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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111화 (111/150)

110화 시간아, 천천히 (2)

“잠깐!”

아이리는 공작저 문 앞에서 그렇게 외쳤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아이리는 얼굴이 화끈해졌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이리가 그냥 소리 지른 걸로 보일 터였다.

난 그녀의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 왜요?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아이리는 그리고 문안으로 급하게 들어갔다.

“…화장실인가?”

“몰라.”

나와 칸나는 서로 쳐다보고 아이리를 기다렸다. 어쩐지, 기다려도 그녀는 안 나왔다.

* * *

“집사 아저씨, 시녀들 좀 다 내 방에 모이게 해 줘요.”

“지금요?”

“빨리요.”

아이리는 바로 자신의 방에 들어가 옷을 벗어 던졌다. 이런 집에 있을 때의 차림이라니. 말도 안 되지 않은가.

오늘 다시 에퍼리를 보고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직 자신은 에퍼리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손바닥에 글을 써 준 감각이 살아 있었다. 손에 굳은살이 박여 옛날처럼 그렇게 간지럽지는 않았다. 그저 마음이 간지러워 웃었을 뿐이다.

그렇게 자신을 웃길 사람은, 에퍼리밖에 없었다. 아이리는 그래서 이런 차림으로 에퍼리를 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꾸며 보고 싶었다.

“공녀님, 부르셨나요?”

시녀들이 줄줄이 아이리의 방으로 딸려 왔다. 아이리는 바로 시녀들에게 지시를 했다.

“메리, 넌 머리. 엘핀, 넌 옷. 시아, 넌 화장…….”

아이리는 모든 시녀에게 그렇게 역할을 할당했다. 막상 아이리는 꾸미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시작.”

아이리는 두 팔을 벌리고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시녀들은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냐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이 아름다운 공녀님은 그렇게 뛰어난 용모를 가지고서도 꾸미길 극히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긴, 이해도 되었다. 그녀의 생활은 요양원 봉사 아니면 검술 훈련, 독서뿐. 사교 생활이라고 해 봐야 그저 아는 사람과의 티 타임이니 꾸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리는 몰랐다. 이 꾸미기에 안달 난 시녀들이 아이리를 얼마나 꾸미고 싶어 했는지.

시녀 엘핀이 박수를 쳤다. 다른 시녀들도 같이 박수를 쳤다. 갑자기 박수를 받게 된 아이리는 어리둥절해했다.

“뭐, 뭐 해? 빨리 대충 꾸며 줘. 앞에서 기다린단 말이야.”

“드디어 공녀님을 꾸밀 기회가 왔군요.”

“정말 이대로 죽는가 싶었다니까요.”

시녀들은 아이리가 알아듣지 못할 말만 했다. 시녀들은 눈빛을 빠르게 교환했다.

“죄송하지만, 역할 배분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저 메리, 황궁 의상소에서 5년이나 근무한 경력이 있거든요. 옷을 저한테 맡기셔야죠.”

“엘핀, 네가 전에 담당했던 귀족분이 누구셨더라?”

“하이디 백작 영애셨어.”

“아, 그 머리 화려하시던 분. 오케이, 넌 머리.”

그녀들은 서로 깔깔대며 역할을 맞춰 갔다. 아이리는 모르고 있었지만, 이 시녀들은 누굴 꾸미는 데는 완전한 프로였다. 당연하다. 공작가는 웬만한 시녀 경력으로는 들어올 수 없으니까.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시녀들의 손바닥이 동시에 뻗치자 아이리는 뭔가 무서움을 느껴서 움츠렸다. 그리고 기나긴 시간이 흘렀다.

* * *

“뭐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니야?”

“아니겠지, 뭐.”

여기는 수도 한복판에 공작저다. 내가 느끼기에도 강자들이 근위 기사로 서 있다. 아닌가, 그래도 여신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들어가 봐야 되나?”

칸나가 그렇게 말하자 괜히 내 마음이 흔들린다. 어차피 들어가도 아무도 모를 텐데, 들어나 가 볼까. 그때 현관 뒤쪽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린다.

“조심하세요! 공녀님!”

“이렇게 높은 굽은 좀 걷기 어려워…….”

뭔가 안에서 이상한 소리들이 들린다. 상황을 짐작할 수 없었다. 곧 문이 열렸다. 나와 칸나는 입을 벌렸다. 난 솔직히 지금 이 상황이 살짝 지루했다. 하지만 문을 나온 아이리를 보자니 그 지루함이 확 사라졌다.

길거리에 있던 모든 사람도 아이리를 바라보았다. 안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자체 발광이라는 건 그야말로 저런 사람을 위한 말이다. 아이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빛이 안 나는 곳이 없었다.

