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거울(1)
“…뭔가, 하룻밤의 일인데 엄청나게 길었던 것 같아.”
“응? 뭐가?”
칸나가 말하자 아이리가 물었다. 나는 칸나에게 눈치를 줬고, 칸나는 그냥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 저희는 잠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좀 길었죠.”
“그래서, 너희끼리만 엄청 얘기했겠네.”
아이리는 톡 쏘듯이 얘기하고 침구류를 정리했다. 그녀는 약속했었지, 꿈을 잊기로. 정말 그녀는 잊은 모양이다. 그녀와 같이 손을 잡고 걸었던 것과 그녀의 기억을 봤던 것들이 나만의 기억으로 남게 된 것이다. 그게 슬프긴 했지만… 당장은 할 일이 있었으니까.
“뭔가 나도 꿈을 많이 꾼 것 같아. 근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 그래도 엄청 푹 잔 것 같아.”
트라우마가 해소됐기 때문일까, 아이리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일단 그걸로 난 만족하기로 했다. 아이리는 침구류를 정리하고 등에 메었다.
우리의 일정이 다시 시작됐다. 이제 거친 길로만 걸어야 했다. 제국이 추적할 게 분명했으니까. 피곤하지는 않았다. 칸나와 나는 사람이 아니니까, 피곤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다만 걱정되는 건 아이리였는데, 아이리 역시 티를 내지 않았다. 하나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발은 괜찮아요?”
“내리막길에서는 더 조심해야 돼요.”
“아가씨, 어깨 안 아파요?”
“칼 그렇게 잡으면 나중에 부상 입어요.”
“아가씨, 왜 팔자걸음이에요? 옌시까지 가야 되는데 나중에 피곤해져요.”
내가 그녀를 좀 더 자세하게 보고 있기 때문일까? 뭔가 말해 주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았다. 내가 무언가 말을 더 하려고 하자 아이리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야!”
“네?”
“너 왜 그래?”
아이리가 날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살짝 충격 먹었다. 그렇게 꿈속에서 아련하게 날 바라보던, 아니 아련하게 보진 않았나, 어쨌든 달콤한 그녀의 눈빛은 어디 가고 징글징글하다는 눈이었다.
“신경 써 주는 건 고마운데, 뭘 별의별 걸 다 얘기해?”
“아니, 그냥 걱정돼서.”
“몸도 없는 놈이 뭔 걱정? 네 몸 찾을 생각이나 해.”
아이리의 신랄한 말에 난 할 말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냥 걱정돼서 한 말인데. 신경이 쓰이는 걸 어떡하냐는 말이다. 차라리 이럴 거면 기억을 잊지 말라고 할걸.
아니, 그건 아니지. 그때는 꽤 멋있는 마음으로 결정했지 않은가. 그리고 아직 난 준비가 되지 않았다. 멋있게, 멋있게.
내가 볼 때는, 내 연애를 방해하는 건 내 로망이었다. 그래도 난 그 로망을 버릴 수 없었다. 정말 쑥스럽지만, 나도 아이리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그녀를 좀 더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너, 앞으로 나 그만 봐.”
내가 어느새 또 아이리를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칸나는 내 등을 쳤다. 내가 그렇게 뚫어지게 보고 있었나. 아이리는 새침하게 돌아섰다.
비겁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난 아이리의 속마음을 안다. 하지만 그래도 너무 신경 쓰이게는 하면 안 되겠지. 그녀의 미움을 사는 건 겁나니까.
밤과 낮, 가리지 않고 우리는 걸었다. 밤도 좀 밝다 싶으면 달빛 삼아 걸었다. 물론 아이리가 신성력을 사용해 어두운 길을 밝히려면 밝힐 수 있었지만, 그건 너무 사람들 눈에 띄니까.
칸나와 나는 더 이상 아이리의 꿈속에 안 들어가기로 했다, 남의 기억을 몰래 훔쳐보는 것 같아서. 다른 망령들이 들어가도 별로 신경 쓸 바가 아니라는 것도 나는 칸나에게 알려 주었다.
근데 난 솔직히 말하면 다시 들어가 보고 싶었다. 아이리와 달콤한 시간을 맛보고 싶어서. 근데 그건 냉정하게 생각해서 꿈일 뿐이다. 중요한 건 현실이니까.
“너, 공녀님 좋아하니?”
“응?”
