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다른 사람 (2)
“제가 보이나요?”
“아주 잘 보입니다.”
그는 눈에서 희한한 투명 렌즈를 빼더니 흔들었다. 아마 그것이 우리를 보게 하는 장치인 모양이었다.
“혹시, 황제께서 우리를 마중 나오라고 하셨나요?”
“아니. 무슨 황제 말인가? 옌시에서 황제가 실각한 지가 언젠데?”
스프리라는 사람은 아이리에게 기가 차다는 듯이 물었다. 당연히 우리는 옌시의 정세에 대해 모르니까 물었던 거였다. 그나저나, 아이리에게는 아랫사람처럼 하대하고 나와 칸나를 이렇게 떠받드는 게 좀 부담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리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죄송한데, 반말 좀 하지 마세요.”
“허, 거참. 나이도 한참 어린데 싸가지가 없군.”
“나이가 뭔 상관이에요? 전 제국의 공작인데.”
“제국의 공작이지 옌시의 공작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우린 작위라는 건 쓰지도 않네.”
아이리와 스프리가 싸우자 내가 잠깐 중간에 끼어들었다. 이러다 크게 싸우겠다 싶었다.
“그만, 그만합시다. 그냥 상호 존대 해요.”
“거참. 귀빈의 말씀이니 듣겠지만, 어린 종자가 절 불편하게 하는군요.”
“뭐? 종자?”
“그만하라고요.”
어쩐지 그가 나한테는 맥을 못 추는 것 같아 강하게 말하자 그는 바로 수그렸다. 아이리는 그것마저 못마땅한 모양새였지만, 어찌 됐든 싸움을 길게 끌고 싶지는 않았는지 말을 멈췄다.
“타시죠.”
“아, 네. 근데 이건 뭡니까?”
“음, 그냥 마차죠?”
그냥 차 같은데. 애초에 말이 없잖아. 저 눈 죽은 거 보라고. 그냥 저건 흰색 말 모형일 뿐.
우리가 마차 뒤에 타자 이미 우리를 위한 자리가 아주 호화롭게 준비되어 있었다. 애초에 우리는 앉아 봤자 그 푹신함을 느끼지도 못하는데. 근데 묘하게도 편한 자리는 딱 두 자리만 준비되어 있었고, 맞은 편은 딱딱한 자리였다.
“에퍼리 님, 칸나 님, 먼저 들어가시죠.”
그는 아주 예의 바르게 문을 열고 우리를 안내했다. 칸나가 맞은편에 앉으려고 하자 스프리는 고개를 저었다.
“에퍼리 님 옆에 앉으시면 됩니다.”
“…그럴 필요 없는데요.”
“부디 앉아 주시길 바랍니다.”
“아, 네…….”
나나 칸나나 이런 대우에는 별로 익숙하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는 그저 평민이었었고, 칸나는 귀족이라고 해도 어릴 때부터 군인이어서 이런 대접을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귀한 사람인 아이리 앞에서.
“…그래요.”
아이리도 자신의 대우에 체념했다. 그녀는 스프리하고 어깨를 맞대며 앉았고, 칸나와 나는 불편하게 앉았다.
“자, 빨리 갑시다.”
스프리는 몸을 살짝 돌린 다음에 몇 개의 버튼을 눌렀다. 곧 다시 부릉거리는 소리가 나고 뿌연 연기가 뒤에서 나왔다. 말의 발굽에 달린 바퀴가 움직였다.
마차와 차 사이의 무언가가 도로 위를 질주했다. 창문으로 사람들을 보니 그다지 놀라는 기색도 아니었다. 아마 옌시에서는 이미 상용화된 운송 수단인 모양이었다.
당연히 마차보다는 훨씬 빨랐다. 체감상 한 시속 60킬로 정도로 달리는 것 같았다.
“뭐, 뭔가 신기하네요.”
나야 자동차는 많이 탔던 사람이지만, 칸나와 아이리에게는 당연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아이리는 스프리와 싸운 것도 까먹었는지 이 자동 마차의 기술에 놀랐다.
“뭐, 제국에는 스킬이 있으니까 과학이 발달할 리가 없죠. 이게 우리의 사는 법입니다.”
우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 바깥으로 나가자 원통형으로 된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오히려 이곳은 판타지라는 생각도 안 들었고, 지구와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신기하군요.”
“근데,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는 아시나요?”
“몸이 필요하신 것 아닙니까? 옛 친구들에게 다 들었습니다. 저희도 협력하러 온 거니 너무 경계하지 마시지요.”
“옛 친구요? 검은 무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 제국에서는 그렇게도 부르죠.”
