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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145화 (145/150)

145화 사랑을 믿다 (1)

“왜, 왜 이렇게 끌고 다녀.”

“…아, 미안.”

“아니야, 싫은 건 아닌데.”

아이리는 살짝 당황했을 뿐이었다. 그냥, 에퍼리가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하니까. 이런 남자다운 면을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창피해서 말을 못 했을 뿐.

“안 바빠?”

“바쁘긴 한데, 괜찮아.”

“그나저나, 왜?”

“왜라니? 그냥 보고 싶어서 온 건데.”

에퍼리는 그렇게 말했다. 아이리는 자신이 잘못 말했다는 걸 깨달았다. 연인이라면 당연히 보고 싶고 곁에 두고 싶어 하기 마련이 아닌가.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고. 괜한 말을 했다 싶었다.

에퍼리는 아이리를 이끌었다. 아무 말 없이도 대화가 전달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에퍼리는 아무 말 없이 아이리의 손을 잡아끌고, 아이리는 뒤따라갔다.

아무 말 없이, 어떤 시선의 교환 없이 감정이 뒤따르는 발자국에서 전달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그 길이네.”

“그래.”

아이리는 문득 걸으며 깨달았다. 이곳은, 아이리가 에퍼리를 끌고 다니며 걸었던 곳이었다. 리얀과 마리나와 술을 같이 마시다가 공작저로 도망갔을 때. 갑자기 그때 눈물을 보였다는 것에 그녀는 창피해졌다.

“…넌 그때 알았어?”

“뭘?”

“네가 널 좋아한다는 걸.”

에퍼리는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꽤 고민을 하는 듯했다. 그는 아이리가 답답하다고 느낄 때쯤에서 몇 걸음을 더 지나 답했다.

“아니.”

에퍼리는 계속 걸었다. 하나, 그들이 걷는 길에 벽이 나왔다. 그렇다. 이 도시에는 리얀이 사태에 대비해서 쳐 놓은 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리는 돌아갈까 했지만 에퍼리는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부쉈다.

“너, 이렇게 부수면 사람들은 어떻게 하려고?”

“다 생각이 있어. 어차피 단절은 미봉책일 뿐이야.”

에퍼리는 그렇게 답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 생각은 있었지. 얘가 날 좋아하나? 근데, 그런 상상은 참 많이도 해서 의미가 없었어. 그것보다 난 사실 사랑을 믿을 수가 없었어. 난 이중적인 감정에 시달렸지.”

“무슨 이중적인 감정?”

아이리는 귀를 기울여 들었다. 에퍼리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만, 과거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왔는지는 모른다. 그녀에게 이건 큰 기회였다. 그녀는 늘 에퍼리를 알고 싶었으니까.

“진짜 사랑을 하고 싶으면서도 사랑이란 것을 믿을 수가 없는 거야. 누군가 날 사랑할까 생각하면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도통 믿을 수가 없었어. 그리고 나를 보면서도 나 같은 사람을 대체 누가 사랑할까 생각했지.”

에퍼리는 말을 이었다.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추악한 감정이 아예 속에 없다면 거짓말일 거야. 물론 다른 사람들은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난 나를 아니까. 이런 세상에서 누가 누구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내가, 너를.”

“맞아. 그리고 나도 너를.”

“그건 대체 어떤 변화였을까?”

“내가 널 사랑하면서 생긴 변화야. 내가 너를 어떻게 사랑하게 됐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 내 삶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기록의 총합인 만큼 너를 향한 사랑은 너와 만나고 나서부터 기록의 총합일 거야. 난 너를 사랑하면서 네가 날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게 기적적으로 된 거지. 난 결국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못 알아냈지만 답을 먼저 알아 버린 셈이 되었지. 결과적으로 우리는 사랑하니까.”

아이리는 물 흐르듯이 얘기하는 에퍼리를 보았다. 뒤통수만이지만, 그의 뒷모습은 꼿꼿했고 자신이 있어 보였다.

