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거울 (10)
폴라성 내부는 난리도 아니었다. 당연하다. 이런 극지까지 황제가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일선의 관리들은 아주 난리가 났고, 더러는 황제가 온 걸 못 믿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이런 지방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황제 폐하가 오신다는 말인가?”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심지어 저잣거리도 아니고 성내에서도 아직 이런 토론이 벌어지는 판국이니. 이렇게 시끄러운 판국에도 조용한 곳은 바로 의료실 복도였다.
“예프린 아가씨도 괜찮으시겠죠. 들어가 좀 쉬세요. 제가 지켜볼게요.”
“아니야. 그냥 여기 있게.”
아이리는 뭔가 불안한 기색이었다. 난 그녀의 마음을 잘 안다. 나는 가만히 있어 주었다. 어떤 사람은 같이 말을 나눠 주는 게 도움이 되고, 어떤 사람은 같이 침묵을 지켜 주는 게 도움이 된다.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 그 넓고 긴 스펙트럼에서 난 아이리라는 사람의 점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그녀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문가였다. 난, 그래서 그녀가 하는 걱정에 대해서 같이 침묵을 지켜 주었다.
“생각해 보면 난 축복받은 인생을 산 것 같아.”
아이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답을 바라는 게 아닌 것 같아 난 그저 입을 다물었다.
“여기에 와서 그런 걸 느껴. 황도에서는 그렇게 사회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는데 여기는 꽤 많으니까. 그, 좀 너무하다 싶은 사람도 봤지만.”
그녀가 말하는 너무하다 싶은 사람은 아마도 녹색 모자일 것이다. 내가 그녀보다 나은 사람도 아니지만, 그녀가 성장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의 악의로 가득 찬 곳에서도 난 많은 기적을 느꼈어. 그런 게 나와 그들과의 차이점이겠지. 그들은 희망 속에서도 절망을 찾는 데 나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니까.”
아이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어떻게 보면 예프린과 내가 그곳에서 만났던 건 정말 우연이고 기적이지. 그다음 네가 나의 행동을 하라고 했을 때 난 행동을 하면서도 계속 의심했어. 과연 이게 네가 원하는 행동이 맞을까? 어쩌면 내가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는 건 아닐까? 난 내가 녹색 모자의 저택으로 들어갈 때도 계속 그런 의심을 가지고 있었지. 아무것도 못 이뤄 낸 채로 허무하게 나오는 그런 상상도 했단 말이야. 왜냐하면, 기적이잖아. 서로 다른 사람이 다른 공간에서 행동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파악하고 맞춘다는 건 말이야.”
“그렇죠.”
아이리가 퍽 길게 말했는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때부터였다, 허공을 응시하듯 혼잣말을 하던 그녀가 날 바라본 것은. 아마 다른 사람에게는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 복도에서는 아무도 없어 상관없었다.
“저한테는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어요.”
“응?”
“전 아가씨가 그렇게 해 주리라고 믿었어요. 원래 사람이라는 건 늘 변하기 마련이잖아요. 아가씨는 절 바꿔 놨고, 저도 아가씨를 바꿨겠죠. 전 그래서 제일 나다운 행동이 뭔가에 대해서 계속 고민했죠. 마치, 아가씨를 제 거울이라고 생각했어요.”
내 말에 아이리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그녀는 곧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럼 이건 진짜 기적이네. 서로 다른 과정을 통해서 똑같은 결과를 바랐으니까.”
“그렇게 말하면 그러네요.”
아이리는 다시 얼굴을 떼어 의료실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당연하지만 예프린은 무사하다. 예프린은 그래도 고급 상품으로 취급되고 있었고, 그만큼 육체적인 학대는 잘 받지 않았으니까.
“난 행복했어, 지금까지. 이렇게 더러운 곳에서도 기적적으로 동생을 살려 냈어. 근데 어떻게 한 사람에게 이렇게 기적이 집중될 수가 있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데 말이야. 그래서 난 지금 너무 불안해.”
그녀가 결국 심경을 토로했다.