칸나는 손으로 그려지지 않는 모래판을 휘저으며 말했다.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렇잖아. 갑자기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진짜 어린애도 알아차리겠다.”
“그, 그런가?”
“응.”
칸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가만히 있다가, 얼어 있는 날 보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뭔가 신기하다.”
“뭐가?”
“네가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자니. 아무래도 난 네가 검을 쓰는 장면을 많이 봤잖아. 그때는 진짜 그냥 멋있다고만 생각했거든.”
칸나는 그렇게 말하고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 너무 오해하지 마. 그냥 동경 같은 거였으니까. 난 너 같은 스타일 별로 안 좋아해.”
“굳이 그렇게까지 얘기해야 될까?”
칸나와 나는 동시에 웃었다. 마음이 신기하다. 내가 아이리를 좋아한다고 의식해 버리니까 칸나를 더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게 된다. 괜히 쭈뼛대는 것도, 눈치 보는 것도 모두 사라지니까 더 편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뭐가 그렇게 좋아?”
“음.”
나는 좀 생각을 해 봤다. 아이리가 예뻐 보이는 순간. 아니, 이건 아니다. 원래 아이리는 예쁘니까. 사랑스러워 보일 때는 언제인가.
“발 아파 보이는데 굳이 말하지 않는 거? 내리막길에서 빨리 내려가려다 삐끗하는 것도 귀엽고, 나이에 맞지 않게 어깨를 계속 돌리는 것도 그렇고. 나뭇가지 쳐 낼 때 칼 어색하게 잡는 것도 그렇고, 팔자걸음도 그렇고, 음.”
“그냥 다 좋은 거구나.”
“그런가 보지.”
난 내가 말하면서도 놀랐다. 이렇게 유창하게도 말할 수가 있구나. 그리고 내가 언제부터 아이리를 이렇게 보고 있었던 건지. 사랑이 이미 나한테 찾아왔었지만 내가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는지.
“그나저나 칸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 * *
에퍼리는 잠시 산책을 한다며 자리를 비웠다. 칸나는 알고 있었다, 매일 이 시간에 순찰을 나간다는 것을. 그녀는 수풀 언덕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별이 밤을 지키고 있다. 아마 저 별들을 다 세면 오늘 자기가 한 거짓말의 개수와 같지 않을까? 칸나는 머리를 털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과장인가.
아니,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칸나는 에퍼리에게 물어볼 때부터 수많은 거짓말을 해야 했으니까, 자기 자신에게.
“난 뭐 하는 걸까.”
별들에게 묻는다. 자신에게 묻는다.
시간은 사람의 한계를 만들고, 시간을 예술로 만든다면 찰나의 때는 극한의 아름다움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아름다운 것 아닐까.
자신은 그럼 가장 아름다운 걸 놓친 셈이다. 그냥, 자신은 사랑에 대해서 너무 몰랐다.
그리고 에퍼리가 말을 해 줄 때서야 알 수 있었다. 상대방의 모든 게 아름다워 보이는 것. 그게 사랑이구나. 그렇다면 자신은 에퍼리를 언제부터 사랑하고 있었던 걸까.
처음에는 그냥 무인의 동경이라고 생각했다. 에퍼리를 처음 봤을 때 그는 범접할 수 있는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특공대를 결성해서 마더 트리를 해결할 때, 참 멋있었다.
“그리고 좀 귀여웠지.”
이렇게 얘기하니까 편한 것을. 그는 귀여운 면도 있었다. 막상 검을 들지 않을 때는 어색하게 행동했으니까.
“그리고 잘생겼는데.”
황녀님과 성녀님 그리고 공녀님이 에퍼리가 누웠을 때 외모를 가지고 잠깐 토론한 적이 있다. 그때도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그냥 마음을 드러내는 게 창피했다.
혼자서 마음을 쏟아 내니 탈력감이 밀려왔다. 이 말은 에퍼리라는 그릇에 담길 때 비로소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혼자서 하는 말은 저기 바람에 굴러가는 회전초만도 못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행동한거래.”
에퍼리는 연애를 못 했다. 그건 이미 황궁 사람들이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꽤 재미있는 가십거리였으니까.
그래서 이해도 됐다. 그는 갑자기 마음이 떨리게 하고, 어쩔 땐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기도 했다. 데뷔탕트 무도회 때 자신에게 예쁘다는 말을 했었지. 마음이 덜컹했고, 그 감정을 못 본 체했었다. 그때 기민하게 알아차렸으면 미래가 바뀌었을까?
