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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118화 (118/150)

117화 시간아, 천천히 (9)

“아, 아버지, 원래 검도 차고 계셨어요?”

내가 검을 날리려 하자마자 그 검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이리가 날 보면서 검이 생긴 걸 본 것이다.

바로 아이리의 어머니가 가위를 들고 사라졌다. 꿈에서 당황한 나머지 트라우마까지 잠시 꿈속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난 이 세계의 규칙을 대략적으로 알아냈다. 이 세계는 아이리의 세계다. 망령들은 상상력을 쓰면서도 아이리가 눈치채면 안 된다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아이리가 그 상상에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 그것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상상은 나뿐만이 아니라 아이리도 납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대놓고 했던 것일까. 그 바람에 트라우마를 놓치고 말았다.

아이리의 정신을 신경 써야 한다. 원래 꿈이라는 건 낯설다. 어차피 아이리와 칸나도 지금까지 말도 안 되는 낯선 상황을 겪고 있었을 테지만. 이 꿈의 주인은 아이리고, 우리는 그저 불청객에 불과하기 때문에 할 말은 없다.

그리고 어쩌면 잘됐다. 아무리 아이리의 어머니가 트라우마라고 하여도, 아이리 앞에서 어머니를 죽이는 건 좀 못 할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딸아.”

“…네?”

“그, 넌 지금 성녀잖니.”

난 이 말을 하면서도 태클을 안 걸기를 기도했다. 아이리는 고맙게도 수긍해 줬다.

“죽어도 너무 슬퍼하지 말렴. 너에겐 살릴 수 있는 힘이 있잖니?”

“그, 그런가요?”

“눈을 감고 제일 따뜻했던 공간을 떠올려 보렴. 거기서 좀 쉬고 있어.”

아이리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이 공작령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다. 어디든 마음이 편안한 곳으로 갔겠지.

난 예프린의 옷장을 열었다. 그 뒤에 칸나가 있는 걸 알고 있기에. 하지만 그 뒤로는 옷장의 벽만이 보였다. 분명 나와 예프린이 싸웠던 공간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야 했다.

근데 벽장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아이리는 아직 예프린 방의 비밀 통로를 모른다는 말이 되었다.

나는 옷장 뒤에 발을 들이밀었다. 벽장 뒤로 발이 통과한다. 그렇다면 여기는 무슨 공간인가. 내 몸도 모두 옷장 안의 벽으로 들어갔다. 완전한 검은 공간. 우주에 떠 있는 느낌이다.

이곳은 어떤 상상력을 써도 밝아지지 않았다. 그저 검기만 했다. 그래도 별로 상관은 없었다. 몸이 그 계단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난 계속 내려갔다.

“너무 어두운데.”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습해지고 썩은 냄새가 풍겼다.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여기는 상상력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꿈에 이런 곳도 있는 건가.

어느새 계단을 다 내려갔다. 그래도 어두운 건 마찬가지지만, 발치에 뭔가 걸렸다. 빛이 한 줄기도 없는 곳이라 들어서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인간의 형태를 띠는 것 같기도 하다.

“…칸나?”

나는 그것을 조심히 내려놓고 칸나를 불렀다.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적과 암흑이 깨진 건 순식간이었다. 순식간에 천장에서 하얀빛이 나왔다. 그 하얀빛 아래에 펼쳐진 풍경은 기괴했다. 사람들이 무력한 얼굴로 누워 있었는데, 모두 눈을 뜨고 있었다.

이렇게 빛이 작열하는 순간에 그들의 동공에는 어떠한 떨림도 없었다. 그러나 숨은 쉬고 있었다.

“칸나!”

내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칸나는커녕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난 그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하나씩 뒤져 봐야 했고, 결국 칸나를 찾기에 이르렀다.

칸나 역시 아이리의 어머니에게 당한 듯 가위에 찔린 흔적 몇 군데가 있었다. 난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가녀린 그녀의 목이 흔들리면서 고여 있던 침만이 주르륵 흐를 뿐이었다.

이곳은 대체 어떤 공간일까.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천장에서 무언가가 스며드는 느낌이 났다. 난 천장을 바라보았다.

가위가 휙 내 몸을 가르려고 했다. 난 반사적으로 칸나를 붙잡고 뒹굴었다.

“…당신, 여기 들어올 수 있군.”

