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시간아, 천천히 (1)
올해로 스물셋이 된 아이리 라피테스는 소드 스페셜리스트 1의 등위를 취득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가테스 트라프비체, 실종자가 된 에퍼리 션을 제외하면 이런 성취를 보여 주는 사람은 없었다.
제위가 바뀌고, 혼란기에 아이리 라피테스는 제국의 새로운 에너지를 상징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공녀님, 오늘도 오셨군요.”
“네. 안녕하세요.”
“말은 편하게 하셔도 된다니까. 하긴, 공녀님이 말을 들으면 공녀님이 아니죠.”
“무슨 뜻이에요?”
아이리는 웃으며 자연스럽게 봉사원의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녀가 매주 들르는 독거노인을 위한 요양원이었다.
“공녀님이 매주 와 주신 지도 한 3년 됐겠네요.”
“다다음 달이 3년째예요.”
“그걸 다 세고 있으셨어요? 똑똑하기도 하셔라. 공녀님을 데리고 가실 남자분은 정말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야.”
“…음, 그런 말은 하지 마요. 창피해.”
아이리는 옷깃에 낀 은빛 머리를 정리했다. 옷깃에 낄 정도면 자를 때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머리 길이를 항상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3년째였다. 머리를 바꾸면 길거리에서 어쩌다 그가 자신을 봐도 지나칠 것 같아서.
그녀가 요양원에 온 날짜를 셀 수 있는 것도 모두 에퍼리 때문이었다. 그와 칸나가 실종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2달을 거의 폐인처럼 살았으니까.
하지만 폐인처럼 살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었으니까. 그때 그녀가 첫걸음으로 선택한 게 이 요양원이었다.
“오늘도 편지가 많아요, 공녀님.”
“그거 다 장작 대신 넣어 주시면 돼요.”
“어머, 또 그러신다. 한번 읽어 봐요. 정말 제가 보기에 멋진 분들도 많아요.”
원장이 색색의 편지를 흔들었지만 아이리는 그걸 전부 뺏어서 찢어 버렸다. 이름도 궁금하지 않았다.
연서는 받지 않는다고 했는데. 공작저에서 안 받는다고 하니 이렇게 요양원으로 쪽지가 날아오는 것이다. 직접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지만, 아이리는 짜증 나기만 했다.
물론 자신도 사랑을 꿈꾸지 않는 건 아니었다. 겨울, 요양원을 나서는 새벽, 쓸쓸히 문을 나설 때 파란 꽃의 향기와 사랑을 전해 줄 남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3년이 지난 이제에 와서는 아이리는 자신이 에퍼리를 사랑했는지 안 사랑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다만, 에퍼리를 마음속에서 완전히 지우지 않고서는 남자를 만날 수 없었다. 그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오늘은 뭐부터 해야 하죠?”
“아,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아이리는 원장의 뒤를 따르면서 오늘도 똑같은 하루일 거라 생각했다. 움직이면서 발이 땅에 닿지만, 공기를 가르며 바람을 느끼지만, 은빛 머리가 휘날리지만, 무감각한 느낌. 이 무감각이 어쩌면 행복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요양원 봉사 시간도 끝나고, 아이리는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문전에 섰을 때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런 날이 있다. 공기가 낯선 느낌. 늘 마시고 뱉었던 숨인데 왜 이렇게 새로운 느낌이 드는지.
“공작님은 아직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요.”
아이리는 라임 집사의 인사를 받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집을 잠깐 둘러봤지만 여전히 달라진 건 없었다.
그저 착각일 뿐인가. 하지만 착각이라고 하기엔 뭔가 공기가 달랐다.
그녀는 고개를 털어 냈다. 아이리는 책상에 뒤집혀 있는 옌시어 책을 다시 뒤집었다. 옌시어를 공부한 지도 이제 2년이 되었다.
언젠간 갈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은 옌시 사람이 취향이 아닐까도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가 보고 싶은 곳이었다.
아이리는 계속 책을 봤다. 옌시어로 된 소설책이었다. 내용은 재미있었다. 하지만 집중이 되지 않았다. 검이라도 휘두르고 와야 하나. 그때, 낯선 기운이 더 강해졌다. 밖이 살짝 소란스러웠다.
