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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114화 (114/150)

113화 시간아, 천천히 (5)

난 아이리를 더 캐물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기에. 칸나도 마찬가지였다. 난 그저 아이리에게 뭔가 생각이 나는 게 있으면 말해 달라고 했고, 아이리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곧 밤이 되었다. 확실히 여기는 발전되지 않은 시대라 그런지 저녁부터는 아예 움직일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우리는 산에 있었기에 일찍 터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나 혼자 일을 다 하니까 억울한데.”

아이리는 땀을 흘리며 텐트 등 여러 가지 장비를 설치하고 불을 피웠다.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물론 야전에 익숙한 건 칸나와 나였지만, 우리가 물건들을 잡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가씨, 망치질은 손목을 쓰면 안 돼요. 그냥 일직선으로 팍. 아시겠죠?”

“모르겠는데.”

난 아이리의 팔을 대신 잡아 주었다. 그리고 망치질의 궤적을 보여 주었다.

“됐죠?”

“…응.”

아이리는 그 이후로 조용히 1인 텐트를 꾸몄다. 칸나와 나는 구석에서 있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다들 이렇게 일찍 자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움직일 수 없지만 여기에만 있어야 하는 상황. 아이리와 칸나, 나는 작게 붙인 장작불에 둘러서 앉았다.

“…난 원래 이런 밤에 돌아다니는 걸 별로 안 좋아해.”

“그건 저도 안 좋아하는데요.”

“아니, 그냥 싫어하는 게 아니야.”

아이리가 말했다.

“내 눈에는 망령이 보이거든. 뭐, 너희를 처음 봤을 때 썰려고 했잖아. 그, 신성력이 깃들어서 그렇겠지. 근데 너희도 정확히 보인 이상 귀신들도 정확히 보일 텐데. 좀 무섭다.”

“그래요?”

“응.”

우리 같은 망령이 많은 건지. 그건 소설에서 묘사되지 않아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도 볼 수 있는 건가. 우리도 망령이니까.

“일단 주무세요, 무슨 망령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잠이 안 오는데?”

“그냥 자요.”

“너넨 졸려? 지금 8시도 안 됐을걸.”

아이리는 그렇게 투정을 부리고 이런저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대략, 3년간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근황 이야기 같은 것들이었다.

꽤 재밌는 내용이 많았다. 리얀이 황제가 되고서 어떤 정책을 펼쳤고, 제논 왕국, 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자리 잡은 왕국과 무슨 교류를 했으며 하는 내용들이었다.

시간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그때만큼은 웃고 즐길 수 있었다. 아이리는 계속 얘기하고 싶은 듯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졸려 하는 게 보였다. 계속 그녀는 우리에게 안 졸리냐고 물어보았다. 근데 신기하게도 나는 졸리지 않았고 칸나도 졸린 기색은 아니었다.

“너넨 진짜 안 졸리니?”

“네.”

“…음, 그래. 근데 이건 그저께 있었던 일인데.”

아이리는 계속 말하려 했다. 나와 칸나는 그냥 듣고 있었지만, 어느새 아이리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난 바로 칸나에게 눈짓을 했다. 칸나가 왼쪽, 내가 오른쪽에서 아이리의 팔을 둘러멨다. 아이리는 이미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우리는 텐트로 들어가 아이리를 뉘었다. 그런데 아이리가 눕자마자 왼쪽으로 몸을 돌아 칸나를 폭 감쌌다. 칸나도 그만 무게중심을 잃어 넘어져 버리고 말았다.

“으…….”

칸나는 일어나려 했지만 이미 아이리가 칸나의 허리 밑으로 손까지 넣어 깍지까지 끼고 말았다.

아이리는 자면서 칸나의 몸에 얼굴을 비볐다. 아마, 그녀의 잠버릇인가 보다.

“…에퍼리, 구해 줘.”

“음.”

뭔가, 구하기에는 애매한데. 금발의 미녀와 은발의 미녀가 부대끼는 걸 보니까 이세계고 뭐고 다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아가씨가 뭔가 인형 같은 걸 끼고 잤나 본데, 스물셋까지.”

“아가씨들은 그런 경우가 좀 많긴 하지.”

“아, 그런가.”

아이리는 칸나의 몸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바람이 더 차게 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칸나, 너도 자면 되겠다.”

“넌 눈치 못 챘니?”

“뭘?”

“우리는 잠을 못 자는 존재가 되어 버렸잖아. 난 한 저녁 6시부터 느꼈는데.”

칸나의 말에 나도 살짝 생각해 보았다. 그런가? 하긴, 너무 졸리지 않긴 했다. 아예 졸린 게 무슨 느낌인지 까먹은 기분이었다.

“우린 밤을 이렇게 새워야 돼.”

“그런가 보네.”