나름의 답을 찾은 모양일까. 아이리는 사실 에퍼리가 이 작금의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지 의문이었다. 늘 그는 답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이건 별개의 문제였다.

지금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리는 특히 그랬다. 그녀는 여신에 대한 신앙이 가득 찬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그녀는 절대적인 존재였으며, 현신할 때도 인외적인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에퍼리는 인간이었다. 인간이 신에게 대항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지. 아이리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도착했네.”

아무 말 없이 그들은 걷다가 공작저에 도착했다. 감회가 새로웠지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여기 역시 피 칠갑이 되어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놀랍게도 공작저는 깔끔했다.

“내가 다 청소해 놨어.”

에퍼리는 아이리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듯 말했다. 청소해 놨다니까 수긍은 되지만, 왜 청소를 했을까? 가뜩이나 바쁠 텐데.

아이리는 들어가면서 주변을 바라보았다. 공작저는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저 사람만 없었을 뿐이었다.

“왜?”

“깔끔한 편이 좋잖아.”

에퍼리는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는 아이리의 방을 알고 있었고, 그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계속 에퍼리의 뒤통수만 보던 아이리는 자신의 방에서야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얼굴은 뜻밖에도 낯이 벌게져 있었고,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나 여기서 씻어도 될까?”

“응? 물이 나오…….”

아이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다가 말을 멈췄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제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응, 뭐. 씻어. 화장실 위치는 알지?”

“그래.”

최대한 자연스럽게 아이리는 반응했다. 당황했다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에퍼리나 자신이나 서투른 건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해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에퍼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깥으로 나갔다. 왜 이렇게 꾸미고 왔는지 이해가 갔다. 그녀는 에퍼리가 나가자마자 침대 위에 풀썩 누웠다.

이제 곧 천장이 아닌 에퍼리의 얼굴이 눈앞에 드리워지는 걸까. 그림자가 겹치고 붕 뜬 감정들이 섞여 네 것과 내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달콤한 혼란에 빠지려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온몸의 신경이 긴장됐다.

* * *

말했다. 말해 버렸다. 아이리는 아마 눈치챘을 거다. 잠깐 멈칫했으니까.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것일까.

물이 흘러서 내 몸으로 떨어진다. 마법의 힘으로 따뜻해진 물에서 수증기가 나오고 곧 잠겨 질식할 것만 같았다.

마치 제례 전날의 사제처럼, 나는 몸을 공들여 닦았다. 내 몸은 당분간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서로 공유해야 할 공공재와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도 안 되는 법. 난 정말 하루 종일이라도 씻고 싶었다. 씻고 나서 난 다시 멋진 옷을 갖춰서 입었다.

여기서 입는 멋있는 옷은 아주 귀찮고 번거롭기 짝이 없었지만, 이것 또한 의식에 가까웠다. 난 단추를 다 채우고 나서도, 잘못 끼워져 있는 건 아닌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아이리, 나 왔…….”

문에서 한숨을 크게 들이쉬고 난 노크를 한 다음 조심스레 들어갔다. 하나 아이리는 그 방에 없었다.

“아이리?”

혹시 창피해서 커튼 뒤나 침대 밑에 숨어 있는 건 아닐까. 난 방 안을 뒤져 보았다. 방이 그렇게 큰 건 아니었지만, 난 구석구석 허리를 숙여 가며 찾았다. 찾는다는 행위에 심취해 화장품 서랍을 열어 보기도 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짓이었지만, 지금 내 머릿속은 뜨거운 열기에 논리적인 회로가 모두 타 버린 상황이었다.

순간 머릿속에 불안감이 스쳤다. 이곳은 굳이 말하자면 여신의 세계였다. 여신이 설마 나 몰래 무슨 짓을 한 건 아닐까. 갑자기 그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공포에 빠졌다. 오감이 차단된 채로 심연에 빠진 것 같았다.

