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다른 사람 (5)
난 너무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리게 했고, 내 마음을 확인한 이상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내가 나지막하게 말해도 다른 사람들은 다 들었다. 신성파 사람들은 다툼을 멈추고 우리 쪽을 바라보았고, 스프리와 칸나는 뻔하게 모른 체하고 있었다.
“뭐 한 거야?”
채린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물었다. 아이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만 있었다. 이 상황이 마치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백.”
“아…….”
내 대답에 채린이는 한숨을 쉬었다. 어떤 이는 이마를 치고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글쎄.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에게는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이건 아닌 거 같은데?”
“그래, 이건 아니야.”
신성파 사람들은 모두가 만장일치의 의견을 보였다. 나는 얼떨떨했다.
“아저씨, 고백을 그렇게 하면 어떡해? 선물도 주고 멋있게 해야지. 나한테 그렇게 고백했으면 바로 찼어.”
“좀 멋없기는 했어.”
“음. 솔직히, 저렇게 사귀기는 힘들지.”
채린이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훈수가 빗발쳤다. 사실 지구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 심심하고 허접한 고백이 맞았다.
당시 지구의 사회적 상황을 얘기하고 싶다. 우리 사회는 이미 100년 넘게도 전부터 고령화와 저출산의 위기를 맞이했었다. 그런 기조가 쭉 이어지다가 게이트 오픈의 시대를 맞게 된다.
물론 5년이 지나 게이트가 열리기 전 조기 경보를 알리는 시스템이 갖춰졌지만, 이미 너무 늦었던 것이다. 그때는 이미 사회간접자본도 많이 파괴되어 있었고, 언제 게이트가 열려 죽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산재해 있었다.
이런 초유의 사태에 연애는 물론이고 결혼 역시 크게 드문 현상이 되었다.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연애고 결혼이고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하지만 다들 연애에 대해서 어느 정도 폐쇄적인 입장을 취하는 가운데에서도 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어떤 풍조가 생겨났는데, 빠른 시일 내에 연애에서 얻을 수 있는 낭만과 경험들을 모두 획득하려는 효율적인 연애가 사람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언론에서는 그 풍조를 모순적인 낭만주의라고 표현했던 것 같다. 낭만은 애초에 효율과는 거리가 먼 단어였으니까. 보통 무용한 것에 로망과 낭만이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는가.
그래서 나도 처음에는 고백 같은 것에 많이 신경을 썼던 거다. 탄탈로스 숲의 요정 반지니 뭐니.
채린이는 특히 더할 거다. 유망한 S급 헌터로서 엄청난 프러포즈를 많이 받았다고 내게 자랑도 많이 했었거든.
덜컹거리고 창문에는 암흑만 가득한 이 세기말적인 공간에서 나지막하게 말로만 전달하는 게 어이없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기엔 충분했다.
“다시 해.”
“그래, 내가 봐도 그건 아니야. 음. 자네가 잘난 사람인 건 알지만, 저분도 귀족이신 것 같은데.”
지구인들은 계속 조잘거렸다. 나는 순간 혹했다. 정말 이런 걸로 아이리한테 실망을 준 건 아닐까. 다시 해야 되는 걸까?
* * *
트라프비체 제국의 프러포즈 역시 화려했다. 귀족이 결혼하면 담당 영지에서 대대적인 축제를 벌이기도 했으니까. 하나, 아이리는 별로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어느 정도 나이가 차고부터는 다른 귀족들의 결혼식에도 많이 참여했었지만, 대개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또한 귀족들의 결혼은 정략 관계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소문들은 참 빠르게도 퍼지기 마련이었다. 시민에서 상인으로, 상인에서 집사로, 집사에서 시녀로.
아이리도 그런 얘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 원래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데 지지하는 정치 계파가 달라서 결국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는 둥의 이야기. 그래서 그런 결혼식을 보면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다.
차라리 결혼식이라기보다는 두 가문의 동맹식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지 않을까. 꽤 차가운 생각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보던 게 그런 거였으니 그런 생각도 당연했다.
