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마음 조각 (1)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이리가 날 좋아한다는 걸. 아무리 모태 솔로여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물론 긴가민가했다. 그녀는 내게 여지를 주고 있었지만 바보 같은 나는 다가서지 못했다.
하지만 이 꿈속에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꿈 곳곳에 내가 있었고, 나와의 추억들이 너무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나는 비겁하게도 그녀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후에야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된 셈이다.
“…아가씨.”
“응.”
여기서 엘파힘의 심안을 본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아니, 보기 싫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내가 있건 말건 그건 상관없었다.
단순히 스킬 창에 텍스트로 띄워져 있는 호감도 수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지명으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의 색채를 아이리가 뿜어내고 있었다. 난 그 감동을 반감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는 꿈이에요.”
“…그래?”
아이리가 날 본다. 귀여웠다. 모든 행동이 귀엽다.
그녀에게 너무 고마웠다. 이러한 감정을 알려 준 게 너무도 고마웠다. 사랑이란 건 이렇게 아름다운 색채를 가지고 있구나. 그녀의 몸에선 무지갯빛 광채가 나왔다. 내 몸도 얕게나마 감응하고 있었다.
“지금 그런 건 상관없어 보이는데.”
“맞아요. 그런데 저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넌 늘 그렇잖아.”
내 물음에 아이리는 의기양양해했다.
“내가 눈을 다쳤을 때도, 검은 나무를 잡으러 갔을 때도 늘 날 안전한 곳에 놔두고 혼자 처리하러 갔지. 이번에도 그랬잖아. 그래서 알아챘어.”
“별것 아닌 것 같은데요.”
나는 부끄러워서 그렇게 말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였다. 아이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텐 아무것도 아니겠지. 늘 그래 왔을 테니까.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고.”
아이리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히려 그녀가 당당하게 나오자 내가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꿈이고 의식이 몽롱하기 때문에 마음껏 행동하는 듯했지만 나는 달랐으니까.
“시간이 천천히 흐를 거야.”
아이리의 말이 여기서는 명령이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는데 우리만 걷고 있다.
여기는 황도에 있는 공작령이었다. 내가 아이리를 마지막으로 배웅해 준 곳. 그녀는 내 손을 잡고 황궁을 향해 걸었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최대한 돌아서. 그때와 달라진 점은 나란히 걷는다는 것뿐이었다.
“여기 거리도 난 너무 많이 봐 왔어. 근데 특별해진 거지.”
“그렇군요.”
“너와 걸으면서 말이야.”
갑자기 아이리의 공격력이 너무 강해졌다. 꿈속이라서 그런 건가. 나 역시, 아이리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힐끔힐끔 보는 것도 주저하게 된다.
“평범한 게 특별해지는 것. 그게 사랑이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해.”
그 말을 하면서 아이리는 날 바라보았다.
“내가 널 사랑하나 봐. 너랑 같이 있으면 모든 게 특별해지니까.”
그 말에 난 목이 퍽 메었다. 그녀는 아무 흔들림도 없었다. 얼굴이 붉어지지도 않았다.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그때 갑자기 비가 내렸다. 당황스러웠다. 날씨가 아이리의 감정과 관련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맑은 날씨에 비가 오는 건 좀 이상했지만.
이 골목만 돌면 우산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우산꽂이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상상했으니까. 아이리의 눈도 속이고 나도 납득할 수 있는 상상이었다.
난 아이리의 손을 잡고 골목으로 달렸다. 따뜻한 비가 우리를 적신다. 난 빨리 아이리에게 우산을 씌워 주고 싶었다. 우산을 씌운다고 비가 그치겠냐마는 일단 그녀가 이 비에 젖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골목을 돌아가니 우산꽂이가 있었다. 다행이다. 난 우산을 폈다. 하지만 우산은 철로 된 살만 있어 앙상했다. 우산꽂이를 뒤집으니 우산의 막이 없는 꼬챙이들만 가득했다.
“…뭐냐.”
난 어이없어 혼잣말을 하고 주변에 있을 아이리의 머리를 덮을 무언가를 찾았다. 골목을 돌 때마다 계속 상상을 했다. 이불, 파라솔, 우비 등. 하나 내가 들면 이불들은 구멍이 송송 나서 해져 있고, 파라솔 역시 살만 있었으며, 우비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다.
