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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120화 (120/150)

119화 마음 조각 (2)

내 과거들. 그녀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복장의 내가 있다. 에퍼리 션이 아닌 주환영이 저기 있다.

장면으로만 보면 멋진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뒤에는 내가 생각했던 모든 것이 자막처럼 흘러가고 있다. 헌터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권태감, 방송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혐오감. 관념적인 우울함은 색채로 표현된다.

“…….”

“…….”

칸나와 아이리는 그저 바라볼 뿐이다. 난 죄인이라도 된 것만 같다. 숨길 수밖에 없었던 과거지만, 숨겼다는 것 자체로.

“…이방인, 실제로 존재하는 거였구나. 난 전설 속에서나 있는 건 줄 알았어.”

아이리가 먼저 운을 뗐다. 그녀는 집중해서 내 기억들을 바라보았다. 나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 인생을 타인과 같이 감상하는 느낌은 오묘했다.

이렇게 보니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고등학생 때 S급 헌터라는 등급을 받고, 그 이후 돈이 되는 걸 찾다가, 망나니처럼 살고, 방황하기만 하던 삶이었다.

이렇게 보니 추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의뢰가 끝나면 혼자 집으로 돌아가 맥주 한 캔을 따거나, 가끔 구공환 아저씨를 만나 술을 먹든가.

“재미없네요.”

“재미있는데?”

내가 말하자 아이리가 바로 어깃장을 놓았다. 난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꽤나 창피하다. 짧다면 짧은 순간, 길다면 긴 순간이다. 하지만 나도 아이리의 과거를 봤으니 막을 수 있는 명분이 없다.

곧 내 지구에서의 기억이 끝나고 트라프비체 제국으로 바뀌었다. 그러자 아이리의 표정도 살짝 변했다. 왜 그렇지 않은가. 영화배우들도 신인 때는 자기가 나오는 걸 모니터링하는 게 힘들다고. 아이리도 뭔가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게 창피한 모양이다.

- 그럼요. 아이리 라피테스 공작 영애의 손앞에 세상 깨끗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 알고는 있구나. 흥.

그 말이 나오자 아이리의 얼굴이 빨개진다. 하긴, 저때 좀 싸가지 없어 보이기는 했다. 근데 그녀는 그때 라임 집사와 싸웠다는 짤막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지.

그때 아이리가 날 확 째려보았다. 아, 지금은 내 생각이 아이리와 연동되어 있는 상태였다. 싸가지 없다는 말을 들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어떡하랴, 그게 사실인 것을. 아이리도 그걸 알고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장미꽃이 흩뿌려진 침대는 뭔 촌스러운 이름이래.”

“그거…….”

뭔가 설명하기가 애매하다. 하긴, 내가 여기 떨어지고 나서는 원작과 생각을 떼어 놓으려야 놓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냥 내 기억들을 전부 보면 아마 이해가 되리라 생각했다.

내 이야기는 그렇게 흐른다. 내 생각이 주석처럼 달린 영상들이. 공작령에서 있었던 일들, 황도에서 있었던 일들, 마더 트리를 잡았던 일, 검은 나무를 잡았던 일, 대제와의 만남, 리바이어던이 습격했던 사건, 가테스의 살해, 내 과거들이 가감 없이 펼쳐진다.

그 과정에서 칸나와 아이리는 나에 대한 많은 걸 이해했을 거다. 이곳이 책 속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부터,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잊어 줬으면 좋겠지만 잊지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정말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시원한 면도 있었으니까.

완전히 상반된 감정이 서로 자기주장을 하는 걸 보면 나도 완성된 사람은 아닌 듯하다. 풍향 따라 고개를 돌리는 강아지풀하고 다를 게 뭔가 생각하기도 하고.

“비밀이 많았구나.”

“모든 사람이 그렇죠.”

그렇게 짧은 코멘트들과 함께,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기록이 끝났다. 뭔가 어색했다.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칸나였다.

“에퍼리.”

한숨과 섞인 그 말이 날 긴장시켰다. 뭔가 호된 꾸지람을 들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네가 먼저 말했잖아, 서로 의지하자고. 물론 이걸 보니까 다 얘기할 수 없었던 것도 이해는 돼. 근데, 넌 쓸모없이 혼자 너무 많이 지려고 하잖아.”

칸나는 계속 말했다. 아이리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막말로 내가 이 꿈에서 다친 게 왜 너 때문이야? 넌 너의 책임을 헷갈리고 있잖아. 내가 다친 건 내 책임이야. 왜 남의 책임을 뺏으려고 해?”

“…미안해.”

