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분노 (3)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 리얀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마음의 변화였다. 그건 심장이 덜컹할 정도로 심각하고 중대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내 적응했다.
“누나, 왜?”
지금은 오랜만에 일거리를 마치고 가티스에게 책을 읽어 주고 있던 찰나였다. 가티스는 황제, 아버지의 죽음으로 퍽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아니, 아니야.”
“아니긴 뭘. 때가 왔어.”
가티스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요즘 가티스는 매일 커튼을 쳐 놓고 살았다. 바깥세상을 보기 싫다는 게 그 이유였다. 리얀으로서는 마음 아픈 일이었지만, 그렇게 어린 나이에 형과 아버지를 잃었으니 그 상처를 다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은 누나이지만, 어머니의 역할도 대신하려고 했다.
리얀은 가티스를 어린아이답게 키우려고 했지만, 가끔 가티스는 너무 성숙해진 것 같았다. 어쩔 때 보면 낯설게도 보였다. 그리고 그게 지금이었다.
“무슨 소리야?”
“점점 세상이 까매지는 거야.”
가티스는 그렇게 뜻 모를 이야기를 했다. 그의 무기질적인 눈동자는 변함이 없었다. 그때, 리얀은 갑작스러운 위협을 느꼈다.
가티스의 마음을 읽지 못하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 아이가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였다.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지만, 꽤나 실재적으로 다가왔다. 숨이 가빠 오고 시야가 좁아졌다. 그녀는 일단 당장 옆에 있는 촛대를 집었다. 흉기로 쓸 만한 것을 손에 집고 나니 그나마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리얀은 마음이 안정되자 그제야 가티스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가티스는 여전히 무표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넌 뭔가 알고 있니?”
“말하고 싶지 않아.”
가티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리얀의 촛대에는 별 관심도 없다는 듯 일어나서 커튼을 걷었다. 늘 어두웠던 가티스의 방에 빛이 들었다.
그와 함께, 창문의 밖에 피가 확 흩뿌려졌다. 가티스는 멍하니 창문 바로 앞에 쓰러진 사람을 바라보았다. 리얀은 놀라서 커튼을 바로 쳐 버렸다.
“…뭐야.”
리얀은 커튼을 치기 전에 그 사람이 누군지 파악했다. 꽤 성실한 근위대원이었지. 아내를 잃고 하나뿐인 자식을 끔찍이 아낀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죽은 근위대원이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더욱 충격적인 건 그렇게 누군가를 끔찍하게 죽일 살의가 자신 안에도 넘실거린다는 사실이었다. 불안… 그것이 근원이었다.
그렇다면 그 불안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 감정은 놀랍게도 익숙했다. 가끔 욱하고 터져 나오는 그 감정이 더욱 날을 세웠다 뿐이지, 생경하지는 않았다.
“가티스, 나한테서 물러서렴.”
리얀은 자신의 상태를 곧바로 판단하고 가티스를 물렸다. 하지만 가티스는 오히려 리얀에게 다가왔다.
“누나, 나는 저주를 받은 것 같아.”
가티스는 조용히 아까 그녀가 쥔 촛대를 들고 왔다. 어린아이의 힘으로 들기에는 무거워서 두 손으로 낑낑대며 들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죽는 것 같아.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촛대가 땅바닥에 놓였다. 가티스는 리얀을 바라보았다.
리얀은 가티스가 예지몽을 꾸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리나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가티스에게 그 무엇 하나 물은 적이 없었다. 일단 가티스를 보호해 주는 게 가족 된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줄은. 하긴, 가티스에게는 이미 자신의 비극에 대해 알고있으면서도 못 막았다는 사실이 될 터였다. 그건 웬만한 풍파를 겪은 어른들에게도 힘든 상처인데 가티스는 여러 번 겪었으니.
“아버지는 괴물한테 비참하게 죽어 버렸지. 작은형은 목이 잘려서 죽었고, 큰형은 뜬금없이 죽어 버렸어. 에퍼리는 사라졌어. 마음 붙이는 자들마다 나를 떠나가 버리니 나도 이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이게 정녕 열 살이 채 넘은 아이에게서 나올 말인가. 리얀은 이 작은 체구가 품은 어둠이 오히려 자기보다 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라면 더 그렇지 않을까. 아이는 하얀 백지와도 같다. 가티스의 마음은 검은 얼룩으로 흉지고 말았던 거다.
