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다른 사람 (1)
사랑이라는 건 누구의 농간일 수도 있었다. 사랑이 뭐 별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각자 생각하는 사랑은 다르니까. 그녀는 간단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이 사랑이라고 외치면 사랑이다.
“…그건 좀 힘들겠는데요.”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어. 넌 아이리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네?”
에퍼리는 당황했다. 리얀이 보기엔 그런 것도 귀여웠다. 아이리도 티가 많이 나기는 했지만, 에퍼리도 사랑이란 감정에 어색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티가 나는 건 당연했다.
이미 아이리가 에퍼리를 대할 때의 느낌이 완전 바뀌어 버렸다. 아이리가 허공, 그러니까 에퍼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는 아주 많은 감정이 담긴 눈빛을 했다. 리얀은 그걸 보면서 많은 걸 느꼈다.
안정감, 의지, 따뜻함, 설렘, 우정 등. 그런 감정들을 모두 포함해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짝사랑이 아니었다. 짝사랑에는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이 들어가니까.
그녀의 눈빛은, 사랑을 확인받은 사람의 것이었다. 에퍼리 역시 아이리를 많이 신경 쓰는 것 같고.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죄송합니다.”
“오, 생각보다 솔직하네. 내가 아는 너는 사랑에 관하면 뭐든지 밀어 놨었는데.”
에퍼리가 시인하자 리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3년간 뭐가 이렇게 그를 바뀌게 했을까. 바뀐 다음에 사랑을 한 건지 사랑을 한 다음 바뀐 건지는 모르겠으나, 리얀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가 사랑할 뿐이다. 그녀는 늘 에퍼리를 마음 한편에 두고 있었다. 황제니까 후사를 위해 많은 귀족이 남편을 들이라고도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모두 반려했다.
“뭔가 바뀌었구나.”
“네.”
에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아니 황제 폐하는 좋은 사람이에요. 저한테 너무 과분한 사람이기도 해요. 이런 그, 고백도 감사하기도 해요. 하지만 전 그 말대로 아이리 아가씨를 사랑해요. 그러니 마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에퍼리는 정중하게 자신에게 허리를 숙였다. 리얀은 무릎을 펴서 일어난 다음에 멋쩍은 듯이 웃었다. 거절당한 고백. 하지만 리얀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대체 왜 그럴까. 이렇게 사과를 받을 때도 그녀는 에퍼리에 대한 마음이 닫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처음부터 평범한 사람처럼 대했다. 남들은 자신을 대할 때 모두 황족의 핏줄이라는 걸 의식했지만, 그는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리얀은 한번 욕심을 부려 보기로 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독점욕과 사랑이 3년 동안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친우인 아이리에게도 못 할 짓이었다. 하지만 사랑 앞에서 이기적이지 않으면 대체 언제 이기적일까.
“내기했잖아. 나는 네가 내 마음을 받았으면 좋겠어. 그게 내 소원이야.”
“…그건 좀 당황스럽네요.”
리얀은 자기가 억지를 부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눈에 불을 켰다. 사랑이라는 건 감정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저 자신을 편하게 해 주고, 남을 편하게 해 주고 싶다면 그것이 사랑이었다. 리얀은 그런 면에서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
“뭐, 나도 완전히 강짜를 부리겠다는 생각은 아니야. 그저 나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달라는 거야. 그러니까, 난 좀 합리적인 제안을 할까 해.”
“어떤 제안이요?”
“황도에 돌아간면 나랑 열 번의 데이트를 하자. 그때는 업무를 다 마쳐 놓을 테니까. 그 전까지는 아이리한테 고백하는 것도 금지야.”
“…왜 그래야 되죠?”
에퍼리가 살짝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확실히 독립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선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자신은 그걸 알고 있었다. 그 선을 침범하면 에퍼리는 못내 기분 나쁜 기색을 보였다. 리얀도 에퍼리에게 미움받는 건 싫었다. 그녀로서는 마지막 한 수였다.
“그런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마음이라는 건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과연 그럴까? 난 조금 다른걸.”
에퍼리는 리얀을 노려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렇게 해요. 제가 뱉은 말이 있으니. 다만, 전 리얀 당신이 이렇게 막무가내인 줄은 몰랐어요.”
