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사랑을 믿다 (5)
모든 사람의 스킬이 사라져 버렸다. 스킬의 존재는 쉽게 망각됐다. 사람들은 스킬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머나먼 과거의 것으로 치부했다.
리얀은 제국의 수도를 다시 건설하고 싶어 했다. 하나 상의할 사람들이 없었다. 노을이들은 벙커가 열린 순간 잡을 새도 없이 바깥으로 뛰쳐나가 사라져 버렸다.
벙커 안에 있던 소수 역시 스킬이 사라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도시가 사라진 가운데 큰 변화가 일었다.
사람들이 계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리얀은 다시금 자신의 상식대로 사회를 구축하려 했지만, 계급이라는 제도 자체를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거스른다는 게 아닌, 굳이 사람을 나눠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냐는 것이다.
“뭐, 그럼 그럴 필요는 없죠.”
사람들은 심지어 국가의 의의에 대해서도 잘 이해를 하지 못했다. 각자 알아서 살면 그만이지 뭐 하러 도시를 건축하냐는 것이다.
마치 인간들이 오랜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돌아다니면서 설득했고, 국가가 필요하다는 논리적인 근거를 들었다. 물론 사람들이 계급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거대한 괴물 같은 국가가 아닌 하나의 공동체 내지는 집합체 같은 국가를 꿈꿔야 했다.
리얀은 정말 바빴다. 사람들 중심으로 행동하다 보니 어느 순간 보좌진도 생겼다. 수도는 확실히 오래되다 보니 도로나 배수로 등 비효율적인 것이 많았다. 그걸 새로 계획하려다 보니 회의는 부지기수였고, 하루에 세 시간도 못 잘 때가 많았다.
그래도, 그녀는 항상 계획을 지켰다. 그녀의 마지막 스케줄은, 바로 아이리를 보살펴 주는 것이었다.
“왔어?”
먼저 아이리를 지켜 주던 가티스가 리얀에게 물었다. 가티스는 아직 어렸지만 누구보다 성숙했다. 그는 더 이상 예지몽을 꾸지 않게 됐고, 그것이 정신적 안정을 되찾게 해 주었다.
“아이리는 어때?”
“평소처럼, 잘 자고 있지.”
리얀은 눈을 꼭 감은 아이리의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대체 이 아이는 어디를 항해하고 있는 것일까. 분명 자기가 아는 길은 아닐 것이다.
아이리가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리얀은 기도했다.
* * *
에퍼리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아이리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리얀을 굽어보고 있었다. 언제든 자신의 몸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에퍼리를 찾으려고 했다. 걷고, 걷고, 계속 걸었다. 날아다닐 수 있었지만 날아다니지도 않았다. 에퍼리를 놓칠 수도 있었기에.
오랜 여행이었다. 신기하게도 유령 상태인데도 배가 고팠고, 졸리기도 했다. 물론 자기를 위협하는 건 없었지만.
세계는 생각한 것보다 넓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걸었음에도 아직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구도자의 길을 걷는 것 같았다. 지겹게만 느껴졌던 걸음걸이였지만 한계를 뛰어넘자 하나하나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육체는 없었지만 즐거운 삶이었다. 그녀의 영혼은 자유로웠다. 늘 행복을 품고 살았다. 아무하고도 말하지 못했지만 늘 수다를 떨고 난 후의 기분이었다.
왜일까. 에퍼리가 옆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어느 곳을 가도 행복했다. 그녀는 그걸 느낀 이후로 혼잣말이 늘었다.
“이것 봐. 풀잎에 이슬이 맺혔어.”
“해를 자세히 보니까 너무 아름답다.”
그녀의 세상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피하게 되었다. 그녀의 마음을 울리는 건 인간이 아닌 자연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끌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그러면서도 목적을 놓지 않았다. 에퍼리를 찾는다는 목적. 그녀는 세계의 전부를 돌아다녔다. 고꾸라질 걱정이 없으니 아무도 가지 않는 산길을 뒤질 수 있었고, 물에 젖어도 말리지 않아도 되니 폭포 뒤의 동굴을 찾아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자연에는 간섭할 수 있었다. 자연이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사람들 모두가 땅을 딛고 있었으니까. 자연은 거부하는 방법을 모른다.
“이렇게 터 주면 물이 고이지 않을 거야.”
그녀는 돌아다니면서 고인 물들을 물줄기와 연결해 주고 마른 땅에 대기도 했다. 가끔 자연 속에서도 단절이 있었다. 바람이 들지 않는 곳이라거나, 불의 따뜻함이 미치지 않는 곳, 물이 감싸지 않는 곳. 그녀들은 퍼즐을 조립하듯 하나씩 그것들을 연결했다.
