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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113화 (113/150)

112화 시간아, 천천히 (4)

우리는 지금 도망가야 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는 몰랐다. 검은 나무가 얼마나 원혼이 있어서 여신을 3년 동안 물어뜯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마리나의 말대로라면 그랬다.

지금 우리는 마리나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태. 아이리는 어리벙벙해했다. 마리나는 죽었다. 그녀는 내게 다시 만날 것이라고 했지만 지금 당장은 죽은 상태다. 마리나의 말대로, 우리는 빠져나가야 했다.

“아이리, 칸나!”

나는 그녀들을 불렀다. 칸나를 포함해 아이리도 바라보았다.

아이리는 마리나에게 신성력을 부여 받았기에 나도 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들은 하염없이 마리나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마리나가 죽은 게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나도 그랬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일단 마리나의 말을 믿는 게 빨랐다.

아이리와 칸나의 손을 낚아채어 지하 감옥을 나갔다. 그녀들은 당황해하면서 끌려 나왔다.

“어떡하지?”

아이리가 날 보며 말했다. 그녀의 표정엔 숨길 수 없는 얼떨떨함이 있었다.

“일단 간수를 기절시켜요.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야죠.”

“기절?”

아이리는 잠깐 갸웃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간수는 보통 면회가 끝나면 수형자를 확인하게 되어 있으니까.

간수실은 지하 감옥의 방과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우리가 들어간 곳은 보이지 않았지만, 골목 하나만 돌면 간수실이 바로 보였다.

아이리는 바로 발걸음을 조신하게 하고 조용히 간수실로 들어갔다. 간수실에서는 간수가 책을 보고 있었다. 우리에게 열쇠를 준 그 간수가 맞았다.

“아, 공녀님. 열쇠 반납하러 오셨군요.”

간수는 웃었다. 하지만 난 그때 직감했다, 그를 기절시키는 게 꽤 어렵겠다는 것. 당연히 아이리도 직감한 것 같다. 이 간수는 꽤 강해 보였으니까. 등위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이리에게 제압이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난 아이리에게 가자고 하려고 했다. 물론 바로 추적이 붙겠지만, 그건 일단 뒤로 미루고 싶었다. 일단 아이리에게 위험부담을 지게 하기 싫었으니까.

하지만 아이리는 이상한 행동을 했다.

“…간수님, 제가 열쇠를 못 찾겠네요. 어디 주머니에 넣은 건 맞는데, 주머니가 많아서.”

“네?”

아이리는 옷을 뒤적이며 난처한 목소리를 냈다. 딱 느껴졌다. 이건 연기였다. 아이리는 불행하게도 황족이 아니라 연기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았다.

“아가씨, 그만 주고 나와요. 빨리 가면 되죠.”

내가 말해도 아이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간수도 당황해했다. 아이리는 더 어이없는 말을 했다.

“시간도 없는데, 같이 찾아볼까요?”

“…무슨 소리십니까?”

“음. 그걸 제 입으로 말해야 되나요? 당신이 제 주머니를 뒤져 주세요.”

뭔 헛소리야. 간수는 당연히 상식적인 답변을 했다.

“제가 어찌 공녀님의 몸에 손을 대겠습니까.”

“괜찮아요. 당신 정도면, 멋진걸요.”

어디가? 그녀의 헛소리는 중증에 달해 있었다.

“…안 되나요?”

아이리는 심지어 마치 그 간수를 매혹하는 듯 젖은 눈빛을 해 보였다. 간수는 전기가 통한 듯이 몸이 굳었다. 곧 그의 입이 띄엄띄엄 떨어졌다.

“…허락해 주신다면.”

간수가 숨길 수 없는 거친 호흡을 하며 아이리에게 다가왔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갑자기 그 간수를 살며시 안았다.

그때는 나도 칸나도 그냥 숨죽이며 보고 있었다. 하나, 그건 그냥 안는 척이었다.

곧 아이리의 몸 쪽으로 간수가 쓰러졌다. 안는 척을 하면서 아이리가 뒷목을 쳐 버린 것이다.

“…죄송해요.”

지금 내가 잘 본 것이 맞나. 그 콧대 높은 아가씨인 아이리가 미인계를 쓴 건가. 아이리는 쓰러지려는 그를 잡아 땅바닥에 슬며시 내려놓았다. 이 정도의 얼굴이 되면 자기보다 등위가 높은 사람을 잡을 수도 있군. 하긴, 아이리가 오늘 웬만큼 예쁘게 꾸미고 왔어야지.

“대단하네요.”

“가자.”

아이리도 부끄러웠는지 나와 칸나의 손을 잡았다. 난 끌려가면서 말했다.

