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이 갑이다-7화 (7/341)

# 7

레벨이 갑이다

7화

문을 열고 들어가니 ‘ㄷ’자로 된 바가 있었고, 테이블은 10개가 있었다.

작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크지도 않은 술집에, 홀로 커다란 잔을 붙잡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구석 자리에 있었는데, 누가 페른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페른 경비대원님이십니까?”

“내가 페른인데, 무슨 일이죠?”

술이 센 건지 술을 많이 마신 게 아닌 건지, 목소리는 멀쩡했다.

하지만 경계의 눈빛을 하고 이서우를 바라보았다.

“한스 노인이 보내셨습니다.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한스 님이요?”

“네.”

“한스 님이 보낸 거라면 자격이 있지요. 앉으세요.”

한스 노인의 이름이 나오자 그제야 굳은 표정을 푸는 페른이었다.

이서우가 앉자 페른은 1리터 정도의 큰 잔에 담긴 맥주를 단숨에 비웠다.

“한스 님이 보내셨다면 일전에 부탁한 일 때문이겠군요.”

“무슨 일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한스 님이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그냥 페른 경비대원님을 찾아가라고만 하더군요.”

“훗, 경비대원이라…….”

페른은 피식 웃고는 맥주를 시켰다.

이번에도 같은 크기의 잔이었는데, 역시나 쉬지 않고 순식간에 잔을 비웠다.

‘경비대원이 대낮에 술을 마시는 걸 보면 뭔가 있군.’

경비대원으로 정상적인 업무를 하고 있다면 결코 대낮에 이처럼 술을 마실 수 없다.

쉬는 날이라면 모르지만, 단정치 못한 외모를 보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는데, 이미 가망이 없는 일이라 시간만 낭비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그래도 한스 님께서 저를 보낸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이야기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고개를 떨구고 있던 페른이 이서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당당한 말투. 자신감 넘치는 눈빛.

페른이 그토록 바라던 것이었다.

“뭐, 좋습니다. 한스 님의 얼굴을 봐서라도 이야기는 해 드리지요.”

페른은 경비대원으로 열심히 일했다.

마을 근처까지 다가오는 맹수나 몬스터를 상대할 때도 누구보다 앞장섰다.

노력을 인정받아 조장에 올랐고, 서열이 꽤 높은 축에 속했다.

하지만 몬스터와 싸우던 중 그만 사고가 나고 말았다.

십자인대가 심각하게 파열되면서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절뚝거리면서는 마을을 보호하는 일을 할 수 없어, 결국 페른은 경비대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16세부터 20년 이상을 해 온 일이고, 천직이라고 여기고 있었기에 상실감이 컸다.

백방으로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던 중 한 가지 가능성을 찾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한스 노인에게 부탁을 했을까.

“백호의 뼈만 있으면 완치가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압니다, 제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걸. 저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그분은 할 수 있습니다. 마을 의원들이 포기한 사람들을 여럿 고쳤으니까요.”

“그분이라고요?”

“네. 최근 우리 마을에 명의가 오셨거든요.”

“그렇군요.”

이서우는 고개만 끄덕이고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페른이 다소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백호 따위를 잡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시군요. 하긴, 모험가들은 전부 던전만 가려고 하니…….”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경비대원 페른이 당신에게 간절히 부탁합니다.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페른은 간절한 눈빛으로 이서우를 바라보았다.

돈으로 사고 싶어도 너무 비싼 값에, 벙어리 냉가슴 앓듯 구경만 해야 했다.

박봉인 경비대원이 무슨 돈이 있어 사겠으며, 다리가 고장 나서 일도 할 수 없는데 어디서 돈을 빌릴까.

그런 상황에서 이서우가 나타났다.

그러니 그가 기대감을 갖게 되는 건 너무도 당연했다.

“백호의 뼈만 있으면 됩니까?”

“네! 백호의 머리뼈와 등뼈, 다리뼈만 있으면 됩니다.”

“좋습니다. 제가 구해 드리겠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네.”

“정말 감사합니다!”

페른은 벌떡 일어나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서우는 그의 숙인 허리를 바로 세우며 퀘스트를 확인했다.

치료에 필요한 재료를 구하라

페른은 죽는 순간까지 경비대원을 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다. 태어나고 자란 이 마을을 자신의 손으로 지키고 싶은 것이다.

그런 그의 염원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백호의 뼈가 필요하다.

난이도 : C

필요 아이템 : 백호의 머리뼈, 백호의 등뼈, 백호의 다리뼈.

성공 시 보상 : 1레벨 경험치, 5골드.

실패 시 : 3레벨 다운.