새삼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본능이 자연에게 말을 걸라고 시키고 있었다. 그녀는 부정하지 않고 너른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유 같은 건 필요 없었고, 논리도 필요 없었다. 그저 그녀는 마음 가는 대로 움직였다. 자유로운 영혼 상태는 그걸 가능하게 했다.
“이봐.”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리가 전 세계의 곳곳에 발걸음을 찍었을 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는 그때, 어떤 목소리가 아이리를 불렀다.
“대체 뭐 하는 거야?”
“누구세요?”
“그건 알 거 없어. 왜 아직도 남아 있지?”
그는 처음부터 불합리한 질문을 했다. 그건 남자 목소리 같기도 했고 여자 목소리 같기도 했으며, 어린 목소리 같기도 했고 늙은 목소리 같기도 했다.
목소리의 신기함을 떠나서 내용이 자신의 의지를 부정하는 말이었기에 아이리는 살짝 마음이 상했다.
“제가 남아 있고 싶어서인데요.”
“그게 이해가 안 되는 거야. 미친 것 같지는 않은데. 원래 사람이 관계가 끊기면 미치기 마련이거든. 넌 슬슬 굴레를 벗어나고 있어.”
그는 경고하는 말투로 아이리에게 말했다. 아이리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을 붙였다.
“지금 너에게 일어난 변화를 모른다는 말이야? 지금 네 몸을 느껴 봐.”
아이리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지금 자신이 대화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른다.
그제야 아이리는 자신의 몸을 둘러보았다. 마치 유리로 되어 있는 듯 자신의 안은 이 세상의 모든 걸 비추고 있었고, 몸의 형태만 갖춘 윤곽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왜 이렇게 된 거지?”
“너는 지금 우리와 동류가 됐어. 어떻게 됐는지는 나도 모르겠는걸, 워낙 관심이 없어서.”
그것은 전혀 긴장이 떨어지지 않는 말투로 말했다. 아이리 역시 긴장을 느끼지 않았다.
“뭐가 잘못됐어요?”
“잘못된 건 아니지. 근데 처음 보는 사례라서. 너는 지금 법칙이 어긋났어. 물론 난 이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 세상에 잘못된 건 없으니까. 만약 네가 우리가 된다면 그 역시 섭리일 뿐이야.”
그것은 아이리가 아무리 들어도 모를 말만 했다. 골똘하게 생각하고 있자 그것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세상에서 궁금한 게 없었는데, 너 때문에 궁금해졌어. 아마도 너의 존재가 나한테 문제를 일으키는 모양이야.”
그들은 모르겠지만, 지금 세상은 이상한 현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이리가 자연과 동화된 순간 자연이 생전 없었던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것이 갖가지 법칙을 거스르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폭포가 위로 오르거나, 나무가 밑으로 자라거나, 돌이 스스로 굴러다니거나 하는 식이었다. 아이리와 대화하는 존재, 자연은 그것이 굉장히 안 좋다고 판단했다.
“빨리 말해 줘. 네가 여기 온 이유는 뭐지? 내 궁금증을 해결해야 내가 안정을 되찾을 것 같아.”
“한 사람을 찾으려고 왔어요.”
아이리는 당연하게 대답했다. 자연은 골똘하게 생각했다. 공중에 뜬 풀잎이 골머리를 썩이듯 원을 그리며 핑핑 돌았다. 그리고 깨달았다는 듯 그 풀잎은 꽃 모양이 되었다.
“아, 너랑 붙어 다녔던 그 사람. 음, 그건 놀라운 일이네.”
“뭐가요?”
“사람이 그렇게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사람을 쫓아다닐 수 있다니. 원래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 하거든. 근데 넌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행동하잖아.”
“상관없어요. 일단 제가 찾고 싶은 건 그 사람이니까.”
자연은 평생에 처음 감정이라는 걸 느꼈다. 사람이 물에 휩쓸려 내려가 비명을 지를 때도, 산에서 실족을 해 떨어져도, 불에 타 죽어도 모두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자연이다. 하나, 이 여자는 지금 자신에게 애석함이라는 감정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것참 안타깝구나. 그 사람은 이미 떠나 버렸어. 모든 걸 통달해 버렸지. 지금쯤 어디 우주의 구석에서 잠이나 자고 있을 것 같은데. 자연재해 같은 게 일어나면 잠깐 눈이나 뜰까.”
