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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판타지로 떨어진 S급 헌터-146화 (146/150)

146화 사랑을 믿다 (2)

제논 왕국의 병사들은 트라프비체 제국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백인, 흑인, 황인, 그 종도 다양했다. 수뇌부는 대개 지구에서 온 사람들로 갈아 치워졌기 때문이다.

“저기 주환영 헌터가 있다는 말이지?”

“근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강한 힘을 얻은 거지?”

그들은 왕공학을 비롯한 많은 S급 헌터들이 주환영 손에 죽어 나갔다는 걸 알고 있었으며, 굉장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분명 이 사회에 일찍 떨어진 만큼 더 강한 힘을 얻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이길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세계에서 여신이라고 불리는 자의 힘을 업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의 국경 안에 있는 도시들을 그들은 다 점령하지 않았다. 여신의 조언과 광증에 걸린 제국 사람들을 봤기 때문이었다. 제논 왕국의 병사들은 그 광증의 의미를 의심하지 않았다. 여신에게 거역한 증거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들이 그렇게 믿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여신은 진짜 ‘존재하는 신’이었으니까. 황홀한 빛에 감싸인 그 모습은 그야말로 인간의 모든 감각을 압도했다.

“여러분은 저의 가호를 받고 있습니다. 저기 제국의 사람들은 저를 부정하는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제가 당신들의 몸에 기름칠을 하니, 칼은 비껴 나갈 것이며 포로로 잡힌다고 한들 밧줄 또한 느슨해질 테니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국의 수도 앞에서 연설을 하는 건 지구의 어떤 장군도 아니었고, 오로지 여신의 몫이었다. 이건 바로 지구 헌터들과 여신의 협약, 지구 헌터들의 말을 빌리자면 ‘예배당 작전’이었다.

여신은 제논 왕국의 헌터들과 인류의 재구성을 논하고 있었으니까. 여신은 에퍼리를 비롯한 반역자들을 쳐 내고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제논 왕국의 사람들로 인류의 중심을 개편하려고 했다. 반대로 제논 왕국 사람들은 신이 누구든 자신들이 실권을 잡고 싶어 했다.

여신에게 제논 왕국의 헌터들은 매혹적이었다. 지구에서 상류층과 연결된 그들은 남들과 구분되고 싶은 욕구와 상류층의 정무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신의 사자들이다! 저 불온한 사상을 가진 제국 사람들을 척결하라! 저들은 사람도 아니다. 신을 거부한 사람에게 인격이 있을 리가 없다. 진정한 인류는 우리이다!”

제논 왕국의 헌터들의 허무맹랑한 민주화 계획도 여신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여신과 함께 나타난 그들을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주권을 위해 나서 본 적도 없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민주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그들을 지지했다.

“그들에게 쓴 맛을 보여 주자! 우리는 여신의 군대다!”

모든 병사가 여신을 바라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고 제국의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자신들이 선택됐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뿐이었다. 여신에게 반역하는 수괴, 에퍼리라는 사람을 막는 것. 그는 인간 사회의 역병이며, 그의 몽타주 또한 다 알고 있었다. 에퍼리의 목에 걸린 상금만 해도 삼대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병사들의 욕심이 사기와 함께 타올랐다.

* * *

대군이 지척에 다가왔다. 리얀은 사실 보고받은 바가 별로 없었다. 명색이 황제인데, 사실상 황제 실격이었다. 그녀는 자책감이 들었지만, 에퍼리의 엄명이 있었다.

리얀을 비롯한 가티스, 아이리를 포함한 사람들은 에퍼리가 지어 준 벙커에 있었다. 에퍼리는 노을이들과 함께 만들었다고 했다.

“에퍼리는?”

아이리는 노을이들에게 에퍼리가 어디 있는지 물었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알려 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왜 알면 안 돼? 너희가 뭔데?”

“에퍼리 님의 명령입니다. 누가 물어도 자신에 대하여 대답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벙커가 소란스러워지자 사람들은 아이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들은 어디선가 에퍼리가 모아 온 사람들이었다. 광증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 그들은 가족 단위, 연인 단위로 모여 있었으며 개인 단위는 없었다.

“괜찮아, 곧 지나갈 거야.”

“엄마, 사람들은 왜 그러는 거야?”

“몰라. 다만 우리는 지나가길 바랄 뿐이야.”

