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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126화 (126/150)

126화 거울 (7)

칸나는 자기 자신이 날고서도 놀라고 있었다.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인다는 건 이렇게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는 직선으로만 날았다. 아이리 공녀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시라기보다는 부탁이었지만.

그녀는 날면서 이곳저곳을 보았다. 어차피 자신이 보일 염려는 없었으니까. 땅을 돌아다니는 마수들, 타락한 나무, 인간들의 마을. 모두 위에서 보니 비슷해 보였다.

“아름답다고 해야 하나.”

칸나는 고민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느낀 걸 그대로 표현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어색한 것이다. 에퍼리와 아이리가 가까워진 다음에 부쩍 느낀 바이기도 했다.

그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날개가 돋친 김에 한번 회전해 보는 건 어떨까? 아무도 보지 않으니까 그 정도의 일탈은 괜찮을 거다. 칸나의 그 마음은 마음의 준비를 하기 전에부터 있었기에, 그녀는 한 바퀴를 공중에서 돌고 말았다.

“와아아아악!”

그 붕 떨어지는 느낌과 땅이 끌어당기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크게 지르고 말았다. 살면서 제일 크게 목소리를 낸 순간이었다.

부끄러웠지만 이내 다시 생각을 고쳤다. 여기는 아무도 안 보는 곳이 아닌가. 이렇게 부끄러워해선 안 됐다. 그녀는 이제 마음의 준비를 했다.

돈다. 계속 돈다. 칸나의 눈도 돌고 하늘도 끊임없이 돈다. 답답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어진 느낌이었다. 그녀는 감각에 취한 듯이 날았다.

무아지경인 상태로 날았다. 그렇게 날다 보니 어느새 황도에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놀면서 왔는데 자신의 예상 시간보다 더 빨리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의 뒤에 돋친 날개가 더 커져 있다는 것을.

“아니다. 이런 거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칸나는 바로 라피테스 공작가로 달려갔다. 빠르게, 빠르게라고 생각했더니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그녀는 공작가에서도 잠시 멈칫했다. 이렇게 남의 집, 그것도 귀족의 집을 막 드나드는 것이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다고 안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요즘엔 참으로 낯선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고 생각했다.

라피테스 공작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조용히 들어갔을 때, 그는 아예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하지만 칸나는 알았다. 그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리에게 모든 진실을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놀랄 만한 일이었다. 한 나라의 공작이 검은 무리의 일원이라니. 그러나 아이리의 말을 안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라피테스 공작님, 들리시면 대답해 주시죠.”

칸나는 처음에 그렇게 말을 했다. 이 사람이 라피테스 공작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말이 나왔다. 당연히 라피테스 공작은 모른 체를 했다.

갑자기 칸나는 회의감이 들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남의 눈치를 보고 할 말을 제대로 못 하고 살 것인지. 어쩐지 예의라는 포장지 아래 유약한 자신을 감싸 놓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예라우프 라피테스, 아니 검은 무리의 일원아. 내 말에 대답해라.”

“…무슨 일이지?”

그제야 라피테스 공작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무리의 일원은 역시 인간이 아니다. 망령을 못 보는 건 말이 안 됐다.

“왜 못 본 척을 하지?”

“굳이 아는 척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네가 놀랄 수도 있고. 내 정체를 알아냈으니 무슨 말을 할지도 대충 알겠군.”

“무슨 말?”

“공작의 작위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라피테스 공작은 허허롭게 웃었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금색 동그란 패를 건넸다. 그리고 책상 밑 서랍에서 말린 종이를 꺼냈다.

“이건 내가 직접 아이리 라피테스에게 승계를 했다는 증명서네. 같이 가져가면 도움이 되겠지.”

갑자기 흘러가는 상황에 칸나는 살짝 당황했다.

“우리는 사실 지금 에퍼리라는 사람한테 꽤 협조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니까. 뭐,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되겠지.”

라피테스 공작은 그렇게만 말하고 마력구를 통해 어딘가에 연락을 했다. 곧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창문 앞에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아직 자네가 실재에 간섭할 정도는 아니니 이 친구가 좀 도움을 줄 걸세.”

라피테스 공작가의 정원을 가득 채운 새가 나타났다. 그 새는 마수의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뭔가 이지적인 눈을 하고 있었다. 새는 칸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칸나 소령, 오랜만이군.”