그때,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문은 조금만 열린 채로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그 어둠 속에, 내가 생각한 끔찍한 상상들이 모두 시각화되어 구현된 것 같았다.

“에퍼리?”

그 어둠 안에서 나온 목소리가 환청인 줄 알았을 정도로 난 커다란 불안에 빠져 있었다.

“빨리 씻었나 보네.”

아이리는 조심스럽게 다리부터 빛 속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방 안에 들어오자 방이 더 밝아진 기분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정말 아름답게 꾸민 채로 방에 들어왔다. 그것만으로 내 어두운 상상은 일시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허벅지 쪽부터 갈라진 하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물을 방금 먹은 은발은 더욱 빛이 났고, 붉은 눈은 입체적인 보석을 보는 것 같았다. 옅은 화장은 그녀의 뚜렷한 이목구비를 더 강조하여 감정이 그녀 얼굴 위에 떠다닐 정도였다.

“…예쁘다.”

“고마워.”

가장 솔직한 내 반응이었다. 칭찬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건, 그녀의 외모도 외모였지만 공기 위에 흐르는 감정들이었다.

감정들은 악보 위의 음표처럼 통통 떠다니고 색채를 가지는 듯했다. 불안, 기쁨, 행복, 공포, 설렘 등의 감정. 그것들은 분명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들과 같았고 그녀 역시 내 감정을 보고 있을 터였다.

“그나저나 씻고 온 거야?”

“응, 공작저가 화장실이 하나는 아니잖아.”

“아.”

난 왜 번갈아 씻을 거라 생각했지. 너무 생각이 편협해진 느낌이다. 아이리는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가 내게로 다가왔다. 난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잡아 내 가슴께로 올렸다. 나는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아이리, 사랑해.”

“…응, 고마워.”

이건 제국의 방법도 아니고 지구의 방법도 아니었다. 그냥 내 몸이 가는 대로 움직인 것이다. 사랑만큼 가장 개인적인 감정도 없으니, 표현도 내가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서로 사랑을 확인했다. 우리는 당황한 연인이었다. 아이리도 무엇을 할지 모르고 나도 무엇을 할지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일까? 어떤 규칙이라도 있는 것일까. 나도 그렇고, 그녀도 사랑은 처음이었다. 난 먼저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이건 내 나름대로의 용기였다. 사실 이건 나만의 행동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우리는 미지의 문에 서로의 손을 포개어 대고 있는 모험가들과도 같았다.

그녀가 못내 하지 못할 일을 내가 해 주고, 내가 하지 못할 일을 그녀가 대신해 주는 것이었다. 막상 입을 맞추면서도 다음에 할 일이 떠오르지 않자 이번에 나를 밀어 준 건 아이리였다. 그녀가 자신의 팔을 내 허리에 두른 것이다.

그건 확실히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던 내 불꽃을 강하고 뻣뻣하게 만드는 격발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밀어 주고 당기면서 서로의 호흡을 조절했다.

“불이 너무 밝다.”

“그러게.”

서로의 동의하에 우리는 전등을 어둡게 맞췄다. 그리하여 우리의 감정들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말로 하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호흡은 어쩔 때는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어 어둠 위에 떠다녔다.

삶에서 이보다 감각적인 순간이 있으랴. 감각은 감각을 탐하게 되고 잡아먹게 되었다. 난 반대로 망령 때의 무감각하던 삶이 떠오르는 걸 느꼈고, 초감각 상태인 지금과 무감각 상태인 그때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로의 영혼은 부딪치며 불티를 불러일으키고, 공유된 감정은 단순한 합하기의 과정이 아닌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창밖의 달은 처음에는 블라인드 윗단에 걸쳐 있다가 구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간과 공간이 섞여 하나의 선이 된 듯하다가, 어쩔 때는 무한하게 불어나 우리가 세상을 덮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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