그녀의 은발은 목덜미가 드러나게 올려져서 금빛 장신구에 꿰여 있고, 레이스가 달린 하늘하늘한 옷과 하얀 피부 때문에 마치 인형이 걷는 것 같았다.

“이, 있지, 애들아?”

아이리는 뭔가 불안한 음정으로 말했다. 그때 칸나가 내 등을 툭 쳤다.

“왜?”

“빨리 가서 손 잡아 드려.”

나는 뭣도 모르고 아이리의 손을 잡았다. 내가 손을 잡자 불안해하던 아이리가 얼굴을 활짝 피었다.

“있었구나. 뭔가 안 보이니까 답답하네.”

나는 그녀의 손바닥을 펴서 글씨를 써 주려고 했다.

그때 칸나가 다시 내 등을 툭 쳤다.

“예쁘다고만 한 마디 해.”

“응?”

원래는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하고 말할 예정이었는데. 예쁜 거야 이미 알고 있으니까 굳이 말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칸나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난 그래서 억지로 아이리의 손에 예쁘다라는 말을 썼다. 뭐, 억지로는 아닌 셈이다. 진짜 아이리는 너무나도 예뻤으니까. 너무나도라는 부사가 흔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때 아이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리는 얼굴을 붉혔다.

“네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내 얼굴은 보지 말아 줘.”

그녀는 그렇게만 말하고 내 손을 잡았다. 하지만 보지 말라면 또 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니까. 난 앞으로 슬쩍 나아가 아이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리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야말로 기쁨을 감출 수 없는 웃음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 * *

나는 아이리에게 계속 손바닥에 글을 써서 갈 곳을 안내해 주었다. 우리가 갈 곳은 황궁의 지하 감옥이었다. 3년이나 지났다니 마리나도 3년이란 시간을 버텼던 걸까. 그러자니 왠지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사실 그녀는 내 죄를 등에 업고 간 사람이니. 물론 마리나 본인은 자신이 살해했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 자책감이 덜어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랜만에 황궁에 오는데.”

- 잘 안 와요?

“올 일이 거의 없어. 왜냐하면… 좀 귀찮거든. 이렇게 꾸민 것도, 황궁에 올 걸 알았으면 안 꾸몄을걸.”

아이리는 말끝을 흐렸다. 귀찮은 이유는 아무래도 말 안 해 줄 듯했다.

그때, 저 멀리서 잘생긴 남자가 아이리를 알아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니, 공녀님. 황궁에는 어쩐 일로 행차하셨습니까?”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잘생기기는 했다. 전형적인 서구식 미남이라고 해야 하나. 곱슬머리 금발에 푸른 눈.

“그냥, 할 일이 있어서 왔어요.”

말에 섞인 명백한 거부의 의사에도 그 남자는 아이리를 계속 쫓아왔다. 그 남자는 아이리에게 붙어서 시답잖은 얘기들을 계속했다. 날씨 얘기라거나 먹었던 점심 메뉴라거나.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이리는 마치 뭇 남자들의 자석인 양 황궁에 있는 모든 20대 남자들을 끌어들였다.

“아이리 공녀, 오늘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공녀님, 전에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이 없군요…….”

“공녀님, 절 기억하고 계십니까? 작년에 같이 등위 시험 봤던…….”

아이리는 처음에는 예의로라도 몇 번 대답해 줬지만, 너무 사람이 많아지자 아예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잡고 있는 내 손을 더 꽉 쥘 뿐이었다.

무슨 뱀 꼬리 게임인가. 아이리의 뒤꽁무니를 쫓는 사람이 이제 한 트럭이다. 왜 아이리가 황궁에 오기 싫어했는지 단박에 알아 버렸다.

“자, 그만. 해산하세요.”

아이리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뒤를 돌아보고 선포했다. 귀족 남자들은 그런 화가 난 아이리의 얼굴을 봐도 그저 예쁘다며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여기는 황궁이에요. 사교장이 아니라고요.”

“그래도, 공녀께서 답장을 안 보내 주시기에…….”

“편지라는 것에 꼭 답장을 해 줘야 하나요?”

그렇게 말한 건 아이리가 아니었다. 이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은, 이 상황을 완전히 무마할 수 있는 제국의 단 한 사람이었다. 황녀, 아니지 이제는 황제가 된 리얀이었으니까.

“황궁은 아이리 말대로 사교장이 아니에요. 모두 각자 일 보러 가세요.”

이제는 황제가 된 리얀의 말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많던 사람들이 리얀의 한마디에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사라지는 틈에도 아이리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보고자 흘깃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가 흩어지자 리얀이 허리에 한쪽 손을 올렸다.