“…예?”

칸나의 얼빠진 목소리와 함께 새가 날개를 쫙 폈다.

“날 지키던 사람을 지키려니 참으로 기쁘구나. 어서 타거라.”

* * *

“공작님의 날인과 증명패… 그렇군요. 제가 몰랐습니다.”

“이제 간섭할 정도가 되는가?”

“물론, 그리하시죠.”

코트 백작의 허가와 함께 녹색 모자가 바로 품에서 서류들을 꺼냈다. 아이리는 보자마자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그것을 뺏듯이 가로채고 한 장씩 빠르게 넘겨 보았다. 그녀가 아무리 사무 경험이 없다고 해도, 그래도 공녀로서 여러 방면에서 공부를 해 왔다. 이게 가짜 장부라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내가 알기로는 인간을 거래하던데, 그 품목은 여기 없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공작 전하.”

“지금 내 앞에서 사슴을 말이라 칭하고 있는 건가?”

아이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자신이 어리고 공작이라는 작위를 막 받았어도, 그래도 공작이었다. 일개 상단주 따위가 기만할 정도는 아니었다.

“코트 백작,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이리는 코트 백작을 바라보았다. 웬만하면 그녀는 그녀 선에서 끝나기를 바랐다. 계속해서 에퍼리에게 도움을 받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이었다.

하나, 코트 백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전하.”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녹색 모자가 픽, 웃었다. 그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아이리는 순식간에 허리춤에 찬 칼날을 들어 녹색 모자를 겨눴다.

아이리는 그러고 다시 코트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 생각엔 변함이 없는가, 코트 백작?”

“예, 변함없습니다.”

녹색 모자는 목에 칼이 겨눠졌어도 비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이리가 위협의 표시로 살갗을 누름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목젖을 움직이며 웃었다. 그 바람에 그의 목에 상처가 났다.

“공작 전하,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압니까? 그저 하찮은 몰락 귀족이었을 뿐입니다. 원래는 제 밑에 있었던 사람이죠. 거짓된 공적으로 정직한 귀족을 살해하고 끌어내린 다음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입니다. 저를 부정할 리 없지 않겠습니까?”

녹색 모자가 모자를 벗었다. 머리에는 흉하고 푸른 흉터가 있었다.

* * *

그린은 폴라성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출신이었다. 그의 첫 기억은 자신의 머리에 커다란 녹색 수포가 자리 잡았을 때부터 시작한다. 그는 자기 일생의 시작인 수포가 어디서 맞아 새긴 흉터에 병균이 감염되어 걸렸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녹색 수포가 가져다준 흉터를 전혀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세상과 척을 졌다고 생각했다. 발진이 가라앉았을 때도 그는 머리를 반이나 뒤덮은 수포의 흔적에 몇몇 사람에게는 여신의 저주를 받았다며 욕을 먹기도 했었다.

당연한 생각이지만, 그는 이 머리의 피부 껍질에만 붙어 있는 흉터가 그렇게 사람에게 배척당할 만한 정도의 중요한 요소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자신이 거울을 봐도 혐오스럽기는 했지만, 그게 자신을 사회에서 내칠 정도는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배척한 사람이라는 ‘종’을 연구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그는 녹색 모자를 쓰고 다녔다. 자신의 정체성은 잊지 말되 약점은 현실적으로 가리자는 의미였다.

현실과 타협하고 녹색 모자를 쓰자 그의 사회생활은 꽤 순탄한 방향으로 진행되었지만, 그것은 그의 ‘사람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의미 외에는 없었다.

그의 연구는 처음에는 당연히 관찰이었다. 같은 노동을 하면서도 사람들의 대화에 주의를 기울였고, 어떤 것이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인지 파악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사람은 돈과 명예만 좇는 돼지들뿐이라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자신이 도덕과 윤리의 선봉장이며 여신의 노예임을 자처했지만, 그건 돈과 명예를 좇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오히려 귀족들은 더 추악한 존재였다. 그들은 명예에만 관심 있는 척했지만, 돈에는 더 환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두 번째 단계인 실험을 하기로 했다. 이건 자신의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어쩌다 귀족과 개인적인 안면이 생긴 그린은, 귀족에게 넌지시 그에게 방해가 되는 상단주를 죽여 주면 자신에게 얼마를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 귀족은 처음에는 굉장히 모욕당한 듯 그린에게 길길이 화를 내고 귀족 모욕죄로 처형을 하겠노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그린은 굴하지 않고 자신의 페이를 줄여 가면서 협상을 했다. 귀족은 못내 넘어가 주는 척, 상단주를 죽이면 은화 세 닢을 주기로 그린과 약속했다.