“네가 모르는 나를 더 알려 줄 의향이 있어.”
“그러세요.”
“이 반지는 가져가. 그 약속의 징표야.”
“제가 못 끼니까, 아이리 아가씨한테 맡기세요.”
“그럴게.”
얘기는 끝났다는 듯 에퍼리가 몸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의자에 있던 늙은 대신이 축 늘어졌다. 잠깐의 시간이 지났다. 리얀은 에퍼리가 아마 나갔으리라 짐작했다. 마음이 좀 상했겠지.
그러나 자신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역경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 * *
난 솔직히 살짝 걱정했다. 내가 리얀의 마음을 안 받았다고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내가 생각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녀는 나한테 퍽 집착하는 걸로 보였다. 하지만 그녀 역시 공과 사는 확실했다.
황제의 명을 이용해 외교관 증서를 발급한 건 물론이고, 금화들과 옌시 정보들을 지원해 주었다. 우리가 옌시로 통하는 다리 앞에 섰을 때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아이리는 평민의 옷을 그야말로 공작다운 고급스러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럴 거면 리얀을 만나고 갈 걸 그랬네.”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죠.”
“리얀하고 무슨 말을 했어?”
음. 아이리의 질문에 난 입을 닫았다. 아무리 그래도 고백받았다는 얘기를 어떻게 하겠냐는 말이다.
“그냥, 정세나 시국에 대해서 얘기했죠.”
“헛소리하지 말고.”
“진짜예요.”
내가 잡아떼자 아이리는 그냥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래, 말하고 싶을 때 얘기해.”
“진짜라니까요.”
“응, 응.”
아이리는 전혀 날 믿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비밀을 말하듯이 내 귀에 얼굴을 갖다 댔다. 그녀의 약한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혔다.
“사실, 너 거짓말할 때 엄청 티 나. 그, 얼굴근육이 미세하게 굳는다고 해야 하나. 일부러 막 엄숙한 척하고.”
“네? 거짓말.”
“…….”
“…그래요?”
“응.”
그건 좀 곤란한데. 반면 나는 아이리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그래 봤자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난 거울을 봐도 모습이 비치지 않으니까.
뭐, 여기서 있었던 일은 리얀이 좋게 좋게 처리했다고 한다. 정확한 건 말해 주지는 않았다. 들을 시간도 없고. 땀을 뻘뻘 흘리며 사건에 대해서 보고했을 부성주가 불쌍할 따름이었다. 리얀은 우리의 수속 절차를 대신 밟아 주고 폴라에서 있었던 일을 처리하고 떠났다.
“언니, 왜 옌시로 가는 거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예프린 역시 깔끔하게 갈아입고 짐을 다 멘 상태였다. 이제 여기서 그녀들은 인사를 나눠야 되는 것이다. 몇 년 동안 떨어져 있었음에도 이렇게 쿨한 이별 자세를 유지하는 건 오히려 그녀들이 서로의 믿음을 확인했기 때문일 거다.
“음. 옌시로 가면 조심해. 옌시인이랑 몇 번 얘기해 봤는데, 지금 거기는 혼란스러운 상태라고 하더라고.”
“뭐, 내란이 있었다는 건 다 아는 얘기니까. 정확히 어떤 건지 알아?”
“정확히는 모르겠고. 음. 그리고 신기한 게 좀 많아. 걔네 물건은 좀 신기해. 그, 스킬을 대신한다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스킬을 못 읽는 사람들이니까.”
하긴, 옌시 사람들은 제국어로 된 스킬을 못 읽는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에서도 비하하고 다녔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제국과는 분명히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을 터였다.
“응, 그래. 조심할게.”
“그래. 그런데 언니, 에퍼리가 실종됐다고 하던데.”
“…음.”
느닷없이 해 온 나에 대한 질문에 아이리는 난처한 듯 나를 한 번 슬쩍 쳐다보았다. 옆에 있다고 말해도 못 믿겠지.
“그냥, 뭐 언니는 알고 있나 싶었어. 근데 죽지는 않았을 거야. 별로 걱정은 안 돼. 그래도 한번 봤으면 좋겠네.”
“응, 그래. 뭐, 봐서 무슨 얘기 하게?”