‘보상이 썩 좋지는 않지만 정상적인 퀘스트가 아닌 상황에서 이어지는 것이니 나중에 또 다른 NPC와 연결될지도 모를 일이야.’

이서우는 눈에 보이는 이득이 아니라 상황에 집중했다.

남들이 받지 못한 퀘스트와 연결되는 것이니 기대가 되는 것이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이서우가 술집을 나가는 동안에도 페른은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사람이다.

결과가 어떻든, 자신의 아픔을 알고 돕기를 자청했다는 것만으로도 페른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페른과의 친밀도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술집을 빠져나온 이서우는 복잡한 광장으로 가지 않고 이정표를 보고 다른 길로 갔다.

꽤나 긴 거리라, 시간을 아끼기 위해 가는 길에 캐릭터 정보를 확인했다.

‘생명력과 스텟이 꽤 올랐네. 보너스 스텟은 일단 사냥을 해 보고 올릴지 말지 결정하자.’

게임을 어떻게 진행할지 대충 정리하는 사이 어느새 입구에 다다랐다.

마을 초입 부분은 비선공 몬스터들이 있어 여유롭게 이동했다.

‘짜식들, 참 좋을 때다.’

토끼와 사슴을 잡는 유저들을 보며 미소를 짓고는 빠르게 지나쳤다.

늑대 지역까지 유유히 빠져나가자 다양한 뱀들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백호가 몇 레벨인지도 안 물어봤네.’

워낙 자신감에 충만해 있어서인지 동물형 몬스터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 생긴 일이었다.

박민수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괜히 방해하는 것이 싫어 조금 더 가 보자는 생각에 길을 재촉했다.

곰, 사자, 호랑이까지 지나치자 그제야 백호 지역이 나왔다.

“그래도 사람은 꽤 있네.”

백호 퀘스트가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스 노인에게서 마을 안내 퀘스트를 받아 진행하다 보면 토끼부터 순서대로 퀘스트가 주어진다.

백호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드롭 확률이 높은 간단한 퀘스트여서, 오랫동안 이곳에서 사냥하는 유저는 없었다.

단지 새로운 사람들이 많이 유입돼서 많아 보이는 것뿐이었다.

“어떤 자리가 좋을까나.”

이서우는 사람들이 많은 자리를 피하면서 유심히 살폈다.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사람들의 숫자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적당한 곳을 찾았다고 생각했을 때쯤,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렸다.

‘꼴에 남자들이라고 잘난 척하기는.’

이서우는 멀리서 들리는 대화 소리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영아, 이 오빠가 싹 쓸어서 잡아 줄 테니까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오빠, 얘들 25레벨도 있는데 정말 괜찮겠어?”

“걱정 마. 이래 봬도 희귀 템이야.”

“야, 아영이 앞이라고 잘난 척하지 말고 찌그러져 있어. 괜히 그러다 뒈지지 말고.”

“뭐?”

“레벨 차가 있는데 희귀 템이 대수냐.”

“그러는 넌 희귀 템 중에서도 옵션이 최하급인 주제에. 그럼 네가 나서 보든지.”

“뭐? 너 지금 말 다 했냐?”

“거참, 둘 다 그만해. 오늘은 아영이 밀어주러 왔잖아. 다 같이 몰아서 사냥하면 되지.”

남자 셋과 여자 하나가 있었는데, 이제 갓 대학생이 된 듯 앳된 얼굴들이었다.

티격태격하던 남자 둘을, 차분한 성격으로 보이는 사내가 나서서 중재했다.

이서우는 딱 봐도 3명의 남자가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잘났다고 떠들어 대는 광경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할 일이 없어서 여기까지 와서 여자를 꼬시나, 쯧쯧쯧.’

이서우는 남자 셋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갔다.

하지만 백호 구역은 그리 넓지 않아 그들과 멀리 떨어지는 것이 불가능했다.

“야, 너 자꾸 애드Add 낼래? 가까이 다가오면 도발만 넣으라니까!”

“내가 대검을 산 이유가 뭔데.”

“그러게 누가 탱커가 대검을 쓰래.”

“남자가 못 먹어도 공격이지.”

“지랄하네. 공격 스킬도 몇 개 없는 주제에 큰소리는. 그리고 그럴 것 같으면 딜러를 하지 탱커는 왜 하냐?”

“남자는 몸빵이 좋아야지. 갑바가 있지, 뒤에서 소심하게 공격하는 건 성격에 안 맞아.”

“말이나 못하면.”

“시끄럽고. 몇 마리 더 몰아.”

“5마리가 한계야. 일단 잡기나 해.”

“탱커는 나야. 어디서 자꾸 명령질이야?”

“대검 든 놈은 탱커 아니거든!”

