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다른 사람 (6)
“결정이 난 얼굴이네.”
다시 돌아온 나에게 채린이가 말했다. 아이리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들 역시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쨌건 나의 동료들이었으니까.
“빨리 말해, 언제든 여신이 간섭할 수 있으니까. 아니, 어쩌면 지금도 보고 있을 수 있지.”
“아니, 안 보고 있어.”
아이리가 단언했다.
“난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거든. 여신이 날 쳐다보면 그걸 느낄 수 있어.”
“그래? 하여튼, 쌍년.”
채린이가 다리를 꼬았다. 바로 욕을 하는 채린이의 인성에 아이리가 살짝 놀란 것 같다. 하긴, 귀족들은 웬만하면 욕을 하지 않으니까. 지구는 반대로 어리면 어릴수록 욕을 잘하는 동네라.
“…아무튼 빨리 말해 주면 안 될까?”
“난 여신을 없앨 거야.”
“씨발.”
채린이가 바로 욕을 뱉었다. 그녀를 비롯한 신성파 사람들은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왠지 아저씨는 그럴 것 같았어.”
채린이와 다른 사람들은 꽤 빨리 수긍했다. 아무래도 그들 역시 나를 잘 아는 모양이다.
“아저씨는 이상한 것에 집착했지. 좀 현실과는 동떨어져서 산다고 해야 하나. 뭐, 그것 때문에 우리가 좀 편해진 건 맞지.”
“환영 씨, 나도 자네가 이상한 의무감에 쫓기고 있다는 건 알아. 근데, 우리의 사정도 이해해 주면 좋겠는데.”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그들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이상한 의무감이 아니에요. 당연히 가져야 될 의무감 같은 거죠.”
“그 의무감이 자네는 너무 커.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의무감을 가지고 사는 거야.”
S급 헌터 아저씨의 말을 가로채며 채린이가 이었다.
“우리도 막말로, 그냥 조용히 쥐 죽은 듯이 살면 돼. S급 헌터의 힘은 대충 남아 있으니까. 과학도 발전시킬 수 있지. 근데, 우리가 이렇게 움직이는 건 이 사람들을 위해서야. 두 번의 멸망은 겪기 싫거든.”
“아니, 이렇게 살면 결국 부작용이 나타나기 마련이야. 여신 같은 불완전한 신이 있는 이상.”
나는 그것들을 봐 왔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들은 아직 여신을 모른다. 난 자연을 만나면서 확신했다. 오히려 신에 어울리는 건 자연 같은 것들이라고. 인간과 하등 관계가 없는.
여신은 너무 인간적이다. 난 잠깐이라도 만나 봐서 알 수 있었다. 인간은 결함 덩어리며, 신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채린이가 머리를 긁었다. 난 그녀가 무슨 일을 할지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마 아이리나 칸나, 스프리는 모를 것이다.
그들은 바로 나를 향해 날붙이를 꺼내 들었다. 총을 든 사람도 있었다. 정말 눈 깜짝할 만한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나는 눈을 깜짝하지 않았지만.
타타탕!
격발 소리와 함께 벽이 무너졌다. 총알은 내가 알고 있는 흔한 위력을 담고 있지 않았다. 내 안의 자연이 거부하고 있었다. 분명 저건 자연과 상충되는 힘이었다.
“이런 비겁한!”
아이리는 책상을 엎고 그 뒤에 빠르게 숨으며 외쳤다. 물론 이런 싸움은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겠지.
귀족들의 싸움은 명예를 위한 싸움이라 서로의 신분을 밝히고 선전포고를 하는 게 예의지만, 지구에서의 우리는 삶을 위한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눈빛으로만 선전포고를 해도 충분했다.
“비겁하기는. 거기 은발 언니, 사람한테는 해가 되는 거 없어요. 굳이 안 숨으셔도 되는데.”
“어쨌든!”
아이리는 신성력을 사용해서 그 총알들을 막았다. 그 이상한 힘들과 신성력은 서로 뭉쳐져 떨어졌다.
“아가씨,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 게요.”
“싸울 때 재수 없는 건 여전하네.”
채린이는 비웃으며 나한테 칼을 날렸다. 그녀는 역시 대단한 사람이다. 나랑 꽤 친한 사이였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의가 가득한 검격을 실어 보낼 수 있다니.
