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이 갑이다-8화 (8/341)

# 8

레벨이 갑이다

8화

“아영아? 아영아!”

불러도 대답이 없자 유준상이 얼른 서아영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빠, 비켜 봐.”

“너 지금 저 사람한테 가려고 그러지?”

“응. 왜?”

“왜라니. 괜히 가서 심기 건드려서 좋을 거 없어.”

“그냥 가서 인사나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뭘.”

“아영아, 준상이 말 들어.”

“오빠까지 왜 그래? 그냥 인사만 하려는 거라니까.”

서아영은 자신을 말리는 유준상과 김정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편안하게 캐릭터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줬기 때문에 참고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톡 쏘아붙이고는 등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김정식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잘 들어. 내가 볼 때 저 사람은 랭커가 확실해.”

“뭐? 오빠, 지금 내가 게임을 잘 모른다고 막 이야기하는 거지?”

“내가 방금 한 말은 다 흘려들었어? 선공 몹을 애드 안 내고 잡을 수 있는 저렙은 없어!”

선공 몬스터가 애드를 냈는지 안 냈는지, 서아영이 알 바 아니었다.

그게 대단한 일이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건 얻어야 하고, 호기심은 해결해야 하는 성격이어서 그에게 다가가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걸 방해하니 서아영은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김정식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나도 정식이랑 같은 생각이야. 랭커가 아니면 저런 식으로 못 싸워.”

“하지만 저 사람 착용한 장비가 허름하잖아. 랭커가 저런 모습이라고?”

서아영이 어떤 성격인지 잘 알기에 유준상도 심각한 얼굴로 김정식의 의견을 지지했다.

그때 최진수가 나섰다.

“야, 너희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아영이 말처럼 랭커가 저런 복장을 하고 백호 존에 온다고?”

최진수도 사실 랭커가 아닐까, 하는 의심은 했지만 서아영에게 잘 보일 기회라 판단하고 얼른 그녀를 거들고 나선 것이었다.

“쉿! 야, 너 소리 안 죽여? 그러다가 저 사람이 따지고 들면 어쩌려고 그래!”

“뭐, 오라고 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최진수의 목소리는 거짓말처럼 작아졌다.

평소였다면 유준상과 김진수가 합심해서 소심한 모습을 보이는 그를 실컷 몰아붙였겠지만, 지금은 이해한다는 듯 안쓰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가끔 랭커들이 장비 다 벗고 온다고.”

“알았으니까 오빠들은 그냥 여기 있어.”

“아영아, 랭커들은 사냥 방해하는 거 다들 싫어해. 잘못하면 PK당할지도 몰라.”

“PK?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모르는 소리. 랭커들 중 방해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

서아영은 PK를 당할 수도 있다는 말에 움찔했다.

하지만 얼굴에서는 여전히 호기심이 떠나지 않았다.

한편, 이서우는 사냥감이 언제 생성될지 몰라 자리를 이동하려다가 사내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목소리를 낮춘다고 했지만 너무 흥분한 나머지 자연스럽게 소리가 커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게 싫어서 몬스터가 있는 곳으로 가려는데, 자신에 대한 이야기여서 잠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 보았다.

‘랭커? 크큭, 헛다리 아주 제대로 짚네. 하긴, 랭커라도 전투 감각은 내가 앞서지.’

이서우는 서로 설전을 벌이며 겁을 집어먹었다가, 놀라기도 했다가,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멀리 몬스터가 재생성되는 것을 보고는 그곳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10여 마리를 잡았는데도 원하던 뼈가 나오지 않아 한시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서걱! 서걱!

빠르게 앞발의 힘줄을 끊고는 심장과 뒷목을 노리고 단검을 찔러 넣었다.

-백호를 처치했습니다.

-29,000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백호의 가죽을 획득했습니다.

-백호의 이빨을 획득했습니다.

“아무래도 사냥터를 옮겨야겠네.”

재생성이 너무 느려서 또다시 멈추고 말았다.

이서우는 잠시 캐릭터 창을 확인했다.

초반이어서 그런지 자꾸만 캐릭터 창을 확인하게 된다.

15레벨이 된 것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이서우는 캐릭터 창을 닫았다.

“저기, 실례합니다.”

몬스터가 모여 있는 곳으로 이동하려는데, 떨리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이서우를 보면서 감탄에 마지않던 사내들 중 하나였다.

“무슨 일이죠?”

“아, 죄송합니다. 사냥하시는 게 너무 대단하셔서 무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럽게 말하는 사람은 바로 최진수였다.

평소에도 허세가 심했던 그다.

그러다 보니 서아영이 이서우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말에 PK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큰소리를 쳤고, 지금의 상황이 된 것이다.

“용건이 뭔가요?”

“혹시 괜찮으시면 같이 파티 사냥을 할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제가 좀 바빠서요.”

이서우는 한가하게 필드에서 파티나 하고 있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1시간, 아니 30분만이라도 좀 부탁드립니다.”

몸을 반쯤 돌린 이서우는 사내의 애타는 요구에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가 랭커라는 건 아시죠?”

“헛! 여, 역시 랭커셨군요.”