난 쉽게 납득했다. 하긴, 우린 인간의 궤를 벗어난 존재들이니까. 그나저나, 그렇게 생각하니 이 공간이 좀 을씨년스러워졌다. 산속이라 밤새들 특유의 찢어지는 소리가 텐트를 울렸다.

근데 그때였다. 아이리의 은빛 머리에서 무언가 뭉게뭉게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무지갯빛 안개였다. 갑작스레 펼쳐진 안개에 칸나와 나는 당황했다.

나는 바로 바깥으로 나가 보았다. 산 저기 아래에도 마을이 있었고, 거기서도 안개가 쏟아져 나왔다. 뭘까. 그때 어떤 것들이 마을로 우수수 들어가는 게 보였다. 마치 철새 떼가 몰려다니는 것 같았다.

저 정도 거리라면 내 감각이 닿지 않는 것도 당연했지만, 왜일까. 저들은 분명히 사람이 아니었다. 난 사람이 아닌 마물을 대하는 직업이어서 잘 알고 있다. 저 마을로 들어가는 건 분명 사람이 아니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아이리를 깨워야 할까. 이미 텐트 바깥으로도 안개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에퍼리!”

그때 텐트에서 나를 찾는 외침이 들렸다. 칸나의 목소리였다. 옆에서 아이리가 자고 있는데 이렇게 큰 목소리를 낼 리가 없다. 난 바로 텐트로 들어갔다.

이미 안개가 자욱해서 난 칸나를 볼 수도 없었다. 이건 내 감각이 통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였다.

“칸나?”

내가 칸나를 불렀지만 칸나에게선 말이 없었다. 그때 텐트가 펄럭거렸다. 텐트의 작은 틈으로 많은 ‘무언가’가 들어왔다. 난 그것들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일단 아이리가 뿜어낸 안개로 가는 걸 전부 쳐 내서 막았다.

그때 그들이 갑자기 내게 성질을 냈다.

“야, 넌 상도덕도 없냐? 어디서 치고 지랄이야.”

“…예?”

“저것 봐. 갑자기 쳤어, 저놈이.”

“뭐야, 처음 보는 얼굴이기는 한데.”

어느새 내 근처에는 무언가가 많이 모여서 나를 놓고 수군대고 있었다. 뭔가 내가 잘못한 모양이었다.

그들의 형상은 인간이기도 했고, 마물이기도 했고, 벌레이기도 했다.

“거, 혼자만 독점하려 드는 거야? 너무 심하네.”

“이봐, 저기 아가씨가 자네 딸이라도 돼? 딸이라도 그러면 안 돼지, 이 사람아. 상도덕이 있지.”

목소리는 천차만별이었지만, 대개 늙은 사람이 많아서 괜히 공손해지게 되었다. 내가 진짜로 잘못한 건가.

“그, 해코지를 하려는 것 같아서요.”

“이것 봐라? 우리가 무슨 해코지를 해? 자네 유령 생활 처음이야?”

“예, 처음인데요.”

그제야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했다는 얼굴과 느낌이었다.

“아이고, 그러면 말을 하지 그랬나.”

“이 사람, 일단 먼저 들어가게. 유령들의 규칙은 들어가서 설명해 주지.”

내가 처음이라니까 다들 갑자기 착해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뭔가 악한 느낌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정황상 칸나는 아이리의 안개에 잡아먹힌 것 같아 들어가야 하기는 했다.

“그럼 먼저 들어갈게요?”

“응, 응. 먼저 들어가. 가서 보자고.”

갑자기 친근해진 그들이 어색했다.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아이리의 안개에 손을 슬쩍 넣어 봤다. 따뜻한 느낌과 함께 갑자기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났다.

생각해 보니 그걸 안 물어봤네. ‘어디서?’라는 걸 물어봤어야 하는데.

* * *

나는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엄청난 중력이 작용하는 걸 경험했다. 마치 날고 있는 비행기 위에서 뛰어내리는 느낌. 아무리 내가 S급 헌터라도 이렇게 땅에 부딪히면 분명 박살 날 것이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난 공중에서 멈춰 섰다. 뭘까, 이건. 이건 내 힘으로 한 게 아니었다. 근육이 움직이는 느낌이 아니었다. 생각하자마자 되는 느낌.

일단 그 무언가들이 이 안개 속으로 들어오는 걸 떠나서 난 칸나를 찾아야 했다. 어쩌면 아이리도 이 안개 속에 있지 않을까. 슬슬 이 공간에 대한 감이 오는 것 같았다.

“이봐, 여기! 내려와!”

“예?”

내가 비행을 멈추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저 아래서 소리가 들려왔다. 속삭이는 것 같지만 그들과 나의 거리는 너무도 멀었다. 이런 게 가능한 건가?

내가 그들에게로 가겠다 생각했을 때 내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뭔가 신나는 느낌이었다.

“이봐, 이봐. 그러다 주인한테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무슨 주인이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들은 껄껄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화려한 옷을 걸치고 있었고 테이블에는 많은 음식이 형형색색으로 놓여 있었다.