그가 자신에게 서로 의지하자고 했을 때도 자신은 더 깊은 관계를 원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었다. 결과론적이지만, 그건 아예 틀리고 말았다.
에퍼리는 자신에게 많은 걸 물어보았다. 여자는 어떤 행동을 좋아하는지, 아이리는 어떤 걸 좋아할 것 같은지. 그걸 고민하면서 같이 대화를 나누었다. 참 잔인한 시간이었다.
갑자기 칸나는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망령한테는 눈물이 없었다.
늘 이성적으로 살려고 노력했다. 조금은 무뚝뚝해 보였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아무도 눈치를 못 챘을 거다.
“칸나.”
그때, 에퍼리가 주변 순찰을 마친 듯 그녀에게 돌아왔다. 표정 관리는 쉬웠다, 늘 그랬던 것처럼.
“잘 다녀왔어?”
“응.”
에퍼리는 자신의 옆에 서슴지 않고 앉았다. 아까 너무 많은 얘기를 해서 잠깐 쉬고 싶은 모양일까. 에퍼리가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난 다른 곳에서 왔잖아. 그곳에는 별이 별로 없어.”
“그래?”
“응. 이렇게 보니까 별들은 진짜로 아름답구나.”
그렇구나. 칸나는 별들이 소리 지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 빼곡한 별들 사이에서 내가 여기 있다고, 나를 알아 달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별빛이 내리네.”
에퍼리가 별에 취한 듯 계속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칸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눈물이 안 나오는 몸이라는 건, 억울하지만 장점도 있었다.
* * *
기사단들이 우리를 추적하는 건 분명했다. 우리에게 근접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잡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주변을 다 감지하고 있기 때문에.
남들에게 나는 안 보이는 사람이다. 나는 정찰을 하고 안전한 지역으로 아이리와 칸나를 이끌었다. 결국 우리는 트라프비체 제국의 끝에 도달할 때까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여기가 땅끝 도시 폴라구나.”
“나도 처음 와 봤어.”
칸나와 아이리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내겐 뭐, 비슷해 보이는데. 근데 접경 지역은 늘 그런 게 있다. 다른 문화가 섞이는 것. 확실히, 동양풍의 집이 몇 개 보였다.
“여기서 옌시로 가려면 어떻게 해요?”
“음. 통행증을 발급 받아야지.”
사실 우리는 여기에 오면서 이 얘기를 가장 많이 했다. 참 짜증 나게도, 옌시와 트라프비체 제국이 있는 대륙을 잇는 건 하나의 큰 다리라고 했다. 그곳을 통하려면 검문소를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나는 수배 중이니까 아마 못 받을 거고.”
“그냥 다 때려 부수고 가면 안 되나요?”
“국경 지역이라 소드 마스터들도 몇 있을걸.”
나는 회의를 하면서 조용히 길거리를 살폈다. 확실히 제국과는 다른 느낌이 있다. 옌시 사람들도 몇 보인다. 그냥 딱 동양인 느낌이었다. 계속 백인들만 보다가 친근한 동양인을 보니까 가서 말이라도 걸고 싶었다.
“일단 숙소를 잡죠. 아마 좀 생각해야 될 것 같아요.”
“그래야겠다.”
면사로 얼굴을 가린 아이리는 근처 아무 숙소나 가서 방을 잡았다. 방은 두 개를 잡았다. 물론 나야 망령이라 별로 상관없는데, 아이리의 고집이었다.
“식사라도 좀 하세요. 계속 육포만 먹었으니까.”
“잔소리가 심해.”
아이리는 내게 쏘아 댔지만, 그녀 역시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은 건 당연했다. 어디 지방의 흔한 귀족도 아니고, 무려 공녀님이니까.
그녀는 식당에 들어가 제일 비싼 음식을 시켰다. 그래 봤자 아이리가 가볍게 낼 수 있는 정도였지만.
“뭔가, 혼자 먹으니까 미안하네.”
아이리가 속닥거리며 말했다. 너무 속닥거려서 청력을 약간 높여야 될 정도였다. 그때, 내 귀에 와장창 하는 소리가 났다. 가뜩이나 높아진 청력 때문에 그 파열음이 너무 선하게 들렸다.
“옌시 놈이 어디서 영업질이야!”