“이제 보이니까 굳이 안 잡아도 되는데…….”

“아, 맞다.”

아이리는 황급히 손을 놨다. 그녀는 뒤를 보지도 않고 지하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가려 했던 탓일까.

그녀가 계단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해서 내가 바로 뒤에서 잡아 줬다. 그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리의 드레스는 이런 턱이 높은 계단을 걷기에는 부적합했던 거다.

“조심해요.”

“그래.”

아이리는 그러고 바로 드레스를 무릎 아래까지 다 손으로 찢어 버렸다. 그 순간적인 행동에 난 깜짝 놀랐다.

“괘, 괜찮아요? 비싼 것 같은데.”

“집에 들를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그렇긴 한데, 너무 비싼 재질의 옷 같아서 좀 그렇다. 아이리는 그때 나를 뒤돌아보았다.

“더 이상 이런 실수는 없을 거야. 난 지금 진지하거든.”

아이리의 모습은 아까 당황한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그녀는 찢어진 드레스를 계단 구석에 버리고 올라 나갔다.

* * *

나는 달렸다. 그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지금 칸나도 이렇게 삶이 망가진 마당에 아이리마저 끌어들이는 건 아닌지. 왜 난 이걸 처음부터 생각하지 못했을까. 자책감이 들었다.

“잠깐, 아가씨.”

“왜?”

그녀는 조용히 복화술로 말했다. 지금 황도를 걷고 있지만 그녀에게 시선이 많이 몰려 있었으니까. 찢어진 드레스, 아름다움을 떠나서 아이리는 유명 인사인 듯했다.

“저를 이렇게 도와줘도, 괜찮나요? 아가씨에게는 아가씨의 삶이 있잖아요.”

“뭐?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한다고?”

아이리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됐어. 널 도와주는 게 아니고 칸나를 도와주는 거거든? 그러니까 너무 착각하지 마.”

“그렇긴 해도…….”

“넌 조용히 해. 내가 성녀의 힘을 받은 건, 쓰라고 받은 거야. 말했잖아, 권리의 진정한 근원은 의무라고.”

난 아이리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답답하게 구는 걸까. 아이리가 안 도와주면 많이 힘들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너무 많은 사람을 엮이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네가 옛날에 내 목숨 한 번 구해 줬잖아. 그걸로 퉁치면 되지.”

아이리는 그렇게만 말했다. 난 그런 생각을 했다. S급 헌터라는 직위 같은 건, 아이리 같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게 아닐까.

그녀는 더 말할 시간도 없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그녀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 * *

리얀은 마력구를 바라보았다. 아이리가 어째선지 간수를 기절시키는 장면이었다. 감옥에는 영상 기록 마력구가 없지만, 간수실에는 영상 기록 마력구가 있었다.

자신은 아이리를 알고 있다. 아무 이유 없이 이럴 애는 아니다. 분명, 좀 달랐지. 그때 복도에서 만났을 때도.

3년간 봉사 활동을 하고 검술 훈련을 하고, 거의 금욕적으로 살다시피 한 게 아이리 라피테스다. 그 이유는, 리얀도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에퍼리를 사랑했던 것이 아이리였으니까. 그를 잃은 슬픔에 열심히라도 살아야 했던 거다. 근데 갑자기 이런 이상행동을 보인다라.

결국 그녀는 하나의 결론을 낼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에퍼리와 관련되어 있어.’

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지. 에퍼리의 말과 반대로, 그에 대한 사랑은 더 커졌으면 커졌지 작아지지는 않았다. 그를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아이리를 만나야 했다. 아이리는 방금 성문을 통과했다고 들었다.

대체, 왜?

“선셋 공작, 밖에 있죠? 들어와 봐요.”

리얀은 누군가를 불렀다. 선셋 공작은 다름 아닌 노을이 1호였다. 대신들과 함께 있을 땐 하이에크 공작이라 부르지만, 둘이 있을 때는 선셋 공작이라고 부르기로 합의를 봤다.

에퍼리가 사라졌을 때 노을이들은 그야말로 밤샘 기도를 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에퍼리에 대한 충성심이 그렇게 강한 것들이라 구슬리기는 쉽지 않았지만, 결국 리얀의 노력에 의해 대신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네.”

“잠시, 할 일이 생겼어요.”

리얀은 잠시 숨을 멈추고 말했다.

“…에퍼리에 대한 일이에요.”

“…명하시길.”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리얀의 집무실에서 화려한 빛이 터져 나왔다.

* * *

아이리는 황도 다음 마을에서 바로 자신의 몸에 걸친 패물과 옷가지들을 팔았다. 그것만으로도 몇 달 치 여행 자금이 나올 정도였다.

