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영혼 (3)
“네 이름은 뭐지?”
“무슨 소리야? 마리나 스미노프잖아.”
“아니, 아니야.”
그녀 특유의 염세적인 모습은 감옥에 갇히기 전 안하무인이었던 그녀를 보는 것 같았다. 만약 내가 마리나와 감옥에서 그 대화를 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속아 넘어갔을 거다.
난 지금 어느 때보다 냉철해야 한다. 마리나는 자신과 나를 포함한 이 세계가 몇 번의 회귀를 거쳤다고 했다. 그렇다면 반복을 해서는 안 된다. 잠깐이나마 이자의 말에 넘어갈 뻔했다는 게 소름으로 다가왔다.
“넌 마리나가 아니야.”
“무슨 소리야, 계속?”
난 그녀를 믿는다. 내가 혹시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리나는 사실 나한테는 타인에 가까웠다. 그녀가 말해 준 게 근거가 없는 말이기는 했다. 나를 바보로 만드는 행동이기도 했고.
어쩌면 내 삶의 주도권이 그녀가 가테스를 죽인 다음부터 뺏긴 건 아닐까 싶기도. 하나, 난 그녀를 믿기로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력은 무엇보다 믿음이니까. 난 그녀의 진심을 느꼈고, 그게 만약 거짓말이라면 내가 미숙한 사람일 것이니까.
물론 내 나름의 근거가 있기도 했지만.
난 내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쥐었다. 이것 중의 하나는 마리나가 준 것이다. 난 그녀의 앞에 목걸이를 꺼내어 흔들었다.
“뭐 하는 짓이야? 너 진짜 정신 나갔니?”
그는 완벽하게 마리나를 연기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의 톤부터, 사사로운 눈짓과 제스처까지. 그러나 난 더 이상 속지 않는다. 이런 짓을 할 만한 건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네가 이런 짓을 하는 게, 신이 아니라는 증거야.”
내가 칸나를 뺏으며 말하자 마리나의 표정이 굳었다. 아니, 여신의 표정이 굳었다고 해야 했다.
이런 걸 참 뭐라고 하기는 그런데, 참 간악하면서도 대단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막 가는 것처럼 우리를 눈속임하고 바로 이렇게 들어와서 협잡질을 할 줄은 몰랐으니까. 인간을 많이 다뤄서 그런가, 잔재주에는 도가 튼 것 같았다.
“아, 똑똑하다. 지구인들이 꽤 고등교육을 받나 봐.”
“똑똑한 게 아니고, 네가 미친년인거지.”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더니 곧 그녀는 여신이 되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 그녀는 여신이었다.
“칸나가 이렇게 된 것도 네 책임이냐?”
“뭐, 글쎄? 난 그저 속에 있는 걸 긁어 주는 역할만 했을 뿐이지. 얘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나 봐.”
나는 칸나를 바라보았다. 칸나는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칸나라고 나쁜 면이 없을 수는 없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자책할 만한 면이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원래 사람은 다 안 좋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 조절할 줄 아니까 사람인 거야. 그걸 끄집어낸 사람이 문제지.”
“결국 위선자라는 거네?”
“위선이라면 위선이고, 이성이라면 이성이지.”
여신은 내 말에 비웃었다. 난 그녀의 본질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억지로 하면 이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의 혼란기를 어느 정도 듣기는 했으니까. 모두가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던 때였고, 그렇기에 사람을 악의에 찬, 누구보다 교활한 동물로 볼 것이다.
“자. 그럼 보여 줄게, 이 아이가 가지고 있는 모습을.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면 인정해야겠지.”
“안 돼!”
칸나가 외쳤지만 여신은 당연히 칸나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의 영혼에서 무언가를 뽑아냈다. 그건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검고 징그러웠다. 마치 여러 갈래의 실이 엉킨 듯한 생김새였는데, 그것들은 합치고 찢어지면서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내가 보기에 정확히, 이 세계의 마물과 닮아 있었다. 분명 그것은 보기에 흉했다. 난 그때 알 수 있었다. 마물이 인간에게 흉하게 보이는 건, 인간이 그토록 꺼리는 모습에서 기인했기 때문이라고.
“그럼 난 이만.”
여신은 절망적인 칸나의 얼굴을 보고 흡족하다는 듯 떠났다.
칸나의 몸에서 태어난 마물은 갓 태어난 아기와도 같았다. 그는 뭘 해야 될지 몰랐고, 그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분명히 인간과는 상극이었다. 사람이 벌레와 쥐, 뱀을 보며 두려워하듯 그와 우리는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칸나는 바로 칼을 만들어 냈다. 아직 우리는 영혼의 세계에 있었고, 칼 한 자루 만드는 것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바로 그 마물을 칼로 베었지만 그건 베이지 않았다. 마물은 오히려 점점 커져 나갔다. 원래는 칸나의 반도 안 되는 크기였는데, 이제는 칸나의 두 배가 되는 크기로 커져 가고 있었다.
“칸나, 정신 차려.”
칸나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그녀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철천지원수라도 보는 것처럼, 그녀는 그 마물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는 듯했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정신 차리겠어, 저런 끔찍한 괴물이 나한테서 나왔는데.”
“끔찍하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야. 계속 참으면 볼만해.”