이제 그녀도 강자의 반열에 든 만큼 발걸음만으로도 사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분명히 아버지였다. 그런데 아버지 옆에 분명 이질적인 기운이 있었다. 둘. 이건 느낌 같은 게 아닌 실재적인 기운이었다.
그녀는 바로 책을 뒤집고 복도로 나갔다. 복도로 나가니 라임 집사가 있었다.
“집사님, 아버지 오셨어요?”
“네. 응접실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누구 손님이라도 오셨나요? 두 명?”
“아뇨, 한 분도 안 오셨습니다. 혼자 오셨습니다.”
그러면, 가야지. 아이리는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어차피 들어갈 핑계야 만들면 그만이다.
“아버지, 이것 좀 여쭤보고 싶은데…….”
아이리는 노크도 안 하고 바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흐릿한 혼이 보였다. 아버지인 라피테스 공작은 그들 앞에 있었다.
바로 그녀는 검을 휘둘렀다. 제2의 검격을 날리려고 할 때, 라피테스 공작이 막아섰다.
“딸아, 그만해라.”
“네?”
라피테스 공작은 그녀의 팔을 막아섰다.
“안대는 아직도 가지고 있느냐?”
“…네.”
갑자기 라피테스 공작이 아이리에게 이상한 걸 물어보았다. 아이리는 요즘도 가끔 피곤하면 안대를 끼고는 했다. 에퍼리가 요정의 반지를 빻아서 뿌린 후로 오른쪽 눈에 이상한 것들이 자주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요상한 현상에 대해서 설명해 줄 사람은 없었다. 분명 신성력의 영향 같았는데, 그 박식한 리얀도 설명해 주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리는 이걸 그냥 환각 내지는 망령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버지, 앞에 이상한 것들이 있어요.”
“진정하고 안대를 좀 껴라.”
그녀가 자연스럽게 오른쪽 눈을 가리려 하자 라피테스 공작은 아이리의 손을 잡고 반대편을 가리라고 했다. 아이리는 갸웃했다. 그녀는 그래도 잠자코 말을 들었다.
오른쪽 눈만 보이게 되자 앞에 있는 사람들의 윤곽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오른쪽 눈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는, 정말 다시 보고 싶어 하던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퍼리, 칸나……?”
쿵.
아이리의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 유령들은 역시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왜인지 그런 느낌이 났다.
계속 아이리는 눈을 찌푸렸다. 오른쪽 눈을 비비기도 했다. 그때, 큰 유령 측에서 자신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왜일까, 따뜻한 기운이 풍겨 왔다.
아이리는 바로 문을 뛰쳐나간 다음 문을 쾅 닫았다. 닫은 문에 기대자니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서 있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푹 주저앉았다. 이걸 대체 무슨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앉은 채로 문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20년을 넘게 봐 왔던 곳이다. 하지만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자신의 몸에서 기억과 영혼이 빠져나간 다음 새롭게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아, 공기가 낯설었던 게 지금 이 순간 때문이었을까. 분명히 그랬을 거다. 벽을 채운 나무의 무늬들, 자신이 깔고 앉은 장판, 기대고 있는 문의 질감… 모든 것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새로운 걸 접할 때의 아무 이유 없는 벅참이 가득 차서 가슴을 터뜨리려 하고 있었다.
* * *
“…아무래도 아이리는 우리를 정확히는 못 알아보는 것 같지?”
“음, 그러네.”
칸나와 나는 그 부분에서는 합의를 봤다. 라피테스 공작은 허허 웃었다.
“그래도 알아는 본 거야. 딸이 저렇게 당황한 건 꽤 오랜만이거든.”
“그런가.”
그때, 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아이리는 울었는지 눈이 살짝 벌게져 있었다. 가뜩이나 붉은 눈에 흰자까지 붉으니 무서운 느낌이다.
“진짜, 에퍼리랑 칸나야?”
“네.”
나는 대답했지만 아이리는 못 알아들은 눈치였다. 그녀는 라피테스 공작과 우리 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라피테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력이 아직 부족한 모양이구나. 감응할 정도는 아닌 것 같군.”
“제, 제가 부족한 건가요?”