그는 긍정했다. 아무래도 검은 무리는 옌시에서는 꽤 좋은 대접을 받는 느낌이다. 친구라는 친근한 어감이라니. 마차는 당연히 내가 탔던 말보다는 훨씬 빨랐기에 곧 한적한 도로로 들어섰다.
“승차감이 좋네요.”
“신차입니다.”
뭔가 차를 타고 있으니 정말 지구에 온 것 같다. 약간 1900년대~2000년대 지구가 이랬을 것 같은 느낌. 심지어 자동 운전이다.
“위치를 설정하면 알아서 가는 건가요?”
“네, 그렇죠. 말 모형에 내장된 레이더가 사람과 장애물을 식별하고, 알아서 피하고 속도를 자동으로 조절합니다. 물론 최고 속도는 제가 설정할 수 있죠.”
“굉장하네요.”
“말을 낮춰 주시죠. 너무 송구스럽습니다.”
아이리에겐 그렇게 막 대하는 사람이 나를 이렇게 높여 주니 좀 그런데. 아이리와 칸나는 그냥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생각에 좀 빠져들었다. 몸을 되찾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난 유령 상태여도 남의 몸을 빼앗아 기생할 수 있었고 힘을 쓸 수도 있었다. 물론 나도 이렇게 유령 상태로 평생을 지내고 싶지도 않고, 남의 몸을 뺏어 살고 싶지도 않으니까 바라는 바지만.
아무 생각 없이 잔상을 남기며 뒤로 가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난 무언가를 느꼈다. 무언가 추적해 오는 느낌. 그때 칸나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말했다.
“뭔가 쫓아오네.”
“응.”
“그렇습니까? 생각보다 늦었군요.”
스프리는 여유롭게 반응했다. 곧 다시 등을 돌려 무언가를 조작했다. 마차의 뒤꽁무니에 불이 붙었고,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졌다. 방금까지는 시가지를 달리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고속도로의 속도였다. 덜컹거림이 심해졌다.
“살짝, 그, 메스껍다.”
아이리는 창백해져 있었다. 가뜩이나 하얀 피부가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마 차멀미를 하는 듯했다. 하긴, 처음 타니까 이 미세한 진동에 낯선 것도 당연했다.
“조금만 참아요.”
곧 저 멀리 뒤편 언덕에서 자동 마차가 하나 넘어왔다. 우리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지만, 그 자동 마차는 더 빨랐다.
“이게 최고 속도인가요?”
“네.”
스프리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나는 이제 뒤창에 완전히 눈을 붙이고 있었다. 저 다가오는 속도만 봐도 우리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곧 저 뒤의 자동 마차가 눈앞에 크게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모형인 말의 입이 열렸다. 쇠로 된 총구가 입안에서 나왔다.
쾅!
“악!”
총포가 불을 뿜고 땅을 울리는 굉음이 났다. 폭발음과 함께 아이리가 비명을 질렀다. 이런 귀를 찢는 폭발음은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저희도 준비를 안 한 건 아니니까요.”
곧 우리가 탄 마차 뒤로 우산 같은 방어막이 펼쳐졌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총탄은 막은 것 같았다.
“쟤들은 뭐 하는 사람들입니까?”
“당신을 해하려는 사람들이죠. 자세한 건 저들을 물리치고 얘기해야 될 것 같군요.”
스프리는 마차 속에서 무언가를 계속 조작했다. 마차 옆에서 뒤를 향한 총구 두 개가 펼쳐졌다. 판타지에서 차량 총격전을 할 줄은 몰랐는데.
그러나 우리 마차에 달려 있는 건 작은 구경이어서 뒤의 마차를 흠집 내기는 힘들었다. 속도가 좀 느려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보다는 빨랐다.
스프리는 앞뒤를 계속 번갈아 보면서 능숙하게 조작하고 있었다. 어떤 버튼을 누르자 말의 엉덩이가 열리더니 엉덩이 구멍에서 마름쇠가 쏟아져 나왔다.
뒤의 마차는 급하게 방향을 틀었고, 우리의 대각선 뒤에 위치하게 되었다. 스프리는 바로 일어나서 자신의 의자 밑을 열었다. 그곳에서 소총이 나왔다.
“시끄러우니 조심하시죠.”
스프리가 소총을 들어 대각선을 향해 소총을 연사했다. 마차 안이 총소리로 가득해졌다.
“아악! 너무 시끄럽잖아!”
“종자가 말이 많구나.”