“고마웠다고. 그걸 진지하게 얘기한 적이 없어서.”
옆에 있는데 고맙다는 얘기를 들으니 뭔가 낯간지러웠다.
“그래. 뭐, 보면 전해 줄게.”
“응, 고마워.”
예프린은 먼저 말을 타고 떠났다. 그녀가 인파에 휩쓸려 사라지자 우리도 옌시로 향하는 다리 위에 몸을 실었다. 당연히 몇몇 사람이 줄을 서고 귀찮아 보이는 수속을 밟고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라피테스 공작님이시군요. 들어가시죠.”
그야말로 프리 패스. 아이리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옌시로 통하는 다리를 건넜다. 다리는 덩굴들이 중간까지 감싸져 있었지만, 옌시의 국경 팻말 이후는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그, 지구의 아스팔트를 보는 느낌이었다.
“옌시의 건축물이 우리보단 낫다고 하더니. 뭔가 좀 깔끔하네.”
“그러게요.”
“뭔가, 신기하네요.”
칸나, 아이리, 나는 옌시를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야말로 완전한 문화 충격이었다. 다리를 중간쯤 건넜을 때부터 옌시의 도시가 보였다. 모두가 우리를 쳐다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리를 쳐다봤다고 해야 했다. 왜냐하면 제국 사람이 옌시로 넘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거, 제국 사람이 옌시에는 무슨 일이요?”
“응? 아니, 네?”
상인으로 보이는 옌시 사람은 아이리에게 노골적인 궁금증을 보이며 물어보기도 했다.
“그냥, 궁금해서 왔어요.”
“그렇군. 뭐 별 볼 일 없는 나라요. 그래도 사람들은 착하니 잘 놀다 가시오.”
상인은 그렇게 말하고 관심을 껐다. 아이리도 뭔가 어색해 보였다.
다른 옌시인도 아이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제국의 사람들은 옌시인을 경멸하는 눈빛을 주로 보냈다면, 옌시 사람들은 아이리를 그렇게 낮춰 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다른 인종을 보는, 그런 신기한 눈빛.
그것마저도 아이리가 시선이 불편해 한 번 둘러보자 다 피했다.
“뭔가 위축된다.”
“괜찮아요.”
나는 그저 아이리를 안심시켜 주었다. 우리는 다리를 다 건넜다. 사람들은 각자 길을 찾아서 뿔뿔이 흩어졌다. 아이리는 그제야 지도를 보았다. 알레프가 전해 준 신체 제작자의 지도였다.
지도에는 다리가 그려져 있고, 옌시의 지도와 신체 제작자의 거처의 위치가 나와 있었다. 신체 제작자는 다리에서 꽤 먼 위치에 있었다.
“음. 말을 타고 가야 되나?”
“돈은 많잖아요.”
“그렇지.”
그때, 부릉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자동차에서 매연이 쏟아질 때 나는 소리. 아니, 마치가 아니다. 그냥 그 자동차 소리 그 자체였다.
옌시 사람들은 그 소리가 들리자 익숙하게 길가로 빠졌다. 결국 길 중앙에 있는 건 우리밖에 없게 됐다. 곧 우리 앞에 마차 하나가 자동차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마차라고 하기에는 이상했다. 그 말은 진짜 말이 아니었으니까. 다리를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바닥을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그래, 진짜 자동차처럼.
말의 발굽이 있어야 할 곳에는 바퀴가 있었고, 꼬리가 있어야 할 곳엔 긴 원통이 박혀 있었다. 원통에서는 회색 연기를 뿜어 댔다.
곧 마차의 문이 새가 날개를 위로 펼치듯 자동으로 올라갔다. 외제차를 연상하게 하는 자동 문이었다.
그곳에는 옌시인 몇 명이 타고 있었다.
“아이리 라피테스 맞나? 옌시의 외무대신 스프리다.”
그는 마차에서 내려 아이리에게 악수를 건넸다. 음, 이건 또 무슨 일일까 싶었다. 그는 간단하게 아이리와 악수를 나눈 다음 갑자기 허공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우리의 귀중한 손님, 에퍼리 션, 칸나 카라모프에게도 인사드립니다. 영광스럽습니다.”
그의 극진한 인사에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