“너 미쳤니?”

“…왜?”

“지금 네가 그렇게 꾸미고 나타나면 황궁이 마비가 되는 걸 보고서도 그래?”

“그게 내 잘못인가.”

“그래, 네가 너무 예쁜 잘못이지.”

리얀은 웃으며 아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아이리는 머리를 돌려서 빠져나갔다.

“오늘 머리했어. 만지지 마.”

“그건 보면 알아.”

“그럼 만지지 마.”

“근데 왜 이렇게 꾸몄어?”

아이리는 그 짧은 시간에 우리를 슬쩍 쳐다보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꾸미고 싶은 날도 있는 거지.”

“그래, 거짓말하고 싶은 날도 있는 거지.”

리얀은 아이리의 변명을 가볍게 일축했다.

“그래서, 황궁에는 진짜 왜 왔어?”

“성녀님을 보러 왔어.”

“…그 사람은 왜?”

아이리는 날 향해 뒤로 손바닥을 착 내밀었다. 변명거리를 달라는 거였다. 나는 빨리 써 줬다, 아이리의 성격에 맞게.

곧 아이리의 입에서 내가 쓴 말이 나왔다.

“그냥.”

“…음. 안 되겠는걸.”

리얀이 칼같이 대답했다. 아이리는 바로 반발했다.

“왜?”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지. 넌 지금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잖아. 지금 대답은, 마치 3년 전의 너를 보는 것 같았어.”

“그게 뭔데?”

“넌 몰라. 너도 3년간 많이 바뀌었잖아. 지금 너는 좀 이상해. 마치 누군가에게 사주받은 것처럼 행동해.”

아이리랑 내가 동시에 움찔했다. 일단 마리나를 보는 게 문제인데. 마리나는 그래도 이 세계에 대해 실마리를 좀 가지고 있는 인물이니까.

그렇다고 나 혼자서 들어갈 수도 없다. 감옥이라면 열쇠를 따고 들어가야 하는데, 난 통과할 수가 없으니까. 뭔가 어중간한 유령이라고 해야 하나. 뭘 잡을 수도 없으니 아이리가 있어야 했다.

“어쨌든 안 돼.”

“그냥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뭐, 에퍼리랑 칸나에 대해서?”

리얀이 말했다. 아이리가 움찔했다. 리얀은 한숨을 쉬었다.

“성녀가 뭘 알 거라 생각해? 그녀는 에퍼리가 실종되기 전부터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이야.”

리얀은 말했다.

“뭐, 정 궁금해하니 친구의 말을 못 들어줄 것도 없지.”

“저, 정말?”

“대신, 넌 나한테 빚을 한 번 진 거야. 간수한테 연락해 놓을 테니까 알아서 들어가.”

리얀은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렸다.

* * *

아이리는 개인적으로 죄책감이 들었다. 에퍼리를 기다리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리얀 역시, 에퍼리를 기다린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이었던가, 리얀 역시 에퍼리를 사랑한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그건 정말 문득이었다.

“된 거야?”

- 네.

손바닥을 간질이는 에퍼리의 손가락에 그녀는 잠시 생각을 미뤄 두기로 했다. 그래, 일단은 에퍼리의 상태를 제대로 돌려놓고 얘기해도 괜찮을 것이다.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이리는 지하 감옥으로 들어갔다. 간수 한 명이 지키고 있을 정도로 한가한 감옥이었다. 황족을 죽인 사람이 갇혀 있는 곳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이런 지하 감옥에 들어오는 게 처음이었다. 습한 기운에 아이리는 코를 살짝 가렸다. 이러려고 꾸미고 온 건 아니긴 한데.

끝도 없을 것 같은 층계를 다 내려가자 그곳에 단 하나의 방에 있었다. 뭔가, 긴장감이 들었다.

“내, 내가 열어?”

“왔어? 정말 오래 기다렸다.”

아이리가 말하자 대답한 건 마리나였다. 아이리는 열쇠를 만지작댔지만, 뭔가, 꺼려졌다. 안에서 마리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안 물어요, 공녀님. 어차피 옆에 지켜 줄 왕자님도 계시잖아?”

뭐지, 이 여유로움은. 아이리는 긴장감을 가지고 자물쇠를 열었다. 열자마자 문 반대에 붙어 있던 큰 벌레들이 더듬이를 흔들었다.

그것보다 아이리에 눈에 띈 건, 긴 머리였다. 아주, 아주 긴 머리. 금색 머리가 방 반을 메울 정도로 풀려 있었다. 그때, 금색 털뭉치 안에서 초록색 눈이 떠졌다.

“드디어 왔군.”

마리나의 눈이, 아이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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