뭐야. 뒤를 보니 엉덩방아를 찧은 옌시인이 한 명 있었고, 술에 취한 것 같은 제국의 사람도 있었다.
옌시인의 손에는 파인애플 한 조각이 들려 있었다.
와, 여기도 이런 게 있구나. 인간은 어디에 있어도 똑같은 건가. 그렇게 생각할 때 갑자기 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잠깐 식사하고 계세요.”
“응?”
“산책 좀 하고 올게요.”
난 옌시인을 노려보았다. 찰나의 순간, 나는 보았다, 옌시인의 벌어진 가슴팍에 있는 날붙이를.
이 검문소를 넘을 방법. 난 사실 처음부터 생각이 하나뿐이었다. 어둠의 경로를 이용하는 것. 접경지대라면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
아이리와 칸나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또 나 혼자 짊어지려는 오랜 지병이 도진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이건 말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칸나나 아이리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에게 안 좋은 걸 보여 주는 건 싫었다.
“오늘 얼마나 팔았냐?”
“동화 48개입니다.”
“48개에서 60퍼센트면 얼마냐? 아, 29개. 29개 주고.”
제국은 인구밀도가 참으로 낮다. 그래서 지어 놓은 집 중엔 사람이 안 사는 곳이 많았다. 그런 곳은 보통 우범지대거나 범죄자들의 집합소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래, 딱 이곳처럼.
“야, 너 밑에 쓰는 가죽 구멍 났잖아. 이 새끼야, 다리 다 보이겠다. 그걸 보고 누가 돈을 던져 주겠냐? 그냥 포복 쇼야, 뭐야.”
동전을 세던 거지꼴의 남자가 여러 사람들을 지적하고 다닌다. 마치 훈계를 받는 것처럼 거지꼴의 남자 앞에 모두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야, 내가 이런 말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야.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거니까 기분 나쁘지 말고 들어.”
거지꼴의 남자는 제삼자인 내가 들어도 기분 나쁜 말들을 쏟아 냈다. 어떻게 하면 파인애플을 잘 팔 수 있는지, 어떤 사람들에게 들러붙어야 돈을 한 푼이라도 받을 수 있는지, 소매치기하는 방법, 훔치기 쉬운 물건들, 뭐 이런 것들이었다.
이런 곳에 아가씨들을 데려올 수는 없지. 암, 그렇고말고.
“이거, 이러면 나도 힘들어진다고. 나도 상납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어?”
“죄송합니다!”
거지꼴의 남자가 말하자 다른 사람들이 일제히 외쳤다. 그렇지, 그렇지. 이런 흑막들은 언제나 꼭대기가 있기 마련이었다.
상납 시간이 끝나고, 그들에게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아마 이곳이 그들의 아지트인 모양이었다. 난 그들의 얘기를 계속 귀담아듣고 있었지만, 쓸 만한 내용이 좀체 나오질 않았다.
대다수가 자신의 범죄 사실을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어떤 아가씨의 귀중품을 털어먹었는지, 어떤 집으로 들어가 강도질을 했다든지, 사기를 쳐서 누구 등을 쳐 먹었다든지 하는 그런 내용들이었다.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배달은 잘 끝냈나?”
“그건 내가 프로니까 어련히 했지.”
“얼마 받았는데?”
내 귀가 쫑긋거린다. 그들만의 은어인 것 같았다.
“두당 금화 하나.”
“미친, 은화 50개라고 보고했잖아?”
“나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냐?”
“근데 그 정도나 주냐? 시가랑 안 맞는데?”
“그놈이 유명한 수배범이었거든. 남부 지역의 푸른 토끼 알지?”
“아, 그 귀족들만 털고 다닌다는 도둑?”
난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지만 아마도 그런 수배범이 있나 보다. 난 계속 들었다.
“그나저나, 요즘 치안이 좀 강화돼서 넘어가려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황도에서 들리는 말로는 정치범이 탈주했다는데? 그래서 기사들 막 돌아다니잖아. 근데 그런 건 보통 공개 수배를 안 하니까 모르겠지.”
“그런 놈들은 옌시로 가서 잘 살 수나 있나.”
“뭐, 그건 알 바 아니지.”
들을 건 다 들었다. 여기 위치도 다 파악했다. 어쨌든 이 사람들이 옌시로 가는 길을 알려 줄 것 같았다. 난 일단 기다리고 있는 아이리와 칸나에게 돌아갔다.