스프리는 바로 옆에 있는 아이리의 비명을 무시하고 계속 발포했다. 곧 그들의 마차 문도 열렸고, 대응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총탄이 우리 마차의 문에 박히고 비껴 맞은 곳에 불티가 흩날렸다.
둘 다 사격의 실력은 형편없었다. 그야말로 총알 낭비. 하나 그래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아가씨, 몸 숙이세요!”
총을 처음 보는 아이리는 신기한 듯 구경하고 있었다. 뭔가 싸우고 있다는 건 알지만 총의 위험성을 아직 모르는 아이리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아이리는 내 외침을 듣고서는 그제야 몸을 숙였다.
눈먼 총알도 총알이다. 난 날아오는 총알이 보였지만, 아이리가 볼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아무래도 총으로는 이 싸움의 결판이 안 날 것 같았다. 뒤의 마차에서 누군가 폭죽을 쏘아 올렸다. 하늘에서 붉은빛이 번쩍번쩍했다.
“이거 큰일 났는데요?”
스프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는 그 섬광탄의 의미를 아는 모양이었다. 나도 그걸 알 것만 같았다. 넓게 퍼뜨린 기감으로 점점 우리 쪽으로 오는 빠른 물체들이 느껴졌으니까.
스프리는 마차의 문을 닫고 완전 몸을 돌렸다. 몇 개의 버튼을 조작하자 배에서나 쓸 법한 타륜이 나왔다.
- 수동 운전으로 전환합니다.
마차 안에서 지직거리는 음성이 들렸다. 뒤에서 쏴 댄 총알에 충격이 있었는지 목소리는 깔끔하지 않았다.
“제가 운전을 잘 못해서, 미리 죄송합니다.”
그는 마차를 완전히 옆으로 꺾었다. 바퀴가 끌리는 소리가 나고 먼지가 퍼졌다. 회전을 하면서도 감속은 없었다. 뒤를 보니 바퀴의 자국이 거뭇하게 나 있었다. 스프리는 나무가 많은 숲속으로 차를 몰았다.
곧 포장되지 않은 도로로 진입했고, 마차의 진동이 훨씬 커졌다. 아이리의 표정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녀의 멀미가 심해진 거다.
“아가씨, 잠깐 주무실래요?”
“…응?”
원래 멀미에는 잠만 한 것도 없거든. 아이리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면야. 그래도 내가 깨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에요. 깨면 다 끝나 있을 거예요.”
“내가 지금 도움이 안 되기는 해.”
“그런 뜻이 아닌 거 아시잖아요.”
내 확답에 아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녀의 몸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지만 아이리는 살짝 우물쭈물했다.
“…아. 에퍼리.”
“네?”
“내 몸 막, 더듬고 그러는 거 아니지?”
“…예?”
내 황당한 물음에 아이리는 얼굴을 붉혔다.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나. 나와 아이리는 명백한 이성이다. 하긴, 남자에게 몸을 맡기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나라도 좀 창피하겠다.
“전 맹세코 예프린 아가씨의 몸에 들어갔어도 아무것도 안 봤습니다.”
“그래, 믿지…….”
믿는데 왜 말을 끄는 걸까. 하긴, 이건 믿는 것과 다르게 약간 자연적인 거부감일 것이다. 여자와 남자를 떠나서 또 의식의 주체를 뺏는 거니까.
“그러면, 믿을게, 정말. 칸나도 보고 있으니까.”
“진짜 믿으세요.”
난 아이리를 안심시켰다. 아이리는 눈을 감았고, 난 아이리의 몸을 접수했다. 마주한 곳에서 칸나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아이리의 몸에 들어갔을 때 느낀 건 목에 가득 찬 이물감이었다. 그녀는 구토를 계속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말 토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계속 참고 있었던 거다.
“잘하셨네.”
“에퍼리 님이시군요.”
스프리는 기민하게 내가 아이리의 몸에 들어갔다는 걸 알아차렸다. 난 의자 밑을 열었다. 그곳에는 소총뿐만 아니라 수류탄 같은 현대 화기가 많았다. 난 수류탄과 소총 하나를 챙겼다. 뒤에서는 역시 오프로드 위를 마차가 쫓아오고 있었다.
“뭐 하는 사람들인지 몰라서 쏘기는 좀 그렇네.”
나는 소총을 견착했다. 스프리는 힐끗 옆을 바라보았다.
“사격 자세가 특이하시군요.”
“기본적인 자세죠.”
가늠쇠 중앙에 마차 바퀴가 대어졌다. 숨을 살짝 멈추고 총열이 흔들리지 않게 한다. 군필은 아니어도 사격 방법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4주 훈련은 받았거든.
곧, 내 총열에서 불이 뿜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