나를 가위로 찌르려 했던 건 당연히 아이리의 어머니였다.

“어머, 어째서 당신이라 부르시나요? 늘 그랬던 것처럼 이름으로 불러 줘요.”

그녀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여기는 아이리의 꿈속 세계. 어째서 아이리가 모르는 곳을 들어올 수 있는 걸까. 일단 그 질문은 뒤로 미뤄 두고, 난 예라우프의 기억에서 그녀의 이름을 끄집어내었다.

“미리야.”

“그래요, 예라우프.”

미리야 라피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칸나는 정신을 잃은 채였다.

이 트라우마는 대체 얼마나 뿌리 깊어 있었으면 아이리가 모르는 공간까지 따라올 수 있는 건지. 이로 미루어 봤을 때, 그녀는 예라우프처럼 망령이 아니라 아이리의 상상이 만들어 낸 망상이 확실해 보였다.

“여기는 안 돼요, 예라우프. 빨리 나가요.”

미리야는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떨었다. 그녀는 아까 아이리를 지배하던 모습과 달리 두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녀에게도 이곳은 두려운 곳인 모양이었다.

“여기가 어딘데?”

“…이곳을 모른다고요?”

미리야가 얼굴을 심하게 비틀었다.

“당신, 예라우프가 아니군요.”

“맞아.”

난 바로 인정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칸나나 제대로 돌려줘. 어떻게 해야 하지?”

“그건 제 소관이 아니죠.”

미리야는 그리고 내게 달려들었다. 빠른 속도였다. 그녀는 여기서 상상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잘생긴 나를 찌를 때보단 훨씬 느린 속도였다. 아무리 그녀라도 이 공간에서는 제약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난 칸나를 감싸서 엎어졌다.

“그녀가 당신의 약점이군요? 좋아요.”

미리야는 계속 가위를 들고 칸나를 집요하게 노렸다. 나도 힘을 제대로 못 쓰는 마당에 칸나를 돌보면서 싸우려니 상처가 계속 늘어만 갔다.

난 계속 칸나를 깨우려고 했다. 소리도 질러 보고 정말 미안하지만 그녀의 뺨도 쳐 봤다. 하지만 칸나는 요지부동이었다.

칸나는 이곳에 있는 많은 이들과 달랐다. 이곳이 꿈이라는 것도 똑똑한 그녀라면 알았을 거다. 그렇다면 이렇게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나는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했다. 아이리의 꿈속에서 죽었다고 칸나가 실제로 죽지는 않으리라.

난 하나의 선택을 했다. 이미 칸나도 넋을 잃은 상태다. 칸나를, 던진다. 그때의 내 심정은 참담했다.

“당신도 어쩔 수 없군요!”

칸나가 미리야에게 붕 떠서 날아가고, 난 그 밑으로 달려 들어간다. 그러면 적어도 미리야가 날 신경 쓸 줄 알았지만, 미리야는 집요하면서 독하기까지 했다. 내 손이 미리야의 심장을 꿰뚫을 때도 미리야의 가위는 칸나의 몸을 난도질했다.

트라우마라는 건 아이리에게만 잔인한 게 아니었다. 미리야는 심장이 꿰뚫려도 깔깔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 아가씨는 너무 곱게 자랐네요. 이 정도의 고통이면 깰 법도 한데.”

자신의 생각과 상식을 뒤집는 건 쉽지 않다. 자신이 죽은 상태에서,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이 살아날 거라는 상상을 불씨처럼 가지고 있는 인물이 몇이나 되겠는가.

“당신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군요.”

미리야는 심장이 꿰뚫려도 죽지 않는다. 나는 미리야를 그냥 분해를 해 버렸다. 상상이 없다면 여기는 경험이 통하는 곳이었다.

내가 미리야를 헤집어 놓을 때도 그녀는 칸나를 찔렀다. 미리야가 너덜해진 만큼 칸나도 같았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이건 나의 탓이다. 알레프와 내가 대화를 나눌 때 난 칸나를 기절시켰다. 나의 판단으로. 적어도 그 말을 같이 들었다면 칸나가 이런 꼴로 누워 있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미리야는 사라졌다. 난 칸나를 누였다. 그녀는 얼마만큼의 고통을 겪었을까. 아마, 여기서 칸나의 트라우마가 생성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미안해.”