할 말이 없었다. 나도 안다. 알지만 천성이 그렇다. 대체 왜 그럴까. 나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가끔 너무 귀찮으면 쓰레기도 땅바닥에 몰래 버리고, 힘든 사람을 못 본 척할 때도 있었다.

그런 내가 바뀌었던 건 S급 헌터라는 등급을 받고 나서였던 것 같다. 모두가 경외시하고 떠받들어 주는 그 상황에서 난 뭐라도 해야 했다. 그만큼 S급 헌터는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어쩌면 내가 했던 그 생각이 여기서 말하는 귀족의 책임, 의무와도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그러면서 귀족들의 의무와 책임을 비웃었구나. 난 그런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기도 했고.

그러나 그런 생각이 틀어진 건 점점 내가 이 세상의 비밀을 알게 됐을 때였다. 무언가 음모가 있는 것 같은 이 세계에서 나 혼자만이 알고 있다 생각하니 도저히 부담이 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됐어. 대충 알았어, 너의 생각. 너라는 사람도.”

아이리가 박수를 쳤다. 난 직감했다.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제 이 꿈에서 나갈 때가 된 것이다. 창문을 바라보니 저 멀리 구름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칸나, 꿈에서 깰 때가 됐어.”

“그렇군요.”

과연 이 꿈 바깥에서의 우리 관계는 달라져 있을까. 나라는 사람을 복잡하다고 짜증 내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 아이리가 내 뒤통수를 짧게 쳤다.

“적당히 해라. 응?”

“…아.”

아직도 연동되어 있구나. 어느새 구름들이 창문 앞까지 무너지고 있었다. 집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 시야가 새까매졌다.

* * *

꿈에서 깼다고 생각했다. 베개랑은 조금 다른 느낌. 더 푹신하고, 더 부드럽고, 더 따뜻하고, 더 좋은 향기가 나고… 일어나고 싶지 않은 느낌. 오랜만에 졸리다, 라는 느낌에 나는 확 깼다.

내가 졸릴 리가 없지 않은가. 난 지금 망령인데. 그렇다면, 여기는 아직도 꿈이다. 눈을 뜨니 아이리가 떡하니 보였다. 난 놀라서 바로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녀가 내 이마에 손을 대었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나는 엄청난 힘에 눌린 것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피곤했잖아. 좀 누워서 쉬어.”

“…아니, 아직도 꿈이에요?”

“내가 두 번 꿈을 꿨나 봐. 꿈속의 꿈.”

아이리는 말했다.

“왜, 싸가지 없는 애 무릎 위에서는 자기 싫어?”

난 바로 깨달았다. 내가 베개로 받치고 있는 건 아이리의 허벅지였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있었고, 퉁명한 말과는 다르게 내 앞머리를 골라 주었다. 뭔가 화장품을 쓰는 것 같았다.

“아뇨.”

“그래.”

아이리는 내 머리를 가지고 무슨 공작을 하는지, 계속 심혈을 기울여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내 이마에 잔잔한 바람이 스친다. 그녀의 손길은 봄비와 같다. 그치지 마라. 이 시간아, 그치지 말아라.

“다 됐다.”

“뭐가요?”

“거울 봐 봐.”

그녀는 손거울을 꺼내어 내게 보여 주었다. 생머리였던 내 머리칼이 살짝 곱슬머리처럼 말려 있었다.

“예쁘네요.”

“그렇지? 그럼 일어나.”

“음.”

나는 뭔가 일어나기 싫어서, 머리를 살짝 굴렸다. 아이리가 간지러웠는지 웃었다. 난 일어났다.

“어디 가는 건가요?”

“응, 아버지 만나러 가려고.”

아이리가 말했다. 난 머리를 굴리다가 헉 소리를 내었다. 맞다. 내 기억 속에는 예라우프의 기억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라피테스 공작가의 비밀을 절대 누설해서는 안 될 사람에게 누설한 셈이었다.

“괜찮아. 좀 놀라긴 했지만, 잊으면 되니까. 말했잖아, 이 꿈은 잊겠다고.”

“그러면 굳이 만나러 가셔야 되나요?”

“오히려 잊으려니까 용기가 생기던걸.”

아이리가 슬며시 손을 내민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맞부딪치고, 서로 손을 잡으려다 헛손질을 하고 만다. 그 상황이 웃음이 났다.

“대신 네가 옆에 있어 줘.”

“제가 무슨 도움이 될까요?”

“야.”

갑자기 그녀의 말투에 서리가 앉았다. 난 바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앞으로 내 앞에서 너를 깎아내리지 마. 그건 너를 사랑하는 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거야. 내가 이 꿈을 잊더라도, 넌 이 말을 잊지 마.”