“내가 죽어도 누나의 탓이 아니야. 난 처음으로 검은 꿈을 꿨으니까. 이건 내 꿈의 잘못이지, 누나의 잘못이 아니야.”
리얀은 지금 처음으로 가티스의 꿈을 들었다. 그러나 그 꿈은 절망적이기 짝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색이라니. 미래가 없는 세계라는 뜻이 아닌가. 그 미래란, 이 세계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가티스 본인을 말하는 것일까?
가티스는 커튼을 찢어서 두건처럼 자신의 눈을 가렸다. 제사를 기다리는 양의 모습으로, 가티스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리얀이 부들거리며 촛대를 잡았다. 촛대는 가티스의 머리를 한 번에 뭉갤 수 있을 정도로 묵직하다. 굳게 닫힌 창문 사이로 채 막지 못한 비명 소리가 들린다.
* * *
검은 무리는 마물과 얘기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가토스와 긴밀하게 접촉할 수 있었다. 모든 마물과 의사소통을 하는 그들이니 가토스를 부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저 멀리서 먹구름이 끼듯 하늘이 검어지기 시작했다. 난 정말 무슨 천둥 번개를 동반한 먹구름이 오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커다란 새들이 하늘을 덮어서 생긴 것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공포와 분노라는 감정에 휘말린 사람들도 그것만큼은 진풍경이었는지 잠시 칼질을 멈추고 위를 쳐다보기도 했다.
“저건 대체 뭐야……?”
누군가의 나지막한 혼잣말이 우리에게 들렸다. 커다란 새들은 압도적이었고, 그건 공포라는 감정에 민감한 사람들을 모두 도망가게 했다.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는데, 나도 내가 부르지 않았으면 잠깐 숨을 뻔 했으니까.
공군 비행편대 같은 새들의 선두는 당연히 가토스였다. 가토스는 활강을 하면서 우리에게 내려왔다. 커다란 날개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에 마치 헬리콥터가 내려오는 듯했다.
“오랜만입니다.”
“그래, 오랜만이네. 무엇 때문에 부른 건지는, 대충 알 것 같더군.”
다행히도 마수에게까지 여신의 수작질이 펼쳐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마수가 여신의 반대되는 힘을 근원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지.
“이런 일이 올 거라고 느끼고 있었으니… 내 자만일 수도 있겠지.”
“그 정도면 신기 아닙니까?”
“음, 그냥 느낌 같은 거였어. 마수들이 불안에 떨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인간들이 전부 미쳤을 줄은 몰랐지. 아마도 여신이 한 일이겠지?”
“네.”
내 대답에 가토스는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완전 마수화가 다 된 모양이다.
“참 간교한 술책이다. 잘 보면 전부를 미치게 한 것이 아니야. 이 상황에서도 여신은 편을 가른 거야. 그것도 자기 임의로. 아마도 그녀는 인간의 분열이 목적인 것 같다.”
가토스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그나저나, 우리가 얘기하는 동안 입이 쩍 벌어진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신성파 사람들, 지구의 헌터들이었다.
“…새.”
“응?”
“새가 말을 하네.”
먼저 채린이가 겁 없이도 다가가 턱 밑을 쓸어 보았다. 바로 가토스는 고개를 푸드득 젓더니 채린이를 노려보았다.
“…얜 뭐냐?”
“그…….”
뭐라고 해야 하지. 난 둘러댈 말을 찾았다.
“옛날 직장 동료입니다.”
“그렇군. 뭐, 마수가 말을 하는 게 신기해 보일 수 있지.”
근데 마수가 아니라 사람이잖아. 가토스의 눈은 어떻게 새가 되어서 더 깊어진 것 같았다. 독수리의 음유한 눈을 닮았다고 해야 하나. 원래 유능제강이라고 하던가, 가토스의 유하면서 엄숙한 눈빛은 그 날라리 같은 채린이조차 사과하게 만들었다.
