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시간아, 천천히 (8)
아이리는 칸나가 찔린 걸 봤다. 그건 어떻게 막아 줄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칸나의 짧은 금발이 흔들리고 그녀의 눈이 순식간에 생명을 잃었다.
피가 뿜어져 나올 때 아이리는 어떻게든 칸나의 상처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막지 못했다. 자신의 손은 너무나도 꾸물댔다. 어느새 어머니의 방엔 낭자한 피만 남은 채 자기밖에 없게 되었다.
다시 목이 메고 눈물이 났다. 어째서 자신은 어머니에게 반항할 수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순간 옆에 있는 사람이 칸나가 아닌 에퍼리라면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아니다. 에퍼리가 자신 앞에서 죽는 건 더더욱 안 된다.
그녀는 그저 지금 이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옆에 에퍼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다시 어머니의 침실에 얼굴을 묻었다. 다시 의식을 잃고, 다른 곳으로 빠져들었다.
* * *
나는 예라우프 라피테스가 만들어 준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벽과 천장은 수족관같이 유리로 되어 있었고, 아이리의 기억들이 액체의 형태로 떠다니고 있었다.
요정의 숲, 검은 나무 원정대에서 갔었던 곳들, 알파트로스의 정체를 알았던 평원, 내가 그녀와 처음 만났던 던전들이 흐른다. 내 눈으로 봐서 그런 것일까. 생각보다 내가 많이 눈에 띄었다. 조금 이상한 건, 나보다 좀 잘생기게 보인다는 것이다. 뭔가 보정한 나의 얼굴을 보는 느낌이다.
그녀의 기억들은 마치 도서관의 책들처럼 계속 이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낯선 것들이 많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내가 아는 아이리는 고작 몇 개월 동안의 아이리니까. 다른 아이리는 모를 수밖에 없었다.
기억의 파도. 난 휩쓸렸다. 어느새 나와 그녀가 처음 만났던 던전. 그녀는 분명 처음에 까칠했지. 난 그 전날을 보고 있다. 그녀와 라임 집사가 다투는 모습이다.
별것도 아닌 걸로 다투는 모습이었다. 옷이 마음에 안 든다, 아가씨가 사신 것 아니냐 뭐 이런 것들.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다음 주면 서로 민망한 듯 사과하며 웃을 수 있는. 내가 그녀를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봐서 그렇지, 원래 그녀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상냥함이 기억 곳곳에 있다.
그녀는 원래 시녀에게도 막 대하지 않았고, 악역 영애 같은 모습을 보여 준 적도 없었다. 그저, 우연치 않게 나한테 잠깐 짜증 내는 모습을 보인 것뿐이었다.
난 대체 그녀를 얼마나 오해하고 있던 건지.
터널을 걸으면 걸을수록, 그녀의 기억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아이리라는 사람의 형태가 더욱 입체적으로 갖춰지고 있었다. 나는 지금 아이리라는 배우의 백그라운드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빛만이 아닌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그림자는 더욱 짙어진다. 터널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점점 내가 예라우프를 통해서 알았던 과거와도 가까워진다. 심홍색, 적색, 어두운 보라색, 채도가 낮은 불온한 색깔들이 수족관에 낀다. 어떤 기억들은 괴물처럼 변해 있었다. 아마, 트라우마들일 것이다.
괴물들이 터널 안에 있는 내 존재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유리창에 붙는다. 형태들이 날 보고 속닥거리는 것 같았다. 음식물에 이물질이 섞이면 위로 뜨는 것처럼 내 존재는 눈에 띄게 되어 있는 것 같았다.
형태가 뭉치기 시작했다. 형태가 뭉치고 나서 난 잠깐 그 형태가 아이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보니 아니었다. 좀 더 원숙해 보이고 여유로워 보이는 얼굴. 나쁘게 말하면 조금 표독스러워 보였다.
난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아이리의 어머니였다. 바로 아이리의 트라우마인. 난 바로 검을 상상해서 그녀에게 날렸다. 수족관이 깨지고 아이리의 기억이 내게로 덮쳐 온다.
* * *
“에퍼리, 와 줬구나.”
아이리는 내 얼굴에 부드러운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는 거침이 없었다. 나 역시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왜 그러냐면, 그건 내가 아니니까. 저기 있는 나는 좀 더 잘생긴 나다. 내가 기억의 수족관에서 본 나.