“아무 말 하지 마.”

그녀는 팔기 전 우리에게 그런 말을 했다. 아니, 나에게 했다는 말이 맞는 거겠지. 사실 지금도 아이리에 대한 마음의 빚이 쌓여 가고 있었다.

아이리는 아무 말 없이 돈을 가지고 뛰기 좋은 복색과 말 한 마리, 가면을 하나 샀다. 그리고 마을에서 바로 벗어났다.

“아가씨, 산으로 가죠. 이제부터 슬슬 사람들이 쫓아올 겁니다.”

“그래.”

그냥 길로 가려던 아이리를 막았다. 난 리얀을 믿는다. 리얀은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이미 아이리를 향한 추적은 시작되었을 터였다.

내 예상은 정확하게 맞았다. 우리가 산을 타는 와중 기사 한 무리가 우루루 몰려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길을 가는 사람들마다 멈춰 세운 뒤 몽타주 같은 걸 펼쳐서 묻는 듯했다.

난 산 아래에 있는 몽타주가 아이리를 그린 것임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S급 헌터의 능력을 가진 내겐 당연한 것이었다. 그때 이상하다는 말을 한 건 칸나였다.

“어떻게 보여, 너는?”

“응?”

“너도 스킬이 모두 사라진 것 아니야?”

난 눈을 깜빡거렸다. 다시 산 아래, 저 멀리 있는 몽타주를 봐도 보이는 건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스킬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분명 나도 스킬이 없으면 이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못 했었지.

근데 지금은 왜 보이는 걸까. 난 가설 하나를 세웠다.

마리나가 말했다. 여신은 아직 검은 나무에게 시달리고 있을 거라고. 그렇다면 스킬에 대한 금제가 조금 약해진 건 아닐까?

“칸나, 나랑 한번 대련해 볼까?”

“응?”

난 바로 칸나의 팔 쪽에 주먹을 뻗었다. 칸나는 어찌 대항하지도 못했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내 주먹을 막을 생각도 못 했다. 내 주먹은 칸나의 팔 바로 앞에 멈춰 섰다.

분명 난 칸나의 실력을 알고 있다. 이 정도면 막을 만한 속도였을 것이다. 칸나는 나와 다르게 초기화가 됐다. 왜?

“칸나, 아가씨, 잠깐 멈춰 보세요.”

“왜?”

“아가씨, 스킬이 몇 개 있어요?”

“스물두 개.”

스무 개라. 아이리는 꽤 열심히 살아온 것 같다. 그건 보면 안다. 그리고 공녀다. 남들보다 스킬을 가질 기회도 많았겠지.

“칸나, 너는?”

“열여섯 개였지.”

아, 지금은 없다고 했나.

사실 스킬 체계는 참으로 이상하다. 왜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허술하다. 나도 그냥 사는 데 지장이 없어 넘어간 것일 뿐이다.

분명 나는 기억한다. 헌터 때의 움직임을 내가 못 쓴 것 그리고 스킬이 열렸을 때 그 움직임을 쓸 수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물론 환생하고 몸이 바뀌어서 근육이 발달되지 않아 실패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까지 했던 경험들이 모두 사라지는 건 당연히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칸나, 넌 무슨 스킬이 있었어? 하나만 대 봐.”

“…정의 집행자.”

“아, 그건 유명하지. 기사들은 그 스킬 있으면 가산점 붙잖아. 칸나, 너 가지고 있었구나?”

아이리가 신기해하며 말했다. 난 계속 생각했다.

정의 집행자라. 딱 칸나에게 어울리는 스킬이다. 이곳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일생이 스킬에 반영된다고 생각한다. 정의롭게 살아오면 정의 집행자라는 스킬이 얻어지는 거겠지.

반대로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정의 집행자라는 스킬이 사라지면 칸나는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 되는 건가? 당연히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정의 집행자라는 스킬을 얻기까지 보인 칸나의 행동들이 정의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스킬이 인간을 재단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근데 여기서는 스킬이 인간을 재단하고 있다. 거기서부터 오류가 발생된 거다.

다시 처음으로. 나는 내 움직임을 알고 있음에도 스킬이라는 금제에 걸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달라진 건 뭘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와중,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분위기? 그게 아니었다. 산이라면 응당 있어야 될 움직임, 풀잎의 흔들림, 나뭇가지 부대끼는 소리가 일시에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아이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킬에 대한 금제를 풀려면 신성모독을 하면 돼.”

나는 아이리를 바라보았다. 그때 다시 바람이 불고 풀이 와르르 무너졌다.

“…어?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했지?”

아이리는 혼란스러워했다. 나도, 칸나도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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