* * *
“황도의 수배범이 폴라로 왔다는데요?”
“누구 입에서 나온 말이야?”
“폴라 경비병이요. 이미 검문소에는 싹 다 퍼졌어요, 황제님의 엄명이라고. 우리한테도 도와 달라는데요?”
“얼마나 손이 없으면 우리 같은 놈들한테도 도와 달라 하냐?”
녹슨 칼을 슥슥 닦고 있던 사람이 피식 웃었다. 그는 올이 다 풀어진 녹색 목자를 쓰고 있었다.
원래 폴라는 제국의 황도하고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자치령과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부패도 심했다.
아무리 그래도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 같은 한낱 삼류 양아치들에게 도와 달라고 하다니, 참 웃긴 일이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아저씨, 잘못했어요! 아악……!”
그들이 타고 있는 마차 뒤쪽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근데 애들이 다들 바깥 무서운 줄을 몰라. 이렇게 나다니고. 참…….”
“그러게 말입니다. 어이, 도시 들어가기 전에는 입마개 채워 놓고.”
바퀴가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비명 소리는 사막에 묻혔다. 어차피 누가 보고 신고하든 상관없었다. 폴라의 귀족들은 자기들과 이미 다 연결이 되어 있었으니까. 자신들은 그냥 예의상 소란만 안 피우면 그만이었다.
어느새 칼을 다 닦은 녹색 모자의 사람은 뒤를 보고 외쳤다.
“이제 슬슬 들어가니까, 포장 잘해라. 무기 끝 다 집어넣고. 성 근처에서 쇳내 나면 뒈진다.”
그는 엄포를 놓고 폴라성 근처로 다가갔다. 그의 명령에 수레 뒤쪽에 있는 사람들의 입마개가 치워지고, 곧 방음막으로 가려졌다.
성문 근처에는 다행히도 아는 근위병이 있었다. 물론 모르는 근위병이라도 크게 상관이 있지는 않다. 자신들은 비밀 물품 거래 상단으로 떳떳하게 등록되어 있기에 근위병의 검사 요청에도 응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당연하게도 폴라의 성문을 통과했다. 무언가를 많이 실은 수레에 사람들의 눈길이 쏠렸지만, 그렇게 깊은 관심까지는 아니었다.
“야, 나머지는 애들한테 맡기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네.”
사람, 장물, 절도품 등을 실은 마차가 골목에서 꺾였다. 아마 그것들은 아지트로 잘 들어갈 것이고, 그 안에 있는 물건들과 사람들은 전국으로 흩어질 것이었다.
“늘 가던 데로.”
“아, 그러시죠.”
저곳은 폴라에서 가장 비싼 음식점이었다. 사실 그 음식점이 그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지만, 이렇게 한탕을 하고 올 때면 언제나 이 음식점에 오고는 했다. 돈을 많이 벌 때는 한번 이렇게 써 줘야 된다는 미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웬 아가씨가 저렇게 하나 다 시켜서 먹고 있냐?”
“그러게요.”
“신경 끄지 뭐.”
큰 테이블에서 비싼 음식이란 비싼 음식은 모두 시켜 놓고 한 입씩 먹고 있다. 면사포를 쓰고 있고 깔끔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딱 봐도 귀족 여식 같은 우아한 선이 보였다. 돈이 많으니 저렇게 시켜 먹겠지.
왠지 녹색 모자의 남자는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잘나간다 하더라도 그건 평민들 사이에서의 얘기였다. 도시 안에서 귀족을 노리는 건 불가능했다.
“에이, 밥맛 떨어진다.”
“술이나 드시죠, 그럼.”
옆의 남자는 심기를 눈치챘는지 알아서 술을 따랐다. 비싼 술이라서 향은 깊었지만, 여전히 별로였다.
어느덧 식사가 나와 그들이 신경을 끄고 식사를 할 때쯤, 한 추레한 사람이 가게로 들어왔다. 그는 손에 파인애플을 들고 있었다.
“열심히 사는 친구들이 많아. 보기 좋은 동네야, 여기는.”
“그렇군요.”
곧 파인애플 남자는 들어와서 앞쪽부터 파인애플을 팔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안 사 줬지만, 그래도 몇 조각은 판 것 같았다.
파인애플 남자는 희희낙락하며 그들에게 왔지만, 곧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차리고 다른 곳으로 갔다. 이런 사람들은 동네 암흑가와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었고, 이 암흑가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얼굴을 모를 리가 없으니까.