아이리가 뭔가 애가 탄다는 듯이 물었다. 그녀는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아이리가 우리 쪽으로 손바닥을 대었다. 나도 모르게 손바닥을 댔다.
난 우리의 손이 스쳐 갈 줄 알았다. 하지만 장심과 장심이 마주치는 순간, 전기가 찌릿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아이리도 마찬가지였는지 몸을 흠칫 떨었다.
“흣. 차가워.”
난 그 말에 손을 떼어 주려 했지만 아이리의 손가락이 갈퀴처럼 내게 얽혀 왔다.
“눈치 보며 피하는 게, 에퍼리가 맞구나. 넌 항상 어색하게 사람들을 배려했지.”
아이리는 날 바라보았다.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른 손을 내밀었다.
“칸나, 잡아 봐.”
그 말에 칸나가 아이리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아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딱하게 감겨 오는 게 칸나 맞구나. 넌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예의가 칼 같았지.”
손과 손 사이, 무슨 청춘 영화도 아니고, 이렇게 얽혀 있는 게 간지럽기 짝이 없었다. 아이리는 기분이 좋다는 듯 웃었다.
“아버지, 잠깐 나가 계실래요? 할 말은 다 끝난 거죠?”
“응?”
갑작스러운 축객령에 라피테스 공작이 살짝 무안해졌다. 하지만 아이리의 눈은 뭔가 강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3년 동안 바뀐 것 같은데.
“그럼. 옛 친구들과 회포라도 풀려무나.”
“네.”
아니, 어쩌려고. 지금 라피테스 공작이라는 통역사가 있어야지 말이 통하는 상황이 아닌지. 라피테스 공작이 나가자마자 아이리는 우리 둘 사이에 안겼다.
그래도 아이리는 나와 칸나는 구분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이리는 말없이 우리에게 안겨 있다가, 몸을 떨어뜨렸다.
“어떻게 말하지?”
“다시 라피테스 공작님을 데려와야 하는 거 아닐까요?”
우리가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아이리가 말했다.
“어떻게 말하지? 이런 말 하고 있는 건 아니지, 에퍼리?”
아이리는 웃었다. 소름 돋네. 아이리는 지금 우리 말을 들을 수 있는데 못 듣는 척하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잘 생각해 봐. 적어도 우리는 얘기할 수 있잖아.”
아이리는 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바닥을 쫙 폈다. 하얀 손바닥에는 어느새 굳은살이 있었다. 난 그제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칸나는 여전히 모르는 눈치였다. 당연하지. 이건 우리 둘만의 얘기였다.
난 그녀의 손바닥에 글씨를 써 주었다. 그녀는 간지럽다는 듯 웃었고, 나는 계속해서 할 말을 적었다. 그녀는 계속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할 말들을 적었다.
난 할 말이 많았고, 그녀는 꺄르르 웃었다. 아이리가 너무 웃자 잠깐 멈출까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계속해.”
왠지 칸나의 눈치가 보였지만 난 결국 쓰는 걸 마쳤다. 아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3년간 받은 편지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걸.”
그녀는 혼잣말을 하면서 웃었다. 난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내 손목을 잡고 내 손바닥에 글씨를 빠르게 휘갈겼다. 마치 칸나에게 들키기 싫다는 듯.
- 기다렸어.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손을 뺐다. 나는 괜히 손바닥을 허벅지에 쓰다듬었다. 간지러워서 웃음이 나왔다.
“다시, 다시 손 줘 봐.”
나는 그녀의 손을 빼앗아서 글을 썼다.
- 말은 들리니까, 그냥 말로 하시면 되잖아요.
- 칸나가 듣는 건 싫어서.
아이리는 잠시 손을 멈췄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느리게 글을 적었다.
- 보고 싶다.
그녀는 그러고 손을 황급히 뺐다. 굉장히 창피한 말을 한 줄은 아는지. 나는 그녀의 손을 다시 뺏었다.
- 도와줄 사람이 있어요.
- 누구?
- 따라와요.
나는 아이리와 칸나의 손을 이끌고 공작저 바깥으로 나갔다. 뭔가, 3년간이나 지났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손에 느껴지는 온기가 너무 좋았다. 나도 모르게 3년이나 흘렀다면, 지금만큼은 천천히 흘러 줘도 되지 않을까. 난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