“예프린이 날 싫어하지는 않을까? 그 어두운 방에서 날 무시무시하게 저주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일이잖아. 어떻게 보면 그 아이 인생의 첫 단추를 꿴 건 다름 아닌 어린 나였으니까. 그 아이가 날 충분히 싫어할 수 있어. 아니, 내가 겪은 정말 많은 기적들에 비하면 아주 당연한 일이지.”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마음속에 있는 말을 최대한 밑바닥까지 긁어 내길 바랐다. 난 그 답을 알고 있었지만, 이건 내가 말하기보다 그녀가 느껴야 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환자 의식이 돌아왔으니 보호자분 들어가셔도 됩니다.”
그때 병실의 문이 열렸다. 아이리는 바싹 얼었다. 마치 무슨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삐걱대며 움직였다. 다리에 살짝 힘이 풀려서 벽을 붙잡기도 했다.
“다녀와요.”
“그래.”
아이리가 힘없이 어깨를 축 내린 채로 들어가려 했다. 난 이 짧은 단막극의 결말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너무 힘들어하는 그녀를 위해 난 힌트를 하나 주기로 했다.
“아가씨, 너무 흔한 말이라 도움이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응?”
“기적이라는 건 찾아내는 사람의 몫이에요. 남들보다 기적이 많이 일어났다는 건 아가씨가 그만큼 주위를 잘 둘러보고 왔다는 거겠죠. 앞으로도 아가씨가 걷는 길에는 기적이 가득할 거예요.”
“…고마워.”
아이리가 조용히 병실 문을 노크하고, 안에서 짧은 응답의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겁먹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병실 문으로 들어가는 순간 아이리는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많은 생각도 아니었다. 오로지 하나의 생각이었다. 예프린이 자신을 미워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었고, 아버지에 대해서도 어머니가 죽은 다음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뭔가 아버지인데 정이 안 가는 느낌. 그런 그녀가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예프린뿐이었다.
아이리는 막상 병실 안으로 들어가서 예프린을 보자니 가슴이 막막해지는 걸 느꼈다. 가뜩이나 야위었던 예프린의 모습은 흰 환자복을 입어서 더욱 아파 보였다.
어떤 인삿말을 건네야 할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안녕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속죄를 해야 될까.
“언니.”
예상외로 예프린이 먼저 말을 걸었다.
“응.”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
예프린은 그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리를 껴안았다. 아이리는 바짝 얼었다. 이건 정말, 그녀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아이리는 조심스럽게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예프린과 마주 앉았다.
정말 이런 게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 * *
난 사실 알고 있었다. 내가 예프린의 몸에 들어갔을 때 난 어쩌다 거울을 볼 기회가 있었다. 물론 깨진 거울이었지만, 엘파힘의 심안을 작동해서 보기에는 충분했다.
난 거기서 이미 알아낸 것이다, 예프린 역시 아이리를 제일 사랑하고 있음을.
아이리가 걱정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예프린이 아이리를 싫어한다고 해도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이리를 싫어하지 않은 건 그냥 예프린의 성격 때문일 거다.
예프린 역시 아이리와 닮아서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오랜만에 예프린의 머리를 잘라 줬어.”
“잘하셨어요.”
“그러면서 많은 얘기도 했고.”
“잘했어요.”
아이리는 긴장이 풀렸는지 여러 가지를 두서없이 풀었다. 별 내용은 아니었다. 그저 아이리와 예프린이 대화한 내용들이었다.
아이리와 달리 예프린은 자매의 우정에 대해서 조금의 불신도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사랑해야 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그녀들에게는 딱히 풀 만한 감정도 없었다. 애초에 싸운 게 아니었으니. 그저 풀 얘기가 많았을 뿐이다.
“넌 어때? 예프린하고 좀 얘기 나눌 수 있어? 곧 출발한다고는 하는데.”
“어디로요?”
“자기도 모르겠대.”
아이리는 그런 말을 하면서 풋 웃었다. 나도 따라서 웃었다. 그렇게 다니면서 험한 꼴을 겪었어도 돌아다니고 싶어 하니, 그녀는 정말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프린 아가씨와는 다음에 얘기하죠. 지금 우리는 바쁘니까.”