그들도 식사를 하느라 귀찮아서 굳이 아는 체를 하지는 않았다. 그때, 갑자기 옆 테이블에서 소란이 일었다.
“옌시 놈이 어디서 영업질이야!”
그와 함께 파인애플 남자가 나가떨어졌다. 땅바닥에 파인애플이 나동그라졌고, 그는 자기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허겁지겁 파인애플을 들어 먼지를 털어 냈다.
녹색 모자는 천천히 일어나 그를 일으켰다. 그리고 파인애플을 파는 남자를 밀친 사람을 노려보았다.
“이봐, 얼마나 잘산다고 그렇게 패악질이야?”
“뭐? 거지새끼들끼리 도와주는 거냐?”
녹색 모자는 그 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물론 자신의 옷차림이 추레하기는 하지만 이 도시에서 자기보다 돈이 많은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것보다 중요한 건 당연히 지위였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을 아는지, 어떤 사람까지 연결될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4번가에서 도넛 장사를 하고 있는 라프타 폴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뭐, 너, 날 알아?”
“별거 없는 사람이죠.”
녹색 모자 옆에 있는 사람이 그의 신상을 바로 읊었다. 여기서 난동을 피우고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별것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좀 혼내 줘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감옥이야 그냥 보석금 내고 풀려나면 되니까.
“거기, 너무 시끄러운데 조금 조용히 해 주시겠어요? 여기는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있는 곳이에요.”
그때였다, 음식을 먹던 사람이 참견을 한 건. 그녀는 나긋하지만, 아름답고 티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옌시 놈이라고 비하한 것만 사과하면 모두 쾌적해질 것 같은데요. 아닌가요?”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렇게 느꼈으리라. 이 여유, 이 티 없는 목소리, 현실과 묘하게 동떨어진 정의의 외침. 이 사람은, 높은 귀족이라고.
역시 사람을 많이 대하는 도넛 장수도 그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는 괜히 고위 귀족과 엮이기 싫어 계산을 하고 당장 줄행랑을 쳐 버렸고, 그 귀족도 상황이 정리되자 자리에 앉아서 나머지 음식을 먹으려고 했다.
녹색 모자는 그녀에게 흥미를 가졌다. 자신이 모르는 높은 귀족이 이 지방까지 왔다라. 물론 이곳이 꽤 유명한 관광지라 자주 귀족들이 들락날락했지만, 그녀에게는 묘한 향기가 풍겼다. 무언가 신분을 감추는 것 같은 느낌.
“장난 좀 쳐 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별로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
“모르는 귀족이니까요.”
“넌 항상 그렇지. 그러니까 앞으로 못 나아가는 거야.”
녹색 모자는 비싼 술 하나를 시키고 혼자 있는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곱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갑자기 녹색 모자가 맞은편에 앉자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먼저 녹색 모자가 입을 열었다.
“통성명이나 합시다. 전 그린이라고 합니다.”
“…아이벤이라고 해요.”
“그러시군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전 아가씨의 의기에 감탄해서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이니까요.”
녹색 모자는 이 순수해 보이는 아가씨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단순한 흥밋거리였지만, 또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 사람이 자신을 더 위로 데려다줄지도.
“혼자 여행 오신 듯한데, 뭣하면 제가 편의를 봐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린데일 상단의 상단주셨군요. 반갑습니다.”
“찾아오시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녀는 떨떠름하게 녹색 모자가 건넨 명함을 받고 품속에 넣었다. 그는 모자를 잠시 벗고 예의 있는 인사를 한 다음에 자리로 돌아왔다. 모자 뒤에서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어때? 유력 귀족 중에 아이벤이라는 이름이 있어?”
“없습니다. 가명이겠죠.”
“그래?”
귀족이 굳이 가명을 쓰면서 이 대륙의 끝까지 온 이유는 무엇일까. 뭐, 알 건 없지만 녹색 모자는 더 궁금해졌다.
그때 아무도 없는데 문이 세차게 열린 다음 닫혔다. 아무도 눈여겨보진 않았지만 녹색 모자는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바람 때문인가.
뭔가 뒤통수가 따끔했다. 하지만 자신의 뒤통수를 노리는 사람이야 워낙 많으니. 그린은 그렇게만 생각했지만, 자신의 바로 뒤에서 누군가가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