그래서 에퍼리의 고백은 참으로 담백하면서도 좋았다. 어쩌면 그냥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들어 그런 걸지도. 에퍼리가 실종되었을 당시 사랑한다는 편지들을 많이도 받아 봤지만 이렇게 마음을 울리지는 않았으니.
아이리는 에퍼리의 고백을 듣고 너무 기뻤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에퍼리와 친근해 보여서 짜증 났던 여자아이는 오히려 자기가 고백의 대상이 된 양 더 발끈했다.
“다시 해.”
신성파 사람들은 그렇게 에퍼리를 압박했다. 그 사람들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이리는 한마디 쏘아붙이려고 했지만, 그때 에퍼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는 이걸로 됐어.”
에퍼리는 퍽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보았는데, 그 눈빛에는 확실한 믿음과 유대가 있었다. 그녀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 *
일단, 그 허무해 보이는 고백에 대해서는 일단락이 났다. 어차피 그건 아이리와 내 문제였고, 그건 다른 사람들이 상관할 바도 아니었다.
물론 지구인들과 내가 고백은 무엇인가,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옥신각신하기는 했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결국 오랜 시간을 거쳐 신체 제작자가 있다는 그곳에 도착했다. 그곳은 꽤 살풍경했다. 중간중간 멈춰 선 곳에선 나름 정류장이라고 알려 주는 표지라도 있었지만, 이곳은 그런 것도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분위기가 참 별로네.”
채린이가 플랫폼에 발을 놓으면서 한 말은 그것이었다. 나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이토록 발전한 과학 세계의 비밀스러운 공간이라면 꽤나 번쩍번쩍할 줄 알았는데, 그냥 폐광 같은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얘들 이런 곳에 막 들여보내도 돼요?”
나는 스프리에게 물었다. 나는 신성파와 반신성파의 싸움이 얼마나 오래된 건지도 모르고 그 감정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도 모른다. 근데 내가 그들에게 보이기 전에는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더니 어떻게 나랑 아는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적의를 감출 수도 있는 건지.
“당신은 완벽한 존재입니다. 당신의 지인이라면 저희가 못 보았던 면이 있다는 거겠죠.”
스프리는 말했다. 그 말에 신성파 사람들은 살짝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고. 내가 뭐라고 이들에게 이런 신뢰를 주고 있는 건지. 막말로 이들을 본 지는 일주일도 채 안 됐는데.
스프리는 우리를 폐광 안에 작게 설치되어 있는 가건물로 인도했다. 그냥 컨테이너 박스 같은 곳이었다. 길쭉한 테이블이 있었고, 우리는 차례차례 앉았다. 스프리는 커피포트를 이용해 물을 끓여 우리에게 차를 하나씩 건넸다.
“자, 이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하나씩 맞춰 보자.”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일단 제일 먼저 궁금한 건 이것이었다. 채린이를 비롯한 한국 S급 헌터들이 여기서 왜 신성파 노릇을 하고 있는지.
“뭐, 길게 얘기할 것도 없어. 일단, 저놈들은 미친놈들이야.”
채린이가 냅다 스프리에게 삿대질을 했다. 스프리는 허허 웃고 말았다. 그래도 내 지인이라니까 말을 아끼는 모양이다. 대신 내가 물었다.
“뭐가 미친 건데?”
“세계의 모든 사람을 죽이려고 작정한 거야. 그게 미친 게 아니면 뭐겠어?”
“우리는 사람의 존엄성을 되찾는 게 목표입니다. 그걸 죽음으로서 각오하는 거고요.”
참다못한 스프리가 변론을 했다. 채린이는 비웃었다.
“이 세계에서 여신에게 대항할 수단이 있어? 그야말로 그건 신이야. 신은 언제든 우리를 갈아 치울 수 있어.”
“대항할 수단이 있습니다.”
“그건 너희의 망상이고.”
“당신들이 직접 보고 있지 않습니까?”
채린이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나와 칸나, 아이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너는 멸망이라는 게 무엇인지 몰라. 전 세계에 존재하는 일상, 행복, 관계를 모두 뺏기는 거라고. 네가 그걸 알아? 죽을 날을 받아 놓고, 사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그 빼앗긴 일상을 알아?”
