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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115화 (115/150)

114화 시간아, 천천히 (6)

“…음.”

칸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좋아한다, 싫어한다로 나눈다면 당연히 좋아하는 축에 속했다. 하지만 아이리가 듣기 원하는 답은 당연히 그런 게 아닐 테다. 그래도 혹시, 칸나는 다시 물어보았다.

“공녀님은, 제가 에퍼리를 사랑하냐고 묻는 건가요?”

“당연하잖아.”

그렇겠지. 칸나는 할 말이 없거나 어쩌면 할 말이 너무 길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이란 건 그런 거니까. 적어도 본인에게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사랑의 경계란 너무도 명확하지 않은 것이었으니까.

칸나는 이 차례에서 자신에게 다시 물어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은 에퍼리를 사랑하는가?

분명 에퍼리는 자신을 많이 도와주고, 구해 주고, 멋진 모습도 많이 보여 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자신이 사랑을 느꼈나, 그런 것으로는 애매했다.

사랑은 교감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자신은 에퍼리에게 뭔가를 보여 준 것이 없었다. 사실 그래서 에퍼리가 자신에게 서로 의지하자 했을 때 기뻤다. 남들에게는 없는 우리만의 교감이 생긴 것 같아서.

하지만 에퍼리는 자신을 의지할 만한 곳에서 또 자기가 다 짊어지려고 했다.

이 아쉬운 감정을, 완전한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면 사랑이 되기 전의 어떤 감정이라고 해야 하나? 사랑의 유체는 어떤 형태이며, 이걸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가?

“모르겠어요.”

칸나는 많은 고심을 하고 아이리에게 말해 줬지만 아이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안 되지. 사랑은 속도전이잖아. 자, 다시 한번 생각해 봐.”

그때 갑자기 그녀들 옆에 에퍼리가 나타났다. 정확히 말하면 에퍼리는 아니었다. 원판보다 조금 더 잘생긴 에퍼리였다. 이건, 아이리가 만들어 낸 에퍼리인가. 아이리는 바로 에퍼리에게 달려들었다.

“잘 있었어?”

“그럼, 잘 있었지.”

에퍼리는 아이리에게 평소와 달리 반말을 하는 것도 모자라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건 확실히 에퍼리가 아니었다.

“나의 귀여운 아가씨.”

“그런 말 하지 마. 부끄러워.”

에퍼리와 아이리는 누가 봐도 친근한 연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칸나는 알고 있었다, 여기가 아이리의 꿈속이라는 걸.

그때, 아이리가 에퍼리와 키스를 했다. 마치 몇백 번이라도 해 본 양 자연스러웠다. 아이리보다 키가 살짝 큰 에퍼리에 안겨 교감하고 있는 그 장면은 전혀 외설적이지 않았다. 아, 완전한 사랑의 형태를 그들이 보여 주고 있었다.

진하고 달콤해 보이는 키스를 마친 다음 아이리는 에퍼리의 타액을 머금고 다시 물었다.

“어때, 칸나는 에퍼리를 사랑해?”

칸나는 다시 고민해야 했다. 이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 * *

“트라우마, 라고 하지.”

망령 중 한 명이 그렇게 운을 던졌다.

“우리는 이 아가씨의 꿈 구석에서 조용히 있다 가면 돼. 꿈이니만큼 뭐든지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나대면 꿈의 주인이 눈치를 채. 우린 구석에서 즐기다 가면 그만이야.”

“눈치를 채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이 꿈에서 평생 사역해야 할 수도 있어. 그, 원래 꿈이라는 건 깨면 기억이 잘 안 나기 마련이지만, 가끔 인상적인 꿈들은 기억에 남잖나? 그런 꿈들은 망령들이 너무 상상력을 많이 쓴 거지. 그런 인상을 남기면 꿈속에 갇혀. 이 공간의 주인은 아가씨니까.”

그 얘기를 하던 와중 갑자기 배경이 전부 검어졌다. 음식들도 모두 사라지고 꽃밭도 사라졌다. 검은 공간에 우리는 붕 떠 있게 되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죠?”

“음. 별건 아니야. 원래 꿈이라는 게 배경이 확확 바뀌고 그러지 않나? 우리는 그저 즐기기만 하면 돼.”