“아니요. 그는 절 만나면 깨어날 거예요. 분명히 알고 있어요.”
“내가 모르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자연은 비하의 의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하지만 아이리는 확신했다. 그녀가 믿고 있는 걸 에퍼리도 믿고 있고, 그 반대도 성립됐다. 이미 에퍼리와 자신은 일심동체였다. 그건 아이리의 마음에서 제일로 우선하는 법칙이었다.
자연은 생경한 감정에 시달렸다. 이제는 애석함에 호기심까지 들었다. 그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풀, 물, 불, 바람, 흙 등이 아이리 앞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것은 하늘까지 닿은 계단이 되었다. 아이리는 계단 끝을 보자 직감적으로 느꼈다. 저기, 에퍼리가 있다고.
“고마워요.”
“아니, 내가 궁금해서 그러는 거야.”
자연은 그렇게 말하고 아이리의 곁에서 하나의 홀씨가 되어 옷자락에 붙었다. 아이리는 계단을 한 칸 올랐다. 까마득한 계단이었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 * *
무언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 내 의식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어서, 날 찾아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런데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난 상념을 마치고 계단 아래를 바라보았다.
계단은 뜬금없이 내게로 이어져 있었고, 그 주위는 나뭇가지가 섞인 태풍으로 가득해 볼 수가 없었다.
“…얘가 미쳤나.”
자연은 감정이 없다지만, 난 자연의 상위 존재가 됨으로써 그들이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들도 자신들을 너무 해치면 분노하기 마련이었다.
산을 깎고 골프장을 마련하면 산사태를 내린다거나, 자연에 유해되는 물질을 쓰면 해일을 일으킨다거나… 가끔 그런 이상행동을 보여 주기는 하지만 자연은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누군가가 다가온다. 난 본능적인 불안함을 느꼈다. 이 존재가 된 다음에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다. 내 존재는 완전해서 흔들릴 일이 없었다. 불안의 요소가 없는데 어째서 불안하다는 말인가.
나는 계단의 끝에 선 은색 머리카락을 보고 그 불안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대체 인간 같은 불안정한 존재가 어떻게 이 세계에 침입할 수 있는지.
“데리러 왔어.”
아이리는 한쪽 손을 허리에 올리고 말했다. 난 먼저 그녀를 앉혔다.
“어떻게 왔어?”
“널 데리러 왔다니까.”
아이리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미안했지만, 내게 입력된 답변을 했다.
“난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해.”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
내가 말해도 아이리는 단호했다. 아이리가 내 손을 잡았는데, 신기하게도 잡혔다. 난 절대 잡히지 않을 줄 알았는데. 원래라면 아이리가 날 잡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지금은 너보다 힘이 셀걸? 난 그렇게 믿고 있거든. 내가 그렇게 믿는다면 너도 그렇게 믿게 되어 있어. 그건 우리의 약속이니까.”
그녀는 날 끌어당겼다. 난 그녀의 옷에 붙은 홀씨의 정체를 알아냈다.
“야, 이게 가능한 거야?”
“불가능하지. 여기는 우주잖아. 원래라면 사람이 숨을 쉬지도 못한다고.”
세계의 이성과 본체를 담당하고 있는 자연과 나는 이 사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날 잡아끌었다. 그녀의 믿음이 내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무엇에 대한 믿음일지…….
그나저나, 나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마지막에, 인간에서 벗어났을 때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아이리가 행하는 건 법칙에서 어긋나는 일이었기에 나는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리와 나 사이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왜곡이라 함은 서로의 힘이 비등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아이리가 대체 나보다 강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 왜곡된 공간 속으로, 아이리가 들어왔다. 그건 위험했다. 이 공간으로 들어가면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가 구겨져 버리고 마니까.
하나, 아이리는 자연스럽게 그 공간에서 나와 내 앞에 밀착해서 섰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게 입을 맞추었고, 그녀는 내 안의 무언가를 확실히 움직였다. 그건 대개 불필요한 흔적기관들이었다. 감정 장치, 육체, 영혼…….
나는 순간적으로 아이리와 동화가 되어 그녀가 믿는 걸 믿게 됐다. 그녀가 말하는 건 일종의 최면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우리 모두를 압도하는 근원은 사랑에 대한 믿음이었다.
사랑은 가장 인간다운 감정이었고, 난 그걸 다시 자각한 순간 우주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계단이 사라지고, 내가 딛는 별이 나를 거부한다. 우리는 서로를 안고 세계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