그린의 첫 살인이었다.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 그린이 귀족을 찾아가자 귀족은 안면몰수를 하고 그린을 친구처럼 대했고, 청부 살인에 맛이라도 들린 듯 계속 사람을 죽이기를 종용했다. 처음에 길길이 화를 내던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귀족과 친분이 생기고 그의 인생은 승승장구였다. 많은 청부 살인으로 목돈까지 챙긴 그는 그린데일이라는 상단을 만들고 그 이름하에 많은 귀족의 불법적인 일을 대리로 행하기 시작했다.

신기한 건 인간, 인간이라는 종에서 상위층에 있는 귀족이라는 사람들이 더 덜 떨어져 보였다는 것이다. 대개 일반 평민들은 한 사람에게 약점을 잡히면 그 사람을 피하고는 하는데, 이 귀족들은 자신에게 살인 청부라는 약점을 잡혀 놓은 뒤에야 더욱 친근하게 굴었다.

그는 거기서 귀족 계급이란 돈과 명예 그리고 허영심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관점에서 귀족들은 평민들보다도 훨씬 해악하고 혐오스러운 자들이었다. 그들은 평민인 그린이 귀족들인 자신을 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귀족들은 그린에게 온갖 일감을 몰아 주었고, 그린데일 상단은 어떻게 할 수도 없이 권력이 커져 버렸다. 폴라성의 아무도 그린을 건드릴 수 없게 됐을 때, 그는 폴라성주를 죽였다. 바로 그린에게 처음 청부 살인을 맡긴 그 귀족이었다.

그 귀족은 여느 때처럼 그린을 불러서 식사했다. 폴라성주와 그린데일 상단주는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린은 그때 기나긴 연구의 새로운 결과를 낼 수 있는 때라고 보았다.

그린은 자신들을 시중하는 아랫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폴라성주와 개인 면담을 자청했다. 으레 있던 일이라 폴라성주는 그러라고 했고, 바로 그린은 폴라성주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폴라성주는 어린아이처럼 울어 댔고, 왜 갑자기 자신을 죽이려 하냐며 자신은 죽기 싫다고 말했다. 그는 구구절절 자식과 아내에 대한 사랑을 늘어놓았고, 자신과 그린의 우정을 말하기도 했다.

그린은 그날 결국 성과를 하나 얻은 셈이다. 인간은 서로 닮기만 했을 뿐 자신만을 극도로 생각한다는 점은 같으며, 그건 모두에게 통용된다고 말이다.

그는 그 연구 결과에 흡족해하며 폴라성주를 베었다.

그렇게 파란만장한 일생에서 그린은 또 하나의 도전에 직면한 것이다. 이 어리고 아름다운 귀족, 그것도 공작이란다. 과연 그녀는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고고할 수 있는지, 지금처럼 빛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그린은 오랜만에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깃드는 걸 느꼈다.

“당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그 정의감이 어디까지 뿌리를 뻗었습니까?”

그린은 칼을 들었다. 적어도 이 방에는 자신의 손이면 작동되는 기관 진식이 많았다. 이 아가씨를 벌집으로 만드는 건 바로 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대답이 궁금했다.

하나 그녀의 대답은 그린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달랐다.

“정의감이 아니라 난 내 할 일을 하는 거야. 누가 시켰거든.”

“…맹목적인 움직임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맹목적인 움직임은 보통 평민들에게 보이는 것이었다. 근데 공작의 작위를 지칭하고 나선 자가 타의로 행동한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저를 처단함으로써 얻는 명예나 도덕적 충족감에 대해서 하나도 생각해 보지 않으셨단 말씀입니까?”

“물론 네가 개새끼라고 생각해. 근데 난 지금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서. 서로의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어.”

“서로의 생각? 무슨 말씀이죠?”

그와 함께 그들이 있는 저택의 발밑이 커다랗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앞의 아가씨는 땅을 보고 웃었다.

“내 생각보다 살짝 늦긴 했는데, 이 정도면 맞춰 나갈 수 있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말과 함께 대저택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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