나는 채린이가 어떤 날을 말하고 있는지 안다. 내가 리바이어던한테 먹혀 리바이어던이 지구를 멸망시키기 전까지를 말하는 것일 테다. 그들은 멸망이라는 것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거다. 그들이 신성파에 들어간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이것이 올바른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곳은 불합리한 세계입니다. 불완전한 지도자 때문에 모든 게 망가져 버렸죠. 아니, 그건 지도자도 아닙니다. 그건 그냥 괴물일 따름입니다.”
스프리의 말도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아니었다. 확실히 이 세계는 이상하다. 여신이라는 존재는 불완전했다. 사람이란 건 결국 자유의지의 동물이었다. 그걸 막무가내로 막으려니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났고, 난 그걸 경험했다.
“잠깐, 나한테 시간을 좀 줘.”
난 차를 다 마시고 탁상을 밀치며 일어났다. 난 아이리의 손을 잡았고, 끌었다. 잠깐 둘의 시간이 필요했다.
* * *
“뭐가 그렇게 걱정돼?”
“둘 다 맞는 말 같아서요.”
“근데 네가 생각하는 건 따로 있잖아.”
아이리는 역시 내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하나 나는 불안했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으니까 그녀가 내 어깨에 손을 폭 얹었다.
내가 그랬듯이 그녀도 나를 기다려 주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하나 그녀에게 내 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도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았거든.”
아이리가 말했다. 그녀는 내가 어떤 걸 선택할지 이미 알 수도 있었다. 내가 그녀를 아는 만큼 그녀도 나를 알고 있을 테니까.
“여기 귀족들이 늘 하는 말이 있잖아요. 권리와 의무, 전 그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힘을 가진 건 우연에 의해서죠. 내가 누구보다 잘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죠. 그러면 적어도 그 힘에 상응하는 보답을 사람들한테 해야 해요.”
“어려운 얘기야.”
내 말이 마치 아이리에게 끌려가듯 술술 나온다. 아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어머니한테 말한 적이 있었어. 하지만 어머니는 내 뺨을 쳤지, 귀족은 태어나면서 생기는 권리라고. 평민과 귀족은 태생적인 차이가 있다고 했지. 모든 귀족은 그렇게 생각해.”
“뭐, 전 귀족이 아니니까요.”
“그래. 넌 포항에서 네 실수로 사람들을 잃어버렸고, 그것 때문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거겠지. 네 세계는 다들 신분상으로는 평등했으니까.”
아이리가 말했다. 역시, 그녀는 나에 대해서는 뭐든지 알고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한테도 말하지 않은 약한 부분조차. 갑자기 그녀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려 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그녀의 눈은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저 때문에 제 세계가 망했다고 해요.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러면 전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게 아닐까요?”
아이리는 내 말을 듣고 가만히 있다가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녀가 내 얼굴에 손을 댈 때, 난 그제야 내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날 안아 줬고, 난 그녀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많이 힘들었겠네.”
그녀는 그렇게 날 안았다. 내 어깨도 축축해졌다. 그녀 또한 울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내 말뿐 아니라 내 감정에 공감해 주고 있었다. 뭔가 그러니 정신이 바짝 차려지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안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물었다.
“어느 정도 진정됐어?”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리에게서 떨어졌다. 그녀는 눈이 부어서 꽤 우스꽝스러웠고, 나도 그녀보다 덜하지는 않을 터였다.
난 생각을 결정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묻고 싶은 걸 물었다.
“꿈, 잊어버리지 않았죠?”
“응.”
“당당하네요, 약속해 놓고.”
“그렇게 소중한 추억을 어떻게 잊어.”
아이리는 그렇게 말하고 눈치를 보듯 살짝 나를 올려다보았다.
“화난 건 아니지?”
나는 아이리의 그 모습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괜찮아요, 아가씨라면. 그나저나, 멋진 프러포즈가 아니었어서 좀 죄송하네요.”
“괜찮아.”
아이리는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는 최고였어. 남들한테 최고인 프러포즈는 중요하지 않아.”
우리는 그렇게 다시 안았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면 그걸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