어쩌면 믿음 같은 거려나. 그녀는 나와 지구에서 가장 많이 대련을 한 사이였다. 그런데 그녀는 나한테 정타를 한 번도 맞힌 적이 없으니.
“또 졸렬하게 싸우지.”
“그거 극찬이야.”
난 검을 하나 생성했다. 검에는 불과 물이 소용돌이쳤다. 자연의 힘이 내 몸 안에 완전히 받아들여진 느낌이었다.
검을 부딪쳐 보니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나도 채린이도 그 힘에는 당황해서 서로 물러섰다.
“거참.”
“내가 보기엔 이 힘이랑 그 힘이 서로 반대되는 물질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와 S급 헌터들은 같은 의견을 공유했다. 성질이 다른 물질끼리 합쳐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자연과 신성력은 상극이었다. 아니, 신성력도 아니지. 정확히 말하자면 여신의 힘이다. 하나 여신은 인간이니까, 이 신성력은 극단적으로 인위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다.
“좀 그만 쉬세요, 퇴물 아저씨.”
“아직 현역이야.”
채린이를 비롯한 S급 헌터들이 달려들었다. 어차피 이런 폭발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 못했다. S급 헌터가 괜히 S급 헌터겠는가. 그들은 여러 방면에서 내게 싸움을 걸었다.
꽤 신기하게도, 그들은 합이 잘 맞았다. 원래 S급 헌터끼리는 합을 맞출 수가 없다. 그건 지구에서는 상식이었다. 보통 다른 레이드에서도 S급 헌터 1명과 A급 헌터들이 주를 이루니까. S급 헌터가 2명 이상이 되면 각자의 개성과 파괴력이 너무 강해서, 과유불급이라는 이론이 대세였다.
하나, 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완벽히 힘 조절을 하여 하나의 팀이 되었다. 그들 역시 멸망을 겪으면서 무언가 배운 게 있는 게 틀림없었다. 지구에서는 레이드가 자존심과 같았고, 자존심은 곧 명예와 돈이었다.
지금 이들은 그러나 명예나 돈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었다. 그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싸울 수 있는 것이리라.
“미안한데, 난 이제 사람한테 지지는 않아.”
그들의 합에는 좀 놀랐지만 그뿐이다. 그들은 실재하는 과학으로 싸우고 있었지만, 난 실재하지 않는 상상력으로 싸웠다. 그들과 나에게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었다.
만약 지구에서 이렇게 싸웠다면 내가 백 퍼센트 졌을 것이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나는 내 상상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내 움직임은 예전처럼 화려하지는 않았다. 그저 단순하게 손을 움직이고, 피할 건 피하고, 때릴 건 때릴 뿐이었다.
“엇?”
그들 중 한 명이 놀란 듯 외쳤다. 놀랄 만도 하지. 여기서 꽤 고급 기술로 만든 무기들이 순간 먹통이 되었으니까. 자연의 힘은 신성과 상극이었고, 어디든지 존재했다.
“헐, 썅.”
채린이는 욕부터 했다. 그래도 S급 헌터들은 S급 헌터들. 당황했어도 바로 보조 무기를 꺼내어 나를 제압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건 그야말로 보조 무기였다. 그냥 철로 만들어진 검. 그런 것들은 나한테 피해를 못 주게 되어 있었다. 내 인식이 그렇기 때문이다.
근래 내 행동은 사람 같다고 하기에는 좀 거리가 먼 느낌이었다. 괴물들을 조종하고, 상상력을 내 힘으로 만들어 냈고, 많은 공간을 넘나들었다. 그런 인간으로선 할 수 없는 경험들이 내게 점점 형이상학적인 상상을 가능하게 했다.
“뭐야, 이거 완전 개사기네.”
난 그들의 공격을 그냥 맞아 주었다. 그들을 쉽게 굴복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들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S급 헌터니까 상황 판단도 빠르다. 한 번 쳤는데 안 될 건 안 된다고 생각되면 빠지는 게 당연했다.
“미쳤냐?”
채린이가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왠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늘 대련에서 수세에 몰리면 하는 말버릇이었기 때문에. 그건 사실상 그녀에게는 패배 선언과도 같았다.
