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분노 (1)
눈을 떴다. 감각이라는 건 신기했다. 망령일 때는 눈을 깜빡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쩔 때는 의식해서 깜빡거려 본 적도 있지만, 나중에는 그것도 귀찮아 의식하지도 않았다. 한동안은 또 눈을 깜빡이는 것이 의식돼서 좀 피곤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되게 빨리 끝나네.”
내가 눈을 뜨자 아이리가 놀랐다는 듯 말했다.
“얼마나 걸렸는데요?”
“한 1분?”
망령의 시간이라는 건 참 신기하기도 하지. 칸나와 내가 망령이 됐을 때는 3년이 걸리더니, 이제는 또 1분이라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잠깐 누웠다 나온 것으로 보였을 테다.
“사실 칸나랑 누워 있는 거 보기 싫었는데, 잘됐다.”
아이리는 내게 팔짱을 꼈다. 채린이는 눈꼴시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난 기분이 좋았다. 살짝 칸나의 눈치를 봤지만 별로 신경을 안 쓰는 듯했다.
칸나는 오히려 내게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자신의 눈치를 보지 말라는 의미였다. 하긴, 내가 칸나의 눈치를 보면 볼수록 그건 그녀에게 부담일 것이다.
“나랑 같이 누운 적도 없는데 말이야.”
“언젠가는 눕겠죠?”
“…그런 의미는 아니야.”
아이리의 얼굴이 갑자기 빨개졌다. 난 잠깐 생각했다. 어딘가에 생각이 미친 나는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마 나도 얼굴이 급격하게 붉어졌을 것 같았다.
“아니, 저도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요.”
“음, 응. 그러면 됐고. 음…….”
“지랄한다, 둘 다.”
채린이는 바로 우리에게 욕을 박았다.
“내가 아저씨였으면 그런 의미가 아니면 뭔데요 하면서 능글맞게 웃었다. 진짜 언제까지 찐따일 거야.”
“네가 사랑을 알아?”
“응, 알기도 하고 많이 해 보기도 했어. 나중에 나한테 여자 친구 3일만 맡겨. 기가 막히게 교육해 줄 테니까.”
“뭐, 뭔 대화야?”
아이리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개방적인 채린이는 그딴 말을 지껄이면서도 전혀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다. 하긴, 성에 대해서 개방적인 게 나쁜 건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아니,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니야.”
“6.25 때도 다 애 낳고 그랬는데 뭘.”
“그만.”
더 이상 정채린이 입을 열면 아이리의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 마침내 만난 내 소중한 사람이 허무하게 가면 안 되지.
“그래, 여신을 막아야지 이 아저씨가 찐따 딱지도 떼고 그렇지. 나 같으면 오늘 바로 하겠지만, 아저씨는 절대 못 할 테니까.”
“야, 그만 해, 그만.”
결국 다른 헌터들이 채린이의 입을 대신 막아 줬고, 난 다른 사람들에게 엄지를 날려 주었다.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아무래도 채린이는 이야기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람의 몸이 만들어지는 신기한 과정을 봤으니 이해하겠지만… 그녀의 또 다른 타깃은 칸나였다.
“그나저나, 이 사람은 이름이 뭐예요?”
“저, 저요?”
“말할 줄 아셨구나.”
내가 볼 때는, 칸나는 이런 붙임성 좋은 사람들한테는 약하다.
“아, 그 영혼 빨아들인 건 죄송하게 생각해요. 그것 때문에 삐진 건 아니죠?”
“아, 아니에요.”
“그나저나 언니 되게 예뻐지셨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채린이는 갑자기 칸나한테 친한 척을 했다. 칸나는 당연히 당황했다. 자신에게 눈꼽만치도 관심을 안 주던 여자애가 이렇게 달려드니까.
근데, 채린이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채린이 말마따나 칸나가 정말 예뻐졌으니까. 원래도 예뻤지만, 뭔가 프로그램 같은 걸로 보정을 했다고 해야 하나.
“그러게. 진짜 예뻐졌네.”
그건 나만이 느낀 게 아닌 듯 아이리도 긍정했다. 칸나는 자신의 얼굴을 못 보니 그저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나도 저기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예뻐지는 건가? 아닌데, 근데 아저씨는 똑같은데.”