그들은 서로를 다독였다. 아이리는 그들이 어떤 연유로 광증에 걸리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일단 모두 유대감이 확실해 보였으며,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사랑으로 대하고 있었다.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남들보고 먼저 도망가라 하고 자신이 막겠다는 사람들이었다.

에퍼리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모았으며, 어떻게 이런 기적적인 일을 보여 줬을까. 아이리는 에퍼리의 속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와 함께 밤을 같이한 다음 날부터. 아이리가 잠에서 깼을 때 에퍼리는 사라져 있었다. 리얀을 포함한 사람들과 함께 벙커에 있으라는 짧은 쪽지와 함께.

그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포격 소리였다.

노을이들은 벙커의 문을 완전히 잠그고 환기구를 작동시켰다. 환기구가 돌아가는 소리, 포격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에퍼리가 지금 막고 있는 건가요?”

“네. 이제 나가시면 안 됩니다. 알아서 잘하실 겁니다.”

“당신들은 알고 있나요? 에퍼리가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노을이들은 여전히 철통 보안이었다. 아이리는 답답했다. 바깥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가만히 있는 건 그녀의 성격이 아니었다. 아이리는 조용히 일을 꾸몄다. 자신 역시 신성력을 가졌다. 이 일에서 에퍼리를 혼자 놔둘 수는 없었다. 그때, 허리를 쿡 찌른 건 리얀이었다.

“아이리.”

“아, 네?”

“이상한 생각 하고 있구나.”

리얀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노을이들은 사람들을 통제하느라 그녀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를 혼자 둘 수는 없어요.”

“그래. 너희는 서로 사랑하지?”

“…네.”

리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리 역시 리얀이 에퍼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금 말하는 게 껄끄러워졌지만, 리얀은 도리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에퍼리에 대한 사랑을 불가사의한 추억으로 여기고 있었으니까.

“나는 알고 있어, 그게 얼마나 대단한 감정인지. 네가 부러워.”

“…그런가요?”

“그럼. 그게 얼마나 대단한 감정인지는 여기 모인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어. 내 추측대로면 여신은 편 가르기를 한 게 아니야. 힘이 거기까지밖에 미치지 못하는 거지.”

“그건 무슨 소리죠?”

아이리가 궁금하다는 듯이 귀를 기울였다. 리얀은 자신의 가설을 말해 주었다.

“나도 순간 살의를 느꼈어. 가티스에 대한 살의를 느꼈지. 가티스가 날 구해 주지 않고 근위병이 갑자기 들어오지 않았으면 난 아무 저항 없는 가티스를 죽였을 거야. 가티스가 날 구해 줬을 때, 나는 엄청난 죄책감과 그 아이에 대한 사랑을 느꼈어. 그 사랑이 살의를 조절할 수 있게 했지.”

“가능한 일인가요? 감정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닌데.”

“음, 아마 에퍼리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난 에퍼리를 사랑했는데 그 마음이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어. 그의 예언대로. 그 사랑이 빠진 곳은 공허했지. 그 공허함을 느낄 수 있으니 사랑이라는 감정에도 더욱 민감했지. 딱 비워진 곳이 그 순간 채워졌으니까.”

리얀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건 개인적인 체험이니 아이리가 어쩔 수는 없었다. 사랑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강렬한 감정이 어떻게 타의적으로 사라진다는 말인지.

“그래서 난 지금 네가 얼마나 절박한 줄 알아.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지면 자연스레 불안하기 마련이니까.”

“일단 제 목표는, 에퍼리 옆에 있는 거예요. 그게 어떤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래. 그게 중요한 거야. 난 널 응원해. 그리고 도와줄 수도 있지.”

리얀은 귓속말로 말했다. 아이리는 깜짝 놀랐지만, 노을이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잠잠한 척을 해야 했다. 아이리는 다시 되물었다.

“어떻게요?”

“난 사람의 영혼을 바깥으로 보낼 수 있어. 알잖아?”

리얀은 자신의 하얀 손을 보여 줬다.

“저도 나중에 가토스 황자 전하에 대한 건 듣기는 했는데, 그건 엄청난 준비를 필요로 하는 것 아닌가요?”

“음, 아니더라고. 스킬이 생기면 쉬워.”

“…그런 스킬이 있어요?”

리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스킬에 원죄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힘을 넘은 스킬이라고 했다.