“그래, 뭐. 지금은 그렇지.”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냐면, 폴라성주의 집무실에 있었다. 내 옆에는 아이리도 있었고, 칸나도 있었고, 무엇보다 리얀이 있었다.
“얘기는 다 끝났어?”
“네.”
“음, 섭섭하네. 사적인 자리에서는 반말을 쓰라고 했잖아.”
“그렇긴 그런데, 제가 공개 수배자인 관계로.”
리얀은 웃었다. 놀랍게도 리얀은 내가 다시 돌아왔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아이리의 옆에 내가 붙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녀 정보력의 비결은 노을이들이었다. 노을이들은 귀족에서 다시 벌레로 돌아가 우리를 끊임없이 쫓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나라도 벌레까지 의심하고 있지는 않았으니.
리얀은 계속 아이리를 감시하고 무슨 일을 할지 계속 추측해야만 했다고 한다. 노을이들에게도 내 말은 들리지 않아서, 그들은 아이리의 말만을 수집해서 리얀에게 갖다주었다. 결국 리얀은 우리가 옌시로 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어차피 체포할 마음은 없었다고 했다. 그것보다 섭섭한 마음이 컸다고 한다. 자신에게 말하면 다 도와줬을 텐데.
“어떻게, 에퍼리. 잘 지냈어?”
“네.”
“네. 그렇다고 하네요.”
무슨 말을 해도 아이리를 통해 가는 것 때문에 리얀은 살짝 답답함을 표했다.
“어쨌든, 옌시에서 몸을 찾아와야 한다라. 참 믿을 수가 없는 출장 근거네.”
“네, 아니, 응.”
“어쨌든 옌시에 얘기는 해 놨어.”
“…사실상 단교 아니었습니까?”
아이리의 말대로 옌시와 트라프비체 제국 사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황제는 옌시랑 통하는 핫라인이 있더라고. 아, 이건 비밀이니까 남들한테 누설하면 안 돼. 라피테스 공작, 이제 전 공작이라고 해야겠지. 그도 몰랐던 사실이니까.”
“네.”
리얀은 아이리와 칸나를 물렀다. 그녀가 나와의 독대를 원했기 때문이다. 피할 방법은 없었다. 리얀은 분명 예프린의 몸에 내가 있다는 것도 봤기 때문이다. 그녀에겐 내게 내어 줄 몸이 너무 많았다. 어차피 노을이들이 차지한 몸들은 다들 이미 죽은 귀족들이었으니까.
난 노을이가 없는 시체 같은 몸에 들어갔다. 그녀는 바로 내게 다시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야, 에퍼리.”
“반갑습니다.”
“3년 만이네.”
그녀는 머리를 꼬았다. 녹색 눈은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 모습은 늙은 대신이었지만, 그녀는 확실히 날 바라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너와 내가 한 내기, 기억해?”
“…음.”
그녀는 거두절미하고 바로 그 얘기를 꺼냈다. 그녀 나름의 배려였겠다. 분명 그녀 입장에서도 꺼내기 쉽지 않은 주제였겠지만, 우리가 시간이 없다는 걸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었다. 물론 여신이나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안 했지만.
“네, 기억하죠.”
“난 그날이 아직도 선명한걸. 내 사랑이 순수한 감정이 아니라고 부정당했을 때의 그 느낌 말이야. 서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랬지.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아는데도, 날 피해 도망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니까.”
“…그랬으면 죄송하네요.”
리얀은 웃었다. 그녀에게 마음의 빚이 있는 나에게 그녀는 계속 배려를 해 주고 있었다. 이런 농담들로. 확실히 그녀는 좋은 사람이자 좋은 여자였다.
“바쁘다니까 어쩔 수 없지.”
그녀는 성주의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에는 상자 밑에서 꺼낸 작은 박스가 들려 있었다.
리얀은 성주의 책상을 돌아 앞에 앉아 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내가 있는 쪽으로 박스를 열었다. 그것에는 아름다운 보석이 작게 박혀 있는, 반지 한 쌍이 있었다.
이, 무슨 설레는 프러포즈일까. 당황해서 완전히 굳은 나를 무시하고 리얀은 당당하게 말했다.
“난 널 여전히 사랑해. 내기는 내 승리야. 내 마음을 받아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