“나의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제 옆에 있으면 다 될 거예요.”
내가 저런 말을 한다고? 아이리는 하나 편안하게 웃으며 내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어.”
“저도요.”
“네가 옆에 있으면 안심돼.”
뭔가 나가면 내가 오징어가 될 것 같은 느낌. 저기 있는 나는 너무 잘생겼다. 실물로 보니까 더 잘생겼네.
서로 난감해 보인다. 아이리는 촉촉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시선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무슨 로맨스 영화를 한 편 보는 것 같다.
“저기.”
“저기.”
서로의 말이 겹치고 서로는 다시 외면한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가씨.”
어떡할까. 난 원래 저런 데서 먼저 말을 꺼내는 성격이 절대 아니었다. 난 뭔가 궁금해졌다.
“제가 먼저 말할까요?”
“…그래.”
“난 당신을 이제부터 아이리라고 부를 거예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확실히 내가 할 말은 아니다. 난 남을 너무 배려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어쩌면 겁이 많은 것일 수도.
“그리고 반말도 할 거야.”
“왜?”
아이리는 물었다.
“아가씨라는 단어 안에 당신을 가둬 두기 싫어. 내가 아가씨라고 발음할 때마다 당신을 유리창 너머에서 보는 느낌이었으니까.”
“그, 그래?”
“말은 짧으면 강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난 지금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말을 하려 하고 있고.”
“…뭔데?”
나까지도 긴장이 된다. 무슨 말일까. 좀 걱정되기는 하는데. 내가 볼 때는, 나로서는 절대 못 할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여기서 만났던 망령들이 왜 아는 사람 꿈에 들어오지 말라는지 이제야 알 것만 같다. 아이리가 기억하는 나와 나는 다른 사람이니까.
어쩌면 아이리가 보는 나는, 기대하는 나는 이런 사람인 걸까?
“잠깐, 그 얘기는 나중에 듣고 싶어.”
“응?”
아이리가 갑자기 내 입을 막았다. 잘생긴 나는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것보다, 칸나를 구하러 가야 돼. 왜 지금 떠올랐지?”
꿈이니까. 꿈이란 건 원래 뒤죽박죽이지 않은가. 지금 이 공간도 확 바뀌었다. 저 둘은 눈치를 못 챈 것 같지만.
갑자기 음산한 집이 되어 버렸다. 둘러보니 공작령 공작저였다. 그래, 처음에 여기에 몸을 의탁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전부 불이 꺼져 있다. 시계 소리만 날카롭게 복도에 울렸다.
난 사실 이미 몸을 나눠서 칸나를 구하러 가고 있었다. 몸을 두 갈래로 나누는 상상 역시 예라우프 라피테스에게 배웠다. 꿈에서는 뭐든지 됐다.
알레프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의 잠재력은 무궁하다고. 결국 상상력도 내가 억눌러 왔던 힘이 아닐까? 정말 여기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기한 느낌이다. 의식이 두 갈래로 나뉘어 있지만 집중력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두 개의 자아는 아닌 느낌이다.
아이리와 잘생긴 나를 보던 자아의 눈에서 아이리와 내가 사라졌다. 그들은 곧 칸나를 쫓던 내 앞에서 발견됐다. 하긴, 지금 여긴 아이리의 꿈속이다. 아이리는 무의식적으로 잠재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리와 날 지켜보던 나를 지웠다.
“에퍼리, 진짜 도와주는 거야?”
“당연하지.”
저기 있는 나는 달달한 말의 자판기 같다. 말의 톤부터 나와 다르다. 아이리는 잘생긴 나에게 몸을 붙였다. 뭐, 개꿈일 수도 있지만. 그녀가 내게 의지하고 있다는 건 느껴졌다.
“왔니?”
아이리가 문을 열자 내가 수족관에서 마지막으로 본 여자가 있었다. 아이리의 어머니였다. 아이리는 갑자기 어린애로 돌아간 것처럼 작아져 있었다.
그리고 아이리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 앞에 머리를 짧게 자른 예프린이 인형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것 보렴. 불쌍한 예프린.”
아이리는 예프린을 보자마자 얼어붙었다. 예프린은 의자를 돌려 아이리를 향해 앉았다.