“난 이걸 가지면서도 늘 불편했어. 약간, 이질적인 게 내 몸 안에 있는 기분이었지. 그래도 이런 곳에서 쓸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럼 빨리해 주세요.”

“했어, 이미.”

아이리는 리얀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리얀의 무릎 위에 있는 자신을 보았다. 마치 자고 있는 듯한 깊은 호흡이었다.

“뭐, 뭐 어떻게 하신 거예요?”

“네가 해 달라고 할 것 같아서, 미리 했어. 결정은 빠를수록 좋으니까.”

리얀은 그렇게 말했다. 아이리는 떨떠름하게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집중하니 손에 스치는 공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평생 감각을 동반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가, 그게 없어진 느낌은 묘했다.

“에퍼리를 구해 줘.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거야, 아마도.”

리얀은 그렇게 속삭였다. 아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잠긴 문을 통과했다. 이른바 유체 이탈 상태였다. 그녀는 바깥으로 나갔다.

문을 나간 순간 그녀는 고꾸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벙커와 문 바깥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냥 세상이 검어져 있었다. 별 없는 우주 속에 있는 느낌이었다.

검은 혹성의 미아가 된 아이리는, 자신을 진정시켰다. 배경이 검으면 검을수록 좋다고 자신을 세뇌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빛인 에퍼리를 보기 더 쉬울 테니까. 그녀는 앞으로 나아갔다.

* * *

“네가 세계를 망치고 있구나.”

“별로.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 혼란스러운 세계를 보아라. 이것이 네가 한 짓이다.”

여신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대화할 수 있었다. 여신도 내게 다가올 수 있었고 나도 여신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여신이 하나의 세계인 만큼 나도 하나의 세계였다.

물론 이 검은 세계는 제국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이것도 내 상상력을 많이 응축한 것이다. 난 최대한 많은 사람이 내 상상에 시달리지 않기를 원했다.

“결국 너도 나와 똑같은 존재인 거다. 인간 이외의 행복을 맛보면 인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여신은 내 지금 상태에 대해 지적했다. 하지만 그녀는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나는 지금 너와 같은 상태지만, 같은 생각으로 온 게 아니야.”

그녀의 말대로, 나는 인간임을 거부했다. 그건 몸을 제작할 때 일어난 일이었다. 난 몸을 입을 수 있었지만, 영혼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인간이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여신은 그만큼 이 세계에서 절대적이었고, 많은 힘을 구가할 수 있었으니까.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괴물이 되어야 했다.

나는 3년 동안 진공상태에 떠돌아다닌 이후로 인간의 몸을 한 적이 없다. 하나 그건 여신의 말대로 욕망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순전히 아이리를 위해서였을 뿐이다.

나와 그녀는 사랑하는데 그녀가 나를 만지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그녀에게 감각을 선물해 주기 위해서 연기한 것뿐이다. 물론, 밤사이에 있었던 그 낭만적인 일들도 나는 느끼지 못했다. 그저 아이리가 느끼는 영혼의 울림을 공유받은 것에 불과했다.

“현재 세계에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 네 편은 없어. 그만 꼬장 부리고 사라지는 건 어때?”

여신은 내게 이죽거렸다. 나 역시 제국으로 돌격하는 제논 왕국의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제국의 수도가 어둠이 반구 형태로 덮여 있는 모양처럼 보이겠지만, 전혀 지체하지 않았다.

“아직 모르겠나? 이 세계에 대해서.”

“뭔 말이야?”

여신은 내 말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그녀에게는 생경한 감각일 터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계에서 유이하게 독립적인 존재였으니까. 지금 이 순간은 나도 그녀의 속마음을 알 리 없고, 그녀도 내 속마음을 알 리가 없는 것이다.

“네가 현재를 데리고 왔으면 나는 과거를 데리고 왔어. 네가 미뤄 놓은 그 과거를 말이야.”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에, 하나둘씩 형상들이 생겨난다. 그들은 대개 끔찍한 모양들이었다. 아직, 사라지지 못한 욕망들이었다. 어마어마하게 쌓인 과거의 욕망들이 뿜어내는 힘에 나 역시 등골이 오싹해졌다.

“훌륭하네.”

누군가가 박수를 쳤다. 여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었다. 검댕이로 뒤덮인 하나의 욕망 덩어리였다. 그것은 다른 개체보다 컸다. 그 개체는 곧 어둠의 껍질을 벗어 냈다.

“오랜만이야.”

익숙한 목소리. 마리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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