다시 그는 음식들을 만들었다. 역시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음식들이었다. 그들은 다시 게걸스럽게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그들의 손과 입에 음식들이 더럽게 묻었다. 나도 잠시나마 저렇게 보였던 건지.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지금은 시간이 없는 상태였다. 마리나는 내게 몇천 번의 인생을 살았다고 했고, 나 역시 그랬을 거다. 지금은 그런 시간이다. 절대 낭비할 수 없었다. 잠깐이라도 이런 일시적인 감각들 때문에 홀렸다고 생각하면 창피해 죽을 맛이었다.

“전 갈게요.”

“응? 어딜 가.”

“뭔가,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거든요.”

그들은 뭔가 멍한 얼굴을 했다. 내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는 듯. 그러다가 그들 중 한 명이 묘한 얼굴로 말했다.

“아하. 자네는 이 아가씨와 아는 사이로군?”

“하긴, 맞네. 그렇지 않으면 그럴 리가 없지.”

그들은 말했다.

“금기야, 아는 사람 꿈에 들어오는 건. 다음에는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말하고는 자기들만 안다는 듯 낄낄거렸다. 뭔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움직이기로 했다. 꺼림칙한 느낌이 났다.

아이리가 꿈속에 있을지는 모르겠다. 원래 꿈을 꾸다 보면 자신이 안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하지만 확실히 칸나는 있을 것이었다. 먼저 찾아야 할 건 칸나였다.

칸나를 찾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드니 어째선지 칸나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추적 마법이라도 걸어 놓은 것처럼. 꿈속이니까 가능한 일인 건지. 아마 그들이 음식 같은 걸 내왔던 것도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여기서는 가능했다.

* * *

지금만큼 시간이 필요한 순간이 있었을까. 하지만 아이리는 대답을 독촉하고 있었다. 그 대답도 억지로 끌려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생각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가능한 걸까, 다른 사람의 대답을 억지로 이끌어 낸다는 것이. 칸나는 저항하려 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싫어해요.”

칸나는 어째서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분명히 자신은 에퍼리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고민하고 있었을 뿐. 그런데, 왠지 그렇게 말하고 나니까 자신이 에퍼리를 싫어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아이리는 만족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칸나. 좋아해.”

자신에게 달려드는 아이리가 귀여워져 그냥 힘없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에퍼리 따위야 그냥 뭐 어떻겠나 싶었다.

“칸나, 내가 정말 힘든 일이 있어. 조금 도와줄래?”

“그래야죠.”

뭔가, 이건 자신의 의지가 아닌 것 같지만 말려드는 느낌이다. 그런 느낌이 계속 들었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아이리는 신난다는 듯 팔짝 뛰고 칸나의 손을 잡은 다음 계단을 올라갔다. 어디서 갑자기 계단이 생긴 건지 모르겠다. 검은 배경에서 어느샌가 또 공작저로 바뀐 것이다. 그녀는 다시 아이로 바뀌어 있었고, 에퍼리는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문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아이리, 드디어 정신 차린 거니?”

안에서는 상냥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칸나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처음 이 꿈에 들어오고 나서 들었던, 아이리를 불렀던 그 날카로운 목소리와 동일 인물이었다.

“후, 들어간다.”

아이리는 조심히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 있는 건 은발과 적색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바로 칸나는 이 사람이 아이리의 어머니라는 걸 알아챘다.

“아이리, 왔구나.”

그 여성은 커다란 가위를 들고 있었다. 칸나는 무슨 일인지 몰라서 그저 서 있었다. 그녀는 애초에 칸나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칸나는 알 수 있었다. 여기는, 아이리가 중심인 아이리의 세계였다.

“엄마, 얘기하고 싶어서 왔어요.”

“무슨 얘기? 머리부터 잘라 줄게. 도련님으로 꾸며야지.”

“머리를 자르기 싫다는 걸 얘기하러 왔어요.”

아이리 역시 칸나를 못 본 척하고 말을 했다. 칸나는 그냥 어떤 마력구에 기록된 영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에 빠져들었다.

“무슨 말이니? 그럼 예프린에게 그 책임을 씌우겠다는 얘기야? 언니가 되어서는, 참으로 꼴불견이구나.”