“어, 죄송해요.”
“내 인간의 모습이 아니니 인간의 예절을 강요할 수 없구나. 지금부터 생물의 존중이라도 해다오.”
가토스는 그렇게 말했다. 역시 착한 사람이야. 막말로 황자의 턱을 친 건데. 채린이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정말 참교육이 아닐까.
“…멋있다.”
“응? 뭐라고?”
“아니야.”
듣긴 들었는데 모른 척해 줬다. 설마 가토스한테 반한 건 아니겠지. 아니, 지금 새가 굉장히 멋있고 풍채가 좋긴 한데… 사자나 호랑이가 멋있는 거랑 사람이 멋있는 거랑 다르니까, 그런 의미는 아니겠지. 난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타라. 제국까지 가야지? 지금 제국에도 몇몇 친구들이 있지만, 그들로 막기에는 역부족일 거다.”
“네.”
가토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나와 아이리 쪽으로 날개를 접고 등을 돌렸다. 다른 새들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두 배 정도 몸집이 되는 새들이 모두 등을 돌려 날개를 일시에 접는 모습은 꽤 장관이었다.
내가 자연스럽게 아이리의 손을 잡고 가토스의 등에 오르려고 할 때, 이미 가토스의 등 위엔 선착자가 있었다. 그곳에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는데 낯선 사람. 채린이가 볼을 발그레하면서 머리를 뒤로 넘기고 있었다. 가토스도 살짝 당황한 듯 뒤를 살짝 봤다.
“어… 자네가 여기 탈 건가?”
“네. 그러면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지만.”
가토스의 당혹스러운 말투에 채린이는 뻣뻣하게 고개를 올렸다. 뭐지, 저 재수 없는 모습은.
뭐, 굳이 가토스랑 같이 갈 이유도 없으니까 난 다른 새에 아이리와 함께 타기로 했다. 다른 새야 말을 못 하니 그다지 시끄러울 것도 없었는데, 유달리 시끄러운 곳은 가토스와 채린이였다. 당연히, 정채린이 그 지분의 80%를 담당하고 있었지만.
“그런데, 이거 깃털 잡아당기면 안 아파요?”
“괜찮다. 사람이 떨어지는 것보단 낫지 않느냐.”
“그, 말투가 원래 그렇게… 고풍스러우세요?”
황족의 말투인데. 내가 아가씨란 단어 썼을 때는 엄청 뭐라고 하더니 저런 말투에는 고풍스럽다고 하네. 뭐가 이상한 상태이기는 하다.
심지어 가토스가 그렇게 얘기를 했음에도 채린이는 마음이 약해져 세게 못 잡아당겼는지 떨어질 뻔하기도 했다. 나한테 대련에 진 게 분하다고 내 머리채는 그렇게 찰지게 잡았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물론 채린이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마물 새에 타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각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곧 상공으로 날아서 대륙을 횡단했다.
새들은 바람을 갈랐고, 그 압도적인 속도에는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나는 그 와중에 계속 아래를 보았다. 몇 개나 되는 마을, 도시들이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내 눈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에퍼리.”
“네?”
내가 계속 아래를 바라보자 뒤에서 나를 붙잡은 아이리가 날 불렀다.
“뭐 문제 있어?”
“왜요?”
“네 표정이 좀 이상해져서.”
그녀는 순식간에 정곡을 찔렀다. 마을과 도시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고, 그건 끔찍한 장면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봐야 했다. 난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라 맞서야 되는 사람이니까. 무엇 하나라도 힌트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 모든 걸 공유해야지. 그렇지? 가뜩이나 가토스 황자 전하도 없네.”
“그러네요.”
난 사실 확정이 되면 말하려고 했다. 내 눈으로 보고도 쉽게 믿을 수 없어서. 하지만 그녀는 내 긴가민가한 생각도 공유하기를 원했다. 원하면, 뭐, 해 줘야지. 정확한 건 아니지만.
“놀라지 마세요.”
“응.”
나는 숨을 잠깐 들이쉬었다. 높은 하늘에서 마시는 공기가 청량하다 못해 가슴까지 시리게 만들었다.
“인간들이 마물이 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