“…그런가요. 죄송해요.”

“그래.”

아이리와 내 손이 그제야 잡힌다. 나란히 걷는다. 확실히, 꿈은 불안정했다. 아무리 꿈속의 꿈이라도, 한 꿈이 깨졌으면 이 꿈도 불안하겠지. 시간이 별로 없었다. 아이리 기억들의 파편이 날아다녔다.

아이리는 내 손을 잡고 기억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마치 별을 가리키듯. 저기, 예프린과 아이리가 눈을 가지고 놀고 있는 장면들이 떠다닌다.

“내가 예프린하고 원래 눈사람을 만들기로 했거든? 근데 어쩌다가 나한테 눈이 튄 거야. 그래서 나도 예프린한테 눈을 던졌어. 근데 눈이 그렇게 깨끗한 눈이 아니어서, 우리가 흙투성이가 된 거야. 라임 집사한테 엄청 혼났었는데 말이야.”

나는 그렇게 그녀의 기억들을 보았다. 이해가 안 됐던 그녀의 기억들도 그녀의 설명이 붙으니 이해할 수 있었다.

“뭔가 창피한걸.”

“아니에요. 좋은데요.”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기분. 이런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어떻게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구경할까. 그녀의 꿈속에서 그녀는 최고의 가이드였다.

아이리는 쉴 새 없이 떠들었고, 난 그것을 들으며 황도 바깥으로 나갔다. 꿈의 외곽으로 가는 느낌이 든다. 점점 배경이 어두워졌으니.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빛이 나서 앞길을 밝혀 주었다.

숨어서 자신들의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던 망령들이 아이리를 보고 헐레벌떡 도망친다.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같이 웃었다.

우리는 꿈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땅과 하늘의 경계가 모호해질 정도로 어두운 공간. 아이리는 예라우프를 불렀다.

“아버지, 나오세요. 여기 있는 것 알아요.”

말이 고요한 어둠에 떠돈다. 아무도 없는 듯했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아이리도 알았을 거다, 예라우프 라피테스가 바로 이곳에 있다는 것을.

얼마간 기다리자 어둠 속에서 예라우프 라피테스가 나타났다. 그는 나오자마자 나를 쏘아보았다. 내 잘못도 있었기에 난 할 말이 없었다.

“…자네, 꽤 입이 싸군.”

“제가 오고 싶어서 왔어요.”

아이리는 내 앞에 섰다. 라피테스는 아이리 앞에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할 말이 없구나. 저 친구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난 너희를 버리고 간 사람이다. 배신감이 들 거야. 아마 오늘이 네 꿈에 있는 마지막 날이 될 것 같구나.”

“네, 떠나세요.”

아이리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라피테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이리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저도 아버지를 볼 낯이 없으니까요. 전 아버지가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고 있었어요. 아버지에게서 어머니를 빼면 뭐가 남겠어요. 전 그걸 뺏은 장본인이에요. 제가 어떻게 아버지께 뭐라 하겠어요.”

예라우프는 아이리가 그렇게 말할 줄 몰랐다는 듯 얼었다. 아이리는 계속 말했다.

“어머니는 저에게는 못되게 굴었지만 아버지께는 그야말로 사랑이었잖아요. 집사한테 들었어요, 아버지가 시찰을 나갔을 때 평민에게 한눈에 반해서 몇 번이나 쫓아다녔다고.”

담담하게 말하지만, 꺼내기 어려운 주제임에는 분명하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러운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증오스러운 사람일 테니까. 그게 가족 관계로 얽혀 있는 것이 비극이겠지.

“저도 사랑을 어느 정도 알겠어요. 그러니까, 아버지께 얼마나 못된 행동을 했는지 알았어요.”

“…아이리.”

예라우프는 아이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곧 그들은 끌어안았다. 열렬하지 않은, 절제된 포옹이었다.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할 수 없는.

“미안하다는 말이 너에겐 짐이겠지. 우리, 서로 용서하자꾸나.”

“…감사해요.”

“내가 고마울 따름이다.”

예라우프는 아이리를 그제야 꽉 끌어안았다. 난 그저 옆에서 보고만 있었다. 꿈이 깨지고 있었다. 이번엔 진짜 바깥으로 나가는 것일 터다.

저 부녀 사이에 비어 있던 조각이 들어찼기를.

서로 사랑하는 건 분명한데 왜 서로의 포옹이 어색해 보이는지. 아마 둘 다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이리의 기억들이 한데 뭉치고, 쾅 하고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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