“예프린한테도 그만둬요. 그 아이를 잃어버리기 싫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아이리의 어머니는 얼굴을 꺾고 깔깔 웃었다. 그 웃음이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가히 송곳이라고 할 만했다.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들자마자 바깥에 먹구름이 끼고 곧 번개가 쳤다.

“에엥, 엄마, 하기 싫어요. 그냥 예프린한테 넘겨요. 공작의 직위를 꼭 받아야 되는 건가요?”

아이리의 어머니는 아이리보다 두 배 이상 큰 덩치로 침대에 누워 두 팔과 두 발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 비현실적이다 못해 기괴해 보였다.

“하기 싫어, 하기 싫어, 하기 싫어.”

칸나가 아이리를 보니 얼굴이 흙빛이 되어 가고 있었다. 지금 자신은 아이리의 과거를 보고 있는 듯했다. 무언가 완전히 왜곡된. 뭔지는 몰라도, 아이리를 도와줘야 했다. 칸나는 앞으로 나갔다.

“그만하세요. 아이가 떨고 있잖아요.”

“응? 넌 뭐니?”

아이리의 어머니는 다시 의자에 앉아 칸나를 보았다. 순진무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리의 친구구나? 그렇지?”

“네. 그러니까 그만하세요.”

칸나는 자신이 목소리를 낼 때마다 이 사람들에게 인식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리의 어머니는 웃었다. 그리고 칸나의 눈앞에 순식간에 나타났다.

칸나의 어깨에 격통이 일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니 아이리의 어머니가 들고 있던 가위가 꽂혀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찔렀지. 그래도 자신은 이 나이대에서 제국에서 촉망받던 검사가 아니던가.

아이리의 어머니는 가위를 빼어 칸나의 배를 쑤셨다. 어깨에서 피가 솟고 내장이 헤집어지는 느낌이 났다.

“남의 과거에 참견하면 안 된단다.”

속삭이는 어머니의 말. 아이리의 비명과 함께 칸나는 의식을 잃었다.

* * *

난 바로 칸나가 의식을 잃었다는 걸 느꼈다. 왜냐하면, 내가 칸나와 연결되어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슬슬 이 공간에서 힘을 사용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바라면 힘이 된다. 상상력이 힘인 거다.

지금 내가 바라는 건 명확했다. 칸나를 구하는 것. 그 과정을 메우는 상상력이 어떻게 채워지는 건지는 모르지만, 바람이 너무 강해서가 아닐까.

난 칸나가 어디 있는지도 대충 알게 되었다. 연결의 힘이었다.

배경이 바뀌고 난리가 났다. 번개가 쳤고 비가 내리기도 했다. 아마 꿈으로 치면 지금 아이리는 악몽을 꾸고 있겠지.

그때, 거대한 벽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쾅, 쾅, 쾅 내 주변에 박혔다. 아, 그들은 말했었다. 내가 힘을 많이 쓰면 주인에게 들킬 수도 있다고.

난 분명 주인, 아이리에게 들킨 것이다. 하긴, 상상력의 범위가 좀 크긴 컸다.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라니. 아마 이건 아이리의 반사적인 방어기제 같은 것일 터다.

“쉽지 않을 건 알았지만.”

아마 이건 아이리의 의식으로 가는 길일 것이다. 아이리는 미로를 만든 것이다. 자신의 의식 내부로 침범하지 말라고.

그렇지만 벽 정도야 간단하게 부술 수 있었다. S급 헌터를 뭘로 보고. 벽을 부술 정도의 힘은 상상력이 아닌 기억이었다.

나는 상상한다, 내 발끝에 힘이 깃들어 이 세상의 모든 벽을 부술 정도의 힘이 나오기를. 곧, 내가 손짓을 안 해도 벽들이 부서졌다.

“쉬운 건가.”

하지만 뒤에서 섬뜩한 느낌이 들어 나는 재빨리 앞으로 굴러 피했다. 뒤를 돌아보니 두 팔과 팔 안쪽에 붙은 날붙이가 보였다. 그건 머리, 가슴, 배로 이루어진 곤충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네.”

그건 노을이였다. 난 그때 느꼈다. 내가 즐겼던 요정의 숲의 노을이들이 아이리에게는 퍽 트라우마가 됐다는 사실을 말이다.

“미안해지네.”

아이리한테도.

그리고 내가 지금 부술 노을이한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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