“아가씨, 잠깐만 기다리세요.”
난 아무 말도 안 하는 아이리를 달래느라 바빴다. 뭐가 잘못된 걸까. 내 상상력이 무뎌진 걸까. 아이리의 공격을 받아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계속 헤맨다. 날씨는 맑았지만 비는 거칠어지고 있었다. 아이리나 나나, 이제는 비에 흠뻑 젖고 말았다. 당연하지만 이 세계에 방수라는 개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옷들은 축 늘어졌다.
난 계속 뭔가 아이리에게 씌워 주려 했다. 정말 난 최선을 다했지만, 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뭐가 문제일까. 나는 머리를 굴렸다.
일단 겉옷이 무거워서 벗었다. 비를 잔뜩 머금은 옷이 무겁다. 난 그때 아이리의 기대하는 표정을 살짝 봤다. 바로 표정 관리를 했지만, 난 정답을 그제야 알아챘다.
난 옷을 걸레처럼 비틀어 짜 물기를 없애고 그녀의 머리 위에 펼쳐 줬다.
그때, 거짓말처럼 비가 멈췄다. 아이리가 날 보며 웃었다.
“드디어 정답이네. 길다, 길어.”
“뭐야, 시험인가요?”
“그냥, 이런 거 한번 해 보고 싶었거든.”
아이리의 웃음에 긴장이 풀린다. 별게 아니었구나. 그냥 그녀의 바람이었던 거다, 이런 낭만적인 상황이. 나한테는 문제였던 거고.
그녀가 웃는 걸 보니 별것도 아닌데 웃겼다. 아니, 웃긴 것보다는 그냥 웃음이 나왔다. 웃긴 것과 웃음이 나오는 건 좀 달랐다. 처음 안 사실이다.
나도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벽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나. 나의 문제였다.
“아가씨.”
“응.”
“이 꿈이 기억나시겠어요?”
“모르겠어. 그것보다 졸린걸.”
“전 기억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잊어 줘요.”
아이리는 날 슬며시 바라보았다.
“차는 거야?”
“아뇨. 제가 어떻게 아가씨를 차겠어요.”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했다. 고백에 남자의 몫, 여자의 몫이 어디 있겠냐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내 입으로 먼저 고백하고 싶다고. 아이리는 내 입장에서는 반칙을 한 것이다. 내게 기회도 주지 않았으니까.
또 고민하게 된다. 난 정말 아이리를 사랑하는 것인가에 대한. 너무 답답하다. 이런 내가 나도 답답하다. 내 마음과 감정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다. 사랑이란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르기 때문에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래.”
아이리는 그렇게 말하고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울었다. 갑자기 난처하게 됐다. 난 그녀 옆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아이리는 울고 있다.
성곽의 그늘. 땅에서 올라오는 뜨거움. 앵두. 무지개. 하늘 위로 그녀의 온갖 마음 조각들이 소용돌이칠 거다. 스트레스들의 그림자인 검은 구름이 낀다. 비가 올 조짐. 습한 느낌.
정말로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난 또 나 위주로 생각한 거다. 꿈이라고는 해도 그녀는 엄청난 용기를 냈을 거다.
한 사람의 사랑은 그 사람을 닮았음이 분명하다. 그녀는 부끄러움이 많은 사랑을 하고 있다. 나는, 나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을까. 아직은 모르겠지만, 난 그녀의 고개를 돌렸다.
“보지 마.”
그녀는 눈물로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난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는 얼굴을 숙이려고 하지만 숙일 수 없다. 지금만큼은 내 상상력이 더 강했다. 그녀가 가진 부끄러움보다 내가 가진 미안함이 더 컸다.
나도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이 나온다. 난 그녀의 눈물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눈물이 내 입속으로 들어온다. 따뜻하다. 그녀의 피부에서 달콤한 맛이 느껴지는 것 같다.