“둘 다 닥치고 사냥에나 집중해!”

과묵하게 공격만 하고 있던 사내가 화가 났는지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다른 두 사람도 중얼거리더니 사냥에 집중했다.

‘오래 사냥해 봐야 못 볼 꼴만 볼 테니 몰이사냥 하고 얼른 빠지자.’

시끄러운 소리를 듣기 싫어서라도 빨리 사냥을 끝내고 가고 싶었다.

이서우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백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이미 동물형 몬스터는 지겹도록 사냥을 했다.

망설일 이유도 없고, 두려워할 이유는 더욱 없었다.

이서우가 다가가자, 백호는 ‘넌 뭐냐?’라는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송곳니를 드러냈다.

꺼지지 않으면 잡아먹어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이서우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자 백호는 ‘크헝!’ 하고 짧게 포효하며 앞발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난 백호의 앞발이 마치 양손으로 따귀를 때리듯 번개처럼 움직였다.

호랑이의 앞발 공격은 무시무시하기로 유명하다.

그런 공격을 굳이 방어할 이유는 없어 이서우는 회피를 선택했다.

움직임이 눈에 보이니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앞발에서 생성된 풍압이 예상보다 강해 이서우의 얼굴에 와서 닿았다.

‘힘은 확실히 끝내주네.’

보통은 겁을 낼 텐데, 이서우는 맞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음 동작은 이서우가 빨랐다.

앞발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점프를 해서 목을 물어뜯으려던 백호는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 이서우를 얼른 찾았다.

푹!

좌우를 빠르게 훑는데, 이미 단검이 옆구리에 와서 박혔다.

흐어엉! 흐엉!

백호의 울음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급소를 찌르니 백호의 생명력이 반 이상 깎여 나갔다.

승기를 잡은 이서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급소만 찾아서 찔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서우는 거침없이 백호들 사이를 누비며 빠르게 1마리씩 정리해 나갔다.

아무리 많은 공격을 펼쳐도 1마리에 다섯 번이 최대였다.

물론 급소를 잘 찔러 일격에 쓰러뜨린 경우도 있었다.

6마리의 백호를 잡자 레벨 업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서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파티형으로 2~3마리씩 묶여 있는 백호들도 거침없이 사냥했다.

레벨 차는 비록 꽤 많이 났지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움직임과 노련미로 긴 싸움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전투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재생성 시간이 생각보다 기네.”

주변 일대에 백호의 씨가 말라 버려 불평을 토로하면서 혼잣말을 한 것인데,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바로, 한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열심히 사냥을 하던 무리였다.

그들은 사냥을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때 백호의 처절한 비명 소리를 들었고, 자신들이 겨우 잡았던 백호를 혼자서 싹쓸이하는 이서우를 보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이서우가 사냥하는 것을 지켜보는 내내 믿을 수 없다는 반응만 보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린 채였다.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저렇게 사냥을 할 수 있지?”

“그러게. 진짜 신들린 듯이 싸우네. 스파르타쿠스가 환생한 줄 알았다니까.”

“난 소름이 돋았다.”

“맞아. 나도 온몸에 전율이 일었어. 분명 랭커일 거야.”

“야, 잘 싸우는 건 인정하지만 어딜 랭커와 비교하냐? 그리고 랭커가 저렙 존에 오는 거 봤냐?”

“어, 본 사람 많아. 스트레스 푼다고 가끔씩 옷 다 벗고 오잖아. 정신 승리 하려는 거지.”

“그, 그러냐?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랭커와 비교하는 건 아니지. 장비를 다 벗어도 랭커는 랭커야.”

“야, 너희들 못 느꼈어?”

“뭐? 저렙치고는 잘 싸운다는 거?”

김정식의 질문에 최진수와 유준상은 느낄 게 뭐 딱히 있냐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김정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저 사람이 싸우는 동안 한 번도 애드를 낸 적이 없어.”

“뭐?”

“헉! 그러고 보니…….”

그제야 두 사내는 화들짝 놀랐다.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석고상이라도 된 듯 온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오빠, 저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거야?”

“그럼! 아무리 레벨이 높아도 선공 몹들은 일정 범위 안에서는 무조건 애드가 나게 되어 있어. 그런데 주도적으로 저렇게 빠른 속도로 처리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냐. 완전히 사냥터를 지배하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해!”

“그렇구나. 대단한 거였구나.”

“당연하지!”

사내들의 대화에 서아영이 끼어들었다.

게임을 흥미롭게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뭐가 그리 특별한가 싶었지만, 사냥터를 완전히 지배해야 가능하다는 말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서아영은 멀리 보이는 이서우를 바라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