸나는 그야말로 펑펑 울었다.
“들은 적 있어. 갑자기 스킬이 사라진 사람들. 여신님에게 불온한 생각을 품었다거나 불온한 행동을 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 모두 스킬이 사라지는 형벌을 받았다고.”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 줘야 할지 몰랐다. 이 세계가 더럽다는 걸 설명해 줘야 하나? 여신이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도 설명해 줘야 하나? 난 그녀를 안고 두드려 주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칸나를 달래 주던 순간, 대전의 회의는 끝났다. 리얀은 먼저 피곤한 표정으로 나갔다. 리얀이 비틀거리자 노을이 중 하나가 리얀을 부축해 주었다. 자기의 몫은 잘하고 있네. 대신들도 하나둘씩 자신의 짐을 챙겨 나갔다.
“칸나, 지금 일단 이 상황 자체가 문제잖아. 우리가 사람들한테 안 보인다는 것. 그것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어.”
“흐윽, 그렇지만…….”
난 칸나에게 이성을 되찾아 주려 노력했다. 어쨌든 그녀가 스킬을 잃은 건 나 때문이었다. 차라리 내가 칸나를 기절시키지 않고 알레프에게서 이 세계의 진실을 듣게 했다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
“칸나, 나한테 의지해. 나한테 의지하면 되잖아.”
“…너는 의지가 안 돼.”
칸나가 계속 울며 말했다. 이건 좀 충격인데.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칸나가 말을 이었다.
“넌 날 의지하지 않잖아. 근데 어떻게 내가 널 의지하겠어?”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난 결국 칸나에게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이 세계의 진실에 대해서. 내가 호흡을 가다듬자 갑자기 누군가가 우리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나와 칸나는 옆을 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악, 썅, 깜짝이야.”
그곳에는 바로, 웃고 있는 라피테스 공작이 있었다. 대전에서 사람들이 빠질 때 같이 빠진 줄 알았다만, 아직 안 가고 남아 있던 거였다.
“오랜만에 보는군, 에퍼리 후작, 칸나 소령.”
“뭐, 뭐야. 라피테스 공작, 우리가 보여?”
난 당황해서 공작한테 반말로 말했다. 솔직히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라피테스 공작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보는 눈이 많으니.”
라피테스 공작은 바로 일어나 짐을 챙긴 다음 걸었다. 칸나도 어지간히 놀란 듯 눈물이 쏙 들어간 듯했다. 난 그녀의 손을 잡고 라피테스 공작을 뒤따라갔다.
라피테스 공작은 공작저로 갔다. 여기도 오랜만이다. 아니, 3년이나 지났다고 했지. 대체 왜 3년이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라피테스 공작에게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공작님, 오셨습니까.”
“응, 그래. 아이리는?”
“방 안에 계십니다. 나오시라고 할까요?”
“됐다.”
라임 집사도 공작령에서 수도로 올라왔는지 라피테스 공작을 맞았다. 오랜만이다.
아이리도 오랜만에 보고 싶기는 한데. 하지만 당장은 라피테스 공작에게 사실을 듣는 게 먼저였다.
“지금부터 응접실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도록.”
“네.”
라피테스 공작은 느긋하게 차를 끓이고 차를 다 따른 다음에야 앉았다. 물론 자기 것만. 당연하지만, 우리는 찻잔도 만질 수 없었기에.
“그만 먹이고 빨리 말해 주지? 우리 상태에 대해서.”
“뭐, 말해 줄 건 없는데. 나도 그냥 알레프한테 전해 들은 거라.”
라피테스 공작은 자연스럽게 알레프라는 이름을 꺼냈다. 그렇다면 나도 당연히 물어봐야 할 게 생겼다.
“검은 무리야, 당신?”
“아니, 그건 아니고. 검은 무리와 거래를 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검은 무리도 꽤 돈이 되거든. 그냥 고객이니까 부탁을 좀 받았다고 해야 하나.”
“고객?”
라피테스 공작은 허허 웃었다. 그는 품에 있는 쪽지를 꺼내서 우리 쪽을 향해 펼쳤다.
그것에는 깔끔한 필적으로 써진 편지가 있었다. 난 그것을 보기 전에 물었다.
“그나저나, 그러면 왜 우리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거지? 아니, 왜 당신만 볼 수 있는 거지?”
“그건 뭐, 별것 아니네. 옌시의 기술이지. 옌시에 가면 신기한 기술들이 많아. 자네도 곧 알게 되겠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고 눈에서 렌즈를 빼냈다.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콘택트렌즈 같은 것이었다.
“이걸 끼면 영혼과 교감할 수 있게 되지. 옌시 사람들은 이걸 경멸을 담아 신안(神眼)이라고 하지.”
“그러면 우리는 지금 영혼 상태라는 것?”
“그렇지.”
너무 어이없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라피테스 공작은 다시 렌즈를 끼고 칸나를 바라보았다.
“스킬을 못 쓰는 것도 그 때문이야. 스킬은 육체라는 그릇에 담기는 거라서. 그러니 너무 괘념치 말게. 물론 자네들의 육체는 여신이 수거해 갔겠지만.”
“왜 영혼이 된 건데?”
“쪽지를 읽어 보게.”
아, 편지가 있었지. 이미 칸나는 그걸 읽고 있었다.
- 알레프입니다. 영혼 상태로 당신들을 빼냈습니다. 아마 시간도 꽤 지났을 겁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을 때의 시간과 영혼만 떠다닐 때의 시간은 흐르는 속도가 다르니까요. 어떻게 했는지는 묻지 마시지요. 세간 사람들이 말하는 흑마법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3년이나 지난 건가. 난 계속 읽어 보기로 했다.
- 당신들에게서 영혼만 빼낸 이유는, 이미 당신들의 육체는 여신에게 주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여신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은 여신의 눈을 피해서 새로운 육체를 얻어야 합니다.
이건 또 뭔 개소리야.
- 옌시에 가면 신체 제작자가 있을 겁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신체에 영혼을 장착하십시오. 지도는 밑에 그려 놓겠습니다. 그나저나, 옌시에 있는 사람들도 당신들을 못 알아볼 테니 신안을 가진 사람 혹은 신성력을 가진 사람과 함께 동행해 주시면 됩니다. 신성력을 가진 사람은 당신들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밑에는 옌시의 지도와 우리의 목적지가 상세히 그려져 있었다. 난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동행도 필요한 건가. 그렇다면 라피테스 공작?
“신안을 가진 사람이랑 같이 동행하라는데?”
“이런, 이건 일회용 렌즈라서요. 이때쯤 오신다고 해서 끼고 지냈을 뿐, 이제부터는 전 아마 못 볼 겁니다. 듣지도 못할 거고요.”
라피테스 공작은 허허 웃었다. 렌즈에 별 희한한 게 다 붙어 있네. 그때 응접실의 문이 급하게 열렸다.
“아버지, 이것 좀 여쭤보고 싶은데…….”
나와 칸나 눈에 아이리가 보였다. 3년 동안 조금 키가 큰 것 같은데. 아이리는 응접실에 들어와서 돌처럼 굳었다. 뭐지. 아이리는 우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확실한 초점이었다. 아, 아이리도 오른쪽 눈에 신성력이 있었나. 난 아이리와 반갑게 인사하려 했지만, 아이리는 전혀 뜻 모를 말을 뱉었다.
“…삿된 것들! 물러나라!”
아이리의 검이 우리의 목을 노렸다. 난 칸나의 머리를 잡고 같이 숙였다. 우리의 머리칼이 잘려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뭔 상황이냐,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