난 애초에 그것을 계속 보고 있었다. 칸나는 제대로 쳐다도 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여신의 말이 오히려 내게 불을 지핀 셈이다. 난 여신의 말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내 스스로 이겨 내고 싶었다.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난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내 몸 안에서 무언가 요동쳤다. 나도 나의 치부를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웃기지만, 내 안의 마물을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난 그것을 끌어내었다. 내 영혼에서 무언가 빨려 나가는 느낌이 든다. 긁을 수 없는 위치의 피부가 가려웠다. 곧 검은 형체가 내 안에서 튀어나온다. 그것도 역시, 칸나의 것 못지않게 끔찍하게 생긴 것이었다.
“나도 가지고 있는걸. 아마 우리 전부 그럴 거야.”
그건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혼에서 이것을 지울 수는 없었다. 확실히 마물 형태를 한 무언가가 내 몸에서 빠져나가니 시원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이걸 뱉어 내면 더 이상 사람으로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고민하던 것들, 나를 더 나답게 만드는 것들의 기둥 같은 것이니까. 만약 서로에게 이런 것들이 없다면 인간관계에 대해서 고민할 것도 없어지고 편하긴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사랑도 없을 터였다. 사랑은 이런 그림자와 빛과 같은 양분을 먹고 자라는 것이니까. 내가 경험한 바로는 그랬다.
“못 받아들이는 게 있구나.”
“맞아.”
지금도 칸나의 마물은 계속해서 커져 가고 있다. 난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원래 사람의 부정한 마음은 부정할수록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잘못하면 잡아먹힐 수도 있고. 그, 녹색 모자를 쓴 노예 상단주처럼.
그녀는 멍하니 내 마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뭔가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너는 계속 치열하게 살고 있구나. 난 겁쟁이라서 그런 건 못 해. 이런 마물을 꺼낼 수 있다는 것도, 너의 강함 덕분이겠지.”
칸나는 슬픈 눈빛으로 내가 뱉은 마물과 자신이 뱉은 마물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인정하지 않았던 걸 인정하는 것만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은 없으니까.
곧, 그녀의 입이 열렸다.
“나는 널 좋아했어. 아니, 지금도 좋아하고 있지.”
우물쭈물하던 그녀의 입에서 폭탄 같은 발언이 터져 나왔다.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녀는 말을 이었다.
“내가 이러는 게 뜬금없어 보일 거야.”
“솔직히 말하면, 음, 그래.”
“처음에는 그냥 멋지다는 감정이었던 것 같아. 어떻게 나랑 비슷한 나이인데 저렇게 강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마음이 발전한 거겠지. 나도 언제부터 널 좋아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어.”
그렇겠지. 나도 아이리를 언제부터 사랑하게 됐는지 정확히 모르니까. 그래도 칸나가 날 좋아한다는 건 너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너한테 티 낸 적도 없고. 티를 낼까 하던 찰나에는 이미 아이리 아가씨와 좋은 감정을 나누고 있었지. 기회를 놓쳤다고 해야 할까. 좀 웃기지,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척하면서 이렇게 널 탓하는 것처럼 말하는 게.”
“아니야,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칸나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심해 보였다. 나 같은 사람이 뭐라고 그렇게 감정을 소비할 필요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말로 꺼내는 건 조심스러웠다. 그녀가 내게 품은 감정의 크기를 차마 짐작할 수 없었으니까.
“이미 아이리 아가씨와 감정을 나누고 있었을 때 난 깔끔하게 포기하려고 했어. 당연한 일이잖아. 아이리 아가씨는 날 친구처럼 생각하고 있고 나도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래.”
“근데 내 마음이 그렇지가 않은 거야. 처음에는 나도 당황스러웠어. 그냥 접으면 고이 접힐 줄 알았지. 하지만 아가씨랑 네가 서로 감정을 확인할 때마다 난…….”
칸나는 말을 멈추더니 잠깐 호흡을 가다듬었다.
“계속 네 옆에 아이리 아가씨가 아닌 내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야. 더 나쁜 생각도 많이 했어. 서로가 맞지 않는 부분을 발견하면 어떨까, 내가 그 부분을 채워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칸나의 속내를 이 세계에 들어와서 처음 들은 것 같았다. 내게 든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속앓이를 하고 있어도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심지어 과거로 돌아가서도, 난 그녀의 마음을 모른 체해야 될 거다. 그게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뭔가 야속하다, 네가 내 마음을 받아 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지만 또 내가 마음을 전해야 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게.”
정확히, 나도 같은 감정을 느꼈다. 칸나의 고민을 이해해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어떤 위로를 해도 그녀에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난, 그저 그녀가 내게 쏟아 내는 감정을 온몸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짝사랑을 하는 것만큼이나 사랑을 거절하는 것도 괴로웠다. 칸나 역시, 내게는 과분한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원죄라는 엘파힘의 심안은 정말 쓰레기 같은 스킬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런 거대한 감정을 수치로 표현하고 사람을 현혹했으니까.
그녀가 모든 말을 뱉어 내고 진이 빠져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을 때, 나 역시 온몸으로 폭우를 맞은 사람인 양 지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지침에도 불구하고 난 한 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그녀에게는 상처겠지만, 어쩔 수 없는 길이었다.
“미안,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그래, 알아.”
내 말에 그녀는 수긍했다. 칸나에게서 뽑혀 나온 마물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아니, 그녀가 말을 하면서부터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난 그녀의 사랑을 몰랐지만, 그녀가 얼마나 내게 깊은 마음을 품었는지는 알 것 같았다.
마물이 칸나의 종아리 크기 정도로 작아지자 그녀는 그것을 비로소 마주 볼 수 있었다.
“작으니까 그나마 좀 버틸 만하네.”
그녀의 소회와 함께, 마물은 그녀의 몸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내 마물도 내 안으로 귀환시켰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빛이 저 멀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