채린이는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뭔가 디스를 당한 기분이었지만 난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칸나의 영혼이 구성될 때 성장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아 좀, 쓸모없는 얘기 그만 하고.”
“이거 진짜 대박 기계인데? 이러고 부작용 안 남으면 완전체 성형수술이잖아.”
내가 슬슬 열이 올라서 험한 말이 나오기 직전까지 갔을 때, 아이리도 살짝 궁금하다는 의중을 드러냈다.
“진짜, 그, 그런 건가? 더 아름다워질 수 있는 기계인가?”
“아니, 아가씨까지…….”
이렇게 되면 내가 뭐라 할 수 없잖아. 그래도 이 상황을 말리기는 해야 했다.
“아가씨는 더 예뻐질 것도 없어요. 지금 제일 예쁘니까.”
“…아, 응.”
“호, 아저씨 멘트 는 거 봐.”
채린이의 비웃음과 아이리의 붉어진 얼굴과 함께, 어쨌든 이야기는 일단락이 났다.
일단 우리는 바깥으로 나가기로 했다. 당장 여신이 무언가를 벌이긴 벌였을 터였다. 그나저나 우리도 꽤 무리가 많아졌다.
알레프를 비롯한 검은 무리의 사람들, 채린이를 비롯한 신성파 헌터들. 그중 많은 수를 차지한 건 스프리의 반신성파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바깥으로 나가려 하자, 스프리가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면서 많은 사람을 데리고 왔다.
“저희에게 크나큰 영광입니다, 에퍼리 님, 칸나 님.”
“저희는 당신들을 위한 도구입니다. 저를 써 주시옵소서.”
스프리가 모은 사람들은 나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내게 엎드려서 절하는 건 물론이고 감격의 눈물을 쏟아 내기도 했다. 대체 내가 이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그 엄숙함에 채린이조차 입을 닫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바깥으로 나갔다. 뒤에 많은 사람을 이끌고 있자니 내가 무슨 한 무리의 두목이라도 된 것 같았다.
갑자기 무슨 싸움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의외로 거리는 한적했다. 옌시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손을 쓰지 않은 것일까.
“평안해 보이네요.”
오랜만에 그런 느낌을 느꼈다. 바람이 내 살갗에 스치는 감각, 햇빛의 따스함, 귓가에 닿는 소리. 물론 그것보다 더 따뜻한 건 내 팔에 끼인 아이리의 팔이었다. 감각은 사람을 증거 한다. 이런 감각이 없었더라면 나도 아이리를 느끼지 못했을 거고, 아이리도 나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정말 옌시의 도시는 평안했다. 아무도 서로에게 관심을 주고 있지 않다고 해야 하나.
우리가 있는 곳은 땅끝 마을이었다. 본디 땅끝 마을 사람들이 그렇듯 왕래가 많지 않고 유유자적했다. 그저 우리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는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
“이렇게만 살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리가 그렇게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아이리나 나나 이제 더 이상 바랄 건 없었다.
나도 그녀도 사랑을 이뤘으니까. 물론 사랑이 인생의 종착점은 아니다. 하나, 개인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고 하면 맞다. 이런 삶의 정점에서 대륙의 사람들을 전부 지켜야 할 의리 따위가 있을까.
난 그런 점에서 늘 고민하던 사람이었다. 헌터의 시대에는 포털이라는 게 있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반대편으로 30초면 갈 수 있는 과학적인 기술. 당연히 아무나 쓸 수 없었지만, 나는 S급 헌터라 맨날 사용할 수 있었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내전 중이던 나라는 헌터 양성도 제대로 안 돼 마물이 나타나면 일반인들이 죽기 십상이었다. 난 그것들을 바로 눈앞에서 많이 지켜보았고.
사실, 헌터가 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이 죽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크게 느끼지 못했다. 안타깝다… 라는 감정이나 내가 내뱉는 말도 위선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무 느낌도 오지 않았다.
원래 사람이란 그러지 않은가. 옆 건물에서 사람이 죽었다면 섬뜩하지만, 옆 마을에서 사람이 죽었다면 안타깝고 옆 나라에서 죽었다면 무덤덤하다. 난 그런 보편적인 윤리관을 가지고 있던 보통 사람이었고 갑자기 S급 헌터라는 등위를 받은 사람이었다.