“언니, 그냥 내가 할게. 방에 돌아가. 이미 늦었어.”
“뭐?”
“책임은 질 수 있는 순간이 따로 있는 거야. 질 수 있다고 질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래서 의무가 권리만큼 소중한 거야.”
예프린의 단호한 말에 아이리의 어머니가 예프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마 예프린에게 진짜로 들은 말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아무 말도 못 할 리가 없으니. 아이리는 떨면서 간신히 말했다.
“칸나는 어딨어?”
“아, 불쌍한 여기사님 말이구나.”
아이리의 어머니는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너를 위해 또 다른 사람이 희생되어 버리고 말았지 뭐니. 넌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 건지.”
그녀는 그러고 깔깔 웃었다. 나는 조용히 방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곳은, 예프린의 방이었다. 예프린의 방 구조는 잘 알고 있다. 아이리는 또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으며, 잘생긴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잘생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이리가 날 믿는 무의식이 있다면, 더 깊은 곳에는 아이리의 트라우마가 있다. 난 직감했다. 저 잘생긴 나라는 놈은 아이리의 어머니를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었다.
푹!
무언가가 찔리는 소리가 났다. 그건 나조차도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한 움직임이었다. 잘생긴 내가 피를 뿜으며 쓰러지고 있다.
“…아.”
아이리의 단말마는 이 상황을 믿고 싶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생각보다 아이리의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는 강했다. 이 꿈에서만큼은 절대적인 존재로 보였다.
엎어진 나는 무력하게도 피를 뿜고 있다. 아이리의 눈에 생기가 사라졌다.
“언니, 나는 하기 싫었는데도 억지로 하는 거야. 의무를 넘기려면 이 정도는 감수했어야지.”
예프린은 아이리의 볼을 톡톡 때리며 말했다. 이건, 정말 아이리의 왜곡된 상상이 가득한 곳이었다.
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때 어느샌가 생각이 지하 세계로 곤두박질쳐 버리는 때가 있지 않는가. 여기는 아이리에게 그런 곳 같았다.
나는 바로 열려 있는 문을 통해 들어갔다. 인기척에 아이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예프린과 아이리의 어머니도.
“…아버지?”
난 상상을 끝마친 상태였다. 난 예라우프 라피테스다. 검은 무리도 그렇게 변장했다면 내가 못 할 리가 없다. 난 내 허리까지 오는 아이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리, 예프린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단다.”
목소리 역시 똑같이 나온다. 아이리는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넌 예프린을 알고 있잖니? 예프린은 그렇게 남에게 쉽게 상처를 줄 사람이 아니잖아. 너에 대한 예프린의 믿음을 생각해 보렴.”
적어도 나는 아이리가 예프린에게 느끼는 사랑이 진짜인 걸 알고 있었다. 엘파힘의 심안으로 봤을 때 그녀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늘 예프린의 차지였으니까.
“…그래도, 예프린이 날 싫어할 수 있어요.”
“아니, 그렇지 않아.”
난 단호하게 말했다.
“예프린은 그저 좋아하는 걸 하는 사람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저 귀여운 예프린은 에퍼리의 도움을 받아서 탈출하잖니?”
“…맞아요.”
아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상황보다 훨씬 미래의 얘기를 하고 있는데도 그녀는 수긍한다. 꿈이니까.
“그녀는 당장 좋은 걸 선택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예프린이 공작의 자리를 선택했던 게 공작의 자리가 좋아서겠어? 그 어린아이가?”
“…그럼요?”
“널 좋아하니까 그렇게 선택한 거야.”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예프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확히 말하면, 아이리 무의식 속의 예프린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거다.
“맞아, 언니. 내가 그럴 사람은 아니야.”
귀신같이 태세 전환을 하고 뻔뻔한 걸 보면 역시 여기는 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리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예라우프, 언제 당신이 애들 교육에 신경 썼었죠?”
아이리의 어머니가 묻는다. 사실 이건 아이리의 물음이라고 봐도 되겠지. 지금 그녀는 혼란스러운 상태다. 과거와 현재, 사람과 사람이 섞이는 마당에 안 혼란스러울 수가 없겠지.
지금이 트라우마가 제일 약해져 있는 순간일 수도 있다는 거다.
난 조용히 상상했다, 내 허리춤에 검이 생기는 상상을. 자, 상상으로 그림을 그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