난 그들의 검을 완전히 부러뜨려 놓았다. 그들이 들고 있는 걸 포함해서, 품에 있는 모든 무기를 망가뜨렸다. 이제 난 그런 무지막지한 일도 할 수 있었다.
“…이건 무슨 힘이야.”
뭔가 져서 억울하다기보다는 어이가 없다는 느낌이다. 그들은 뭐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했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나와 싸우는 건 불가능했다.
“대단하네.”
아이리 역시 나의 힘을 이렇게 직관한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내 힘을 민감하게 느끼고 신성력을 아예 사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힘을 썼으면 내게 방해가 됐을 게 분명했다. 신성력과 내 힘은 상극이니까.
“아저씨,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이 정도면 그냥 조용히 살 수 있잖아.”
채린이가 물었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내가 아무 짓도 안 하면 여신도 나한테 신경 쓰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 그러면 난 영원히 나로는 못 살 것이다. 내가 S급 헌터가 된 이상 난 이렇게 오지랖을 떨어야 하는 성격이고, 그게 내 정체성이었다.
더 중요한 건, 이런 모습을 본 아이리가 날 사랑해 줬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 모습을 바꿀 수는 없었다.
“아저씨가 구하려는 건 아저씨와 다른 사람들이야. 헌터 때 못 느꼈어? 개인적인 관계가 아닌 이상 그들은 아저씨를 사람 취급도 안 해. 그냥 기사 속의 한 텍스트로 생각하지, 인격으로도 생각 안 해. 그러니까 그렇게 욕하지.”
“그럴 수도 있지.”
어쩌면 내가 이상한 짓을 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확실히 누군가에겐 불필요한 짓일 터다. 여신은 보통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불편한 걸 준 적이 없으니까. 그들에게는 내 행동이 쓸모없는 짓으로 보일 것이다.
여신의 존재도 못 느끼고 잘 사는 사람들한테는 해당도 되지 않겠지만. 여신은 이 세상에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할 사람은 해야 돼.”
“왜 그게 아저씨여야 되냐고?”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내 말에 채린이는 잠깐 말을 잃었다.
“가불기 미쳤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내 행동이 옳은지 틀린지는 모른다. 야속하게도 이 행동이 옳은지 틀린지는 결과를 봐야 알 것이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행동에 옮겼나를 떠나서, 사람들에게 해가 되면 나쁜 행동이고 득이 되면 좋은 행동일 것이다.
“그래서, 난 너에게 부탁할 게 있어. 다른 분들한테도.”
“뭐?”
결과적으로 가장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선택을. 일단 결론이 난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었다.
“도와줘.”
“…헐. 미친.”
채린이는 욕을 내뱉었다. 방금까지 싸워 놓고 도와 달라니 좀 어이없기도 하겠지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 중 최선이었다.
“우리 방금까지 서로 죽이려고 했잖아?”
“죽이려고는 안 했잖아. 나도 너희도.”
“그렇긴 한데, 어쨌든.”
그들은 갑작스러운 내 제안에 혼란스러워했다. 난 그들의 마음에 침입하여 생각을 돌려놓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건 내가 싫어하는 여신의 행동과 똑같은 일이기에. 사람은, 자유의지가 있어야 사람이었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참 요령이 없네. 나한테 그 정도 힘이 있으면 칼에 목을 들이대고 물어봤겠다.”
채린이가 웃었다. 모두 같은 생각일 거다. 헌터들은 효율성을 중요시하니까.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효율성만 따지면 아무것도 못 얻기 마련이었다.
“나도 여신이 좀 띠껍긴 해. 뭐 하는 년인지도 알고, 원래 사람인 것도 알아. 근데 여기서 강하다면 우리는 그 사람 말을 따를 자격이 있어. S급 헌터인 우리도 세상을 못 바꿨잖아? 세계는 개인이 못 바꿔.”
그녀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 건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채린이는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S급 헌터가 되어서 세상의 나쁜 면을 일찍 보고 자란 아이다. 그러니 세상에 대한 절망이나 무력감도 심했을 거다.
“조금, 생각해 보면 안 될까?”
“지금 결정하는 게 나을걸?”
그건 내가 말한 게 아니었다. 마치 건물 안에서 스피커를 통해서 듣듯,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리는 말이었다.
우리는 동시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벽이 눈부신 하얀빛으로 가득했다. 그렇다.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
여신이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