결국 나는 많은 사람의 비극을 최전선에서 감상해야 될 의무를 지니게 됐다. 초반에는 늘 양가적인 감정이 뒤따랐다. 내가 그들에게 얼마나 더 큰 슬픔을 표해야 하는가, 이러다 내가 슬픔에 잡아먹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런 내적 갈등 속에서 포항의 사건이 터졌던 것이고, 난 지금 어찌 됐든 하나의 생각을 정립했다. 그래도 많은 사람을 구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하나 아이리에게는 분명히 다른 문제였다. 난 그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날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아가씨, 내가 이러지 않기를 원해요?”
“…솔직히 말하면 그래.”
어쩌면 이게 나와 아이리의 첫 의견 충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다. 난 아이리의 윤리적 의식을 깎아내릴 생각은 전혀 없다.
윤리 의식은 그야말로 개인적인 것이고, 그 누구도 이런 것으로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난 아이리에게 미안했다. 그녀에게는 과한 오지랖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여신에게 직접적인 해를 당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녀는 사회구조를 만들었고, 그 사회구조는 그 나름으로 천 년을 굴러가고 있었다. 여신이 자신의 입맛대로 대륙을 굴리는 건 분명히 고까운 일이지만, 그걸 일개 인간이 목숨을 담보하면서 반기를 들 이유는 없는 것 같았다.
“난 솔직히 말해서, 여신이 네가 아니고 나한테 협상을 했다면 받아들였을 거야.”
“그래요?”
조용히 있어 주면 터치하지 않겠다는 그 제안. 아이리에게는 매혹적인 제안이었겠지. 아이리는 여신에 대한 원망을 눈앞에서 보인 적이 없었다.
“난 너랑 함께 있는 게 목표거든.”
아이리는 그렇게 말했다. 꽤 가슴을 울리는 말이었다. 나도, 이제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 되었구나.
“아가씨, 전 당신을 선택하지 않은 게 아니에요. 제가 지켜야 할 더 큰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해해.”
그녀는 짧게 말했다. 그녀는 도리어 나를 보더니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이건 내 선택이기도 해. 너를 따라간다는 건 말이야. 우리는 누가 누구에게 종속되는 관계가 아니야. 서로가 서로를 누구보다도 더 이해해 줘야 하고, 그런 관찰의 과정에서 얻어 낸 네가 모르는 너를 알려 줄 필요가 있지.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야.”
“좋아요.”
“그러니까, 그, 날 이제 아가씨라고 부르지 마.”
아이리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잠깐 멍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삐진 목소리로 말했다.
“칸나에게도 이름을 부르고 리얀에게도 이름을 불렀는데 나한테는 꼬박꼬박 아가씨라고 하잖아. 아가씨는 내 이름이 아니라고.”
“좋아요, 아이리. 아니, 반말도 좀 뺄까? 원래 내가 더 나이가 많은 걸로 아는데.”
“…그래.”
아이리는 수줍은 듯이 말했다. 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우리의 손바닥 사이에서 따뜻하게 배는 땀이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의식하는지 알려 주고 있다. 난, 정말 모든 사람이 이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사랑 앞에서는 선한 존재가 되니까.
하나, 여신은 사람의 악한 면을 가지고 조종을 한다. 인간의 강함과 약함, 유한한 목숨, 계급… 이런 것들이 여신이 이 대륙을 통치하는 수단이었다.
나는 그때 묘한 기시감에 젖어 들었다. 평온해도 너무 평온하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만약 여신이라면 무슨 행동을 했을까에 대한 생각도 같이해 보았다.
그건 감이었다. 사람의 선한 면을 끌어내려면 사랑을 하면 되고, 악한 면을 끌어내려면 사랑을 거부하는 감정을 끌어내면 된다. 의심과 거짓, 개인주의, 분노…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
우리는 어느새 옌시 도시 한복판에 있었는데, 평온하게 걷던 그들이 한순간에 멈춰 섰다.
그들은 아무 표정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품속에서 날붙이를 꺼냈다. 여신의 선전포고가 시작된 것이다. 서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