“음식 안 먹은 지 오래 됐지? 빨리 먹게. 원래 이 정도로 성찬을 차리지는 않는데, 자네가 처음이라 내가 많이 차렸어.”

“허허. 나도 이 아저씨가 이렇게 많이 차린 건 처음 보네. 하긴, 서로 불쌍한 것들이니 돕고 살아야지.”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난 못 알아들었다.

“이렇게 차려 줬는데 좀 들지.”

어떤 이가 내게 빵 한 조각을 건넸다. 나는 가만있기도 뭐해 그것을 받아 먹었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빵이 너무 맛있었다. 오감을 타고 손과 발끝까지 탄수화물이 주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오, 감동한 표정이군. 차려 준 보람이 있는걸.”

너무도 맛있어 난 고기를 손으로 집어 뜯었다. 뜯어 보니 사과로 졸인 사슴의 뒷다리 살이었다. 입에서 터져 나오는 육즙과 적당히 기름진 바삭한 껍질은 그야말로 진미였다.

“이봐,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 같은데, 여자 경험은 좀 많나?”

“예?”

갑자기 쑤시고 들어오는 누군가의 말에 난 고기가 목에 걸릴 뻔했다. 꽤 무례한 질문인 것 같았지만 분위기는 전혀 싸하지 않았다. 이 정도 얘기는 다 여기서 통용되는 듯싶었다.

분위기가 주는 압력이나 동화 같은 게 있다. 뭔가 의식도 살짝 희미해진 느낌이다. 여기서는 조금, 졸린 것 같기도 하다.

“어어, 벌써 자면 안 되지. 안 그러면 꿈에 먹혀 버린다고.”

“지금 제가 졸았나요?”

“응. 하긴, 여기 와서 아무것도 없이 잠을 자는 사람도 많아.”

“여기가 어딘데요?”

“꿈속이지.”

역시. 그건 내 추측이 맞았다. 더 구체적으로 따지면, 여기는 아이리의 꿈속이었다.

“꿈속에서는 조심해. 이 아가씨가 험한 인생을 살아왔으면 자네도 험한 꼴을 당할 수 있거든.”

난 그의 말을 알아들으려면 먼 것 같았다. 그나저나, 아이리가 험한 인생을 살았던가?

* * *

칸나가 눈을 떴을 때는 따뜻한 침대 위였다. 방 전체에는 사진들이 쫙 걸려 있었다. 아마 이 귀족 집주인의 선조들일 것이다. 마지막에 걸린 사진 덕분에 칸나는 여기가 어딘지 알게 되었다.

여기는 라피테스 공작령의 공작저였다. 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가 궁금했다. 몸에서 느껴지는 무거움 때문에 여기가 꿈속이라는 건 알아채게 되었다.

“아이리!”

방 바깥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엄하고 날카로운 소리였다. 칸나는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그녀는 신기하게도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갑자기 창 바깥에서 비가 우수수 떨어졌다. 만약 저런 비가 한 시간 오면 도시가 마비 될 정도로, 커다란 비였다. 계속해서 갑작스레 바뀌는 상황에 칸나는 적응할 수 없었다.

칸나는 일단 여기서 아이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칸나는 모든 방을 슬며시 돌아보았다. 괜히 시종들이 돌아다녀서 방에 숨기도 했다. 그들이 자신을 볼 수 있는지는 아직 몰랐다. 그게 확실시되기 전까지는 일단 거동을 조심해야 하는 게 맞았다.

움직이다 보니 꽤 익숙해졌다. 칸나는 벽과 벽 사이와 천장 위쪽의 공간을 통과했다.

벽 사이에서 본 공작저. 그녀는 찬장 안에 머리를 들이밀어 공작저의 수저 개수와 침구들을 잔뜩 구경하다가 결국 아이리의 방을 찾았다.

아이리는 침대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하지만 굉장히 조그마했다. 나이는 10살 내외로 보였다. 이때면 아마 자기를 모를 때인데. 칸나는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아이리는 너무 서럽게 울고 있었다. 꿈이니까 별로 상관없지 않을까. 칸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칸나는 결정했다.

“공녀님.”

아이리는 칸나를 보자마자 뜻밖에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칸나.”

갑자기 배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집이 전부 사라지고 검어졌다. 칸나가 잠깐 눈을 깜빡이자 아이리가 자신이 알고 있는 나이대의 아이리로 돌아왔다. 꿈이라서 이런 것도 가능한 건가.

아이리는 당황한 기색도 아니었다. 뭐, 자기 꿈에서 당황하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하지만 칸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다음 질문에, 칸나는 더 당황스러워해야만 했다.

“칸나는 에퍼리를 좋아해?”

아이리가 칸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붉은 눈빛이 강렬했다. 칸나는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었다. 움직일 수도 없었다.

지금, 칸나는 도망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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