꿈이라서 이런 감촉이 느껴지는 걸까. 아니면 원래 아이리의 눈물이 이런 맛인 걸까. 그녀는 계속 눈물을 흘렸고, 난 그걸 계속 핥아먹듯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간지러운지 몸을 살짝 떨었지만, 내가 두 팔을 꽉 잡고 있어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뭐 하는 거야.”
나도 모르겠다. 이게 좀 변태적인 건가. 그냥, 그러고 싶었다. 아니면 나도 꿈이라 정신이 몽롱해진 걸까.
“아가씨.”
난 입을 떼고 아이리를 불렀다. 아이리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못 했다. 내가 여자에게 이렇게 능동적으로 대하는 건 정말 처음이었다.
“잊어요. 알겠죠? 전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제가 먼저 고백하고 싶어요.”
“그런 뜻이었어?”
아이리의 눈망울이 다시 흔들린다. 이렇게 진심을 전하는 게 힘들다. 난 내 식대로 알아줬으면 하지만, 남은 그렇지 않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건 내 마음 안에 있는 모든 감정을 긁어서 혼신을 다해 쏟아 내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 울면 다시 할 거예요.”
내가 엄포를 놓자 아이리가 허리를 꼿꼿이 펴고 눈물을 참으려고 했다. 가만히 있어도 눈에 맺힌 물 때문에 눈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게 너무, 사랑스러웠다.
점차 사랑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느낌일 뿐이지만.
“기다려 줘요.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할게요.”
“그래.”
아이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진정이 된 것 같다. 왠지 그다음에는 어색해져 서로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무슨 용기로 그녀의 얼굴을 그렇게 핥아 댔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했을 뿐이긴 한데 나한테도 창피함이 몰려왔다.
이제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우리의 시간은 끝났다. 여기서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아가씨, 좀 도와주시겠어요?”
“뭔데?”
“따라와 주세요.”
나는 공작저로 아이리를 끌었다. 아무 말 없이 우리는 걸었다. 이것만큼은 아이리의 도움이 필요했다. 난 적어도 이런 상상까지는 못 하니까.
우린 공작저로 들어가 곧 예프린의 침실로 갔다. 예프린의 침실에는 이불이 끝까지 덮인 칸나가 있었다. 당연히 아이리는 이 이불 끝까지 덮인 무언가가 칸나일 걸 모를 것이다.
“놀라지 마세요.”
“…그래.”
나는 이불을 걷었다. 그곳에는 역시 칸나가 있었다. 가위에 찔린 채, 눈을 뜬 채로.
아이리는 바로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녀는 바로 하얀색 신성력을 뿌렸다. 칸나의 의식은 아이리의 꿈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것이다.
곧 칸나의 의식이 돌아왔다. 칸나는 침대에서 우리 둘을 보더니 벌떡 일어났다.
“…으. 공녀님. 에퍼리.”
아이리는 칸나를 끌어안았다. 난 뭔가 칸나에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왠지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게 나 같기 때문이다.
내가 알레프의 대화를 공유하고 그녀가 상상력의 힘만 알았어도 이렇게까지 됐을까 하는 생각.
아이리는 날 곧장 째려봤다.
“…에퍼리.”
“네?”
“난 네가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게 싫어.”
갑자기 그런 말을 하니까 당황스럽다. 난 그제야 아이리에게 계속 생각이 읽혔다는 걸 알아차렸다. 여기는 꿈속이었다. 아이리는 절대적인 사람이었고.
“언제부터 그랬어요?”
“처음부터.”
“…잠깐.”
그러면 방금 전에는 왜 운 거야, 내 마음을 알았으면서. 내가 그렇게 생각하자 아이리가 피식 웃었다.
…날 놀린 거구나.
내가 도망치려 하자 아이리가 내 손을 잡았다.
“칸나, 얘 생각을 봐 봐. 그리고 말해 줘.”
내 뇌가 마치 바깥으로 투사되는 느낌이었다. 나도 내 생각을 내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내 생각들이 모여서 그림이 되고 곧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녀가 이렇게 강경책을 쓸 줄은 몰랐는데. 난 도망치려 했지만 그녀가 내 손을 꽉 붙잡아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 그렇듯 뒤로 흐른다. 내가 감추고 싶었던 과거가, 그녀들 앞에서 춤을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