난 칸나를 업고 검은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예프린의 침대에 올려놓은 다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주었다.

미리야를 다시 찾아야 했다.

* * *

난 미리야를 찾으려고 했다. 칸나를 희생양으로 삼으며 예민해진 상상력은 미리야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황도 거리를 쏘다니고 있었다.

황도 거리를 상상한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나를 상상한다. 미리야는 양산을 들고 느리게 황도를 거닐고 있었다.

“예라우프.”

그녀는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이었다. 나와 리얀, 마리나가 술을 마시고 갑자기 삐진 아이리를 배웅한 그 거리.

“걷기 좋죠. 내가 산책을 하자 조르면 당신은 항상 이곳을 거닐고는 했죠.”

“그런가.”

골목을 돌았다. 아이리 역시 우리가 함께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아이리가 걷는 곳은 밤이었다. 그녀는, 나와 같이 걸은 곳을 가장 따뜻했던 공간으로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울컥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 역시 아이리의 바람일 것이다. 미리야와 직접 대면하여 마주치는 것. 그녀는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내가 알던 아이리와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 여기 계셨군요.”

“아이리.”

아이리는 겁도 없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전 여기서 시간이 천천히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됐거든요, 여기는.”

아이리는 주변을 바라보았다. 미리야는 웃었다.

“우연이구나. 나 역시 이곳을 좋아하거든.”

“그러면 안 돼요. 당신과 나는 좋아하는 게 겹치면 안 돼요.”

“왜 그러니?”

아이리는 미리야의 물음에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여기는 저만의 소중한 공간이에요. 여기마저 당신에게 내어 줄 수는 없어요.”

아이리는 숨을 길게 쉬고 말했다.

“이제야 알겠어요. 난 당신을 죽인 걸 후회하지 않아요.”

“정말 그러니? 난 너를 낳아 준 사람인데.”

난 눈을 꽉 감았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이었나. 난 이곳에서 아이리의 치부를 전부 보았다. 아이리의 트라우마도.

난 그걸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아이리에게 들킬까 봐. 하지만 이건 아이리가 매듭지을 일이지,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아이리의 어머니인 미리야가 아이리에게 살해당한 것도, 미리야를 끔찍하게 사랑했던 예라우프가 그에 따라 자살을 했다는 것도.

이게 아이리의 트라우마였다. 한 가족을 파탄 냈다는 것.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물론 그녀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다. 안 그랬으면 그녀 역시 숨이 막혀서 죽었을 테니까.

“어머니가 평민 출신으로 작위에 대한 열망이 있다는 건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에요. 그것 때문에 저희에게 그런 무지막지한 일을 강요했겠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어머니의 말을 따를 순 없잖아요.”

아이리는 어느 순간 나타난 검을 들었다. 그녀가 상상한 것임에 분명했다. 미리야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리는 순식간에 미리야에게 달려들었다.

미리야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 아이리는 미리야의 목을 날렸다. 그녀의 은발에 붉은 피가 물들었다.

그렇게 아이리를 계속 괴롭혔던 미리야는 허무하게도 죽었다. 당연했다. 여기는 아이리의 꿈속. 아이리가 해치우고자 하면 못 할 게 없었다.

다만 궁금했다, 갑자기 그녀의 심경 변화는 어디서 일어난 것인지.

아이리는 조용히 엎어져 숨이 멎은 미리야를 바라보았다. 뭔가 허망한 느낌이었다. 꿈이라서 그런가. 깨어나면 모두 사라질 것이라 그런가.

아이리는 이제 날 바라보았다. 내가 알기로, 그녀는 예라우프 공작 역시 원망했다. 내가 죽으면 모든 게 끝나고 꿈 바깥으로 나가는 걸까. 난 가만히 있었다. 최대한 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하나, 아이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내 이마에 손가락을 찔렀다.

“…에퍼리, 어떻게 내 앞에서 숨을 생각을 해.”

그와 동시에, 내가 상상한 예라우프의 모습이 벗겨지고 나로 돌아왔다. 순식간에 아바타가 벗겨져 당황한 나에게, 더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아이리가 내 앞으로 다가와 발뒤꿈치를 들며 입맞춤을 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대기의 흐름이 느려졌다.

이곳은 그런 공간이었다.

그녀가 시간이 느리게 가길 바라면 그렇게 되는 공간.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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