이서우는 확실히 하지 않으면 계속 달라붙을 것 같아 사내들이 나누던 대화를 이용했다.

그러자 최진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감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대답이 되었겠죠?”

“네? 네, 그럼요. 방해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서우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앞을 최진수가 다시 막아섰다.

이서우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났다.

그 모습을 보았는지 최진수는 얼른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랭커를 만날 기회가 없어서 그런데, 사인 하나만 해 주십시오.”

“사인요?”

“네. 바쁘신 줄은 알지만 꼭 부탁드립니다.”

함부로 앞을 가로막아 한 소리 하려는데 사인펜까지 내밀자 이서우는 살짝 난감했다.

하지만 이서우는 그들이 나누던 대화를 떠올리고는 피식 웃으며 사인펜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사내가 내민 도톰한 가죽에 사인을 했다.

그것은 그가 과거 어나더 월드 클로즈 베타 테스터 시절 불리던 바로 그 별명이었다.

하지만 최진수는 사인을 보고 얼어 버리고 말았다.

전신戰神

이서우가 남긴 두 글자였다.

최진수가 정신을 차렸을 때쯤에는 이미 이서우는 사라지고 없었다.

최진수는 얼른 동료들에게 달려가 사인을 내밀며 자랑했다.

“야, 그런 건 진즉 말했어야지! 아오, 전신 님께 사인을 받을 수 있었는데.”

“오빠, 어떻게 오빠만 사인을 받을 수 있어. 너무해!”

“이번엔 네가 무조건 잘못했다. 한 달 동안 밥 쏴. 안 그러면 절대로 용서 못 해.”

세 사람의 공격에도 최진수는 희희낙락했다.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도 모른 채 멀리 떨어져 있는 백호 지역으로 간 이서우는 사냥을 이어 갔다.

쉽게 끝날 줄 알았던 백호 사냥은 이후로도 5시간이나 지속된 후에야 끝이 났다.

“더럽게 오래 걸리네. 나니까 이 정도지, 진짜 다른 유저들 같았으면 진즉 포기했다.”

이서우가 잡은 백호는 100마리가 넘었다.

왜 페른이 재료를 구하지 못했는지 십분 이해가 갔다.

이서우는 20레벨이 된 스텟 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연속 접속 제한 시간까지 풀로 게임을 진행해야 겨우 10레벨이 되는데, 이서우는 벌써 그 2배나 되는 레벨에 다다랐다.

이서우는 빵빵해진 인벤토리를 확인하며 기분 좋게 마을로 향했다.

술집으로 가니 낮과는 달리 사람들이 절반 정도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바에도 몇 명이 앉아 있어 약간 소란스러웠다.

한데, 페른이 보이지 않았다.

이서우는 주인에게 가서 페른에 대해 물었다.

주인은 그가 집에 있을 거라고 대답해 주었다.

‘하긴, 경비대원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니 저녁에는 오고 싶지 않겠지.’

이서우는 술집을 나와 주인이 일러 준 페른의 집으로 향했다.

이서우가 나타나면 반드시 집을 알려 주라는 신신당부에 어렵지 않게 페른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경비대원들이 마을을 안정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의식주 문제는 기본적으로 지원이 된다.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온전히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하지만 페른은 이제 더 이상 경비대원이 아니다.

다행히 오랜 세월을 마을을 위해 일했기에 허름하지만 10평 정도의 집은 주어졌다.

이서우는 마당도 전혀 없는 작은 주택의 문을 두드렸다. 초인종도 없어 손을 써야 했다.

인기척이 들렸다.

“모험가님께서 어떻게…….”

“원하는 걸 구해 왔으니 온 것이지요.”

“네?”

페른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너무 일찍 나타나서 혹시나 포기한 것은 아닌가, 염려스러웠는데 벌써 재료를 구했다니.

놀라는 페른의 앞에 이서우는 백호의 뼈들을 꺼내 놓았다.

“저, 정말 구해 오셨군요. 이렇게 빨리 구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페른은 이서우가 자신을 위해 더 노력했다고 여겼는지 감동이 철철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페른과의 친밀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5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저기, 바쁘시겠지만 제가 몸이 이 꼴이라 이 뼈를 의원님께 가져가기가 힘드네요. 도와주시겠습니까?”

백호의 뼈를 의원에게 전달하라

다리가 불편한 페른은 거대한 뼈를 혼자 다 들고 갈 수가 없다.

난이도 : -

완료 조건 : 백호 뼈를 의원에게 가져다주면 된다.

성공 시 보상 : 페른과 친밀도 소폭 상승.

보상을 확인한 이서우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페른 님, 아시다시피 저는 모험가의 일원입니다. 제 행동 하나하나가 모험가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지요. 한데, 제가 아무런 보상 없이 페른 님의 요청을 수락하면 어찌 될까요? 오랜 세월 경비대원으로 계셨으니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무, 물론입니다. 경비대장님께서도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경비대원을 대표한다는 생각으로 생활하라고요.”

“바로 그겁니다!”

“제가 큰 실례를 했습니다. 모험가님의 입장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네요.”

“아닙니다. 이해를 해 주셔서 제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당신의 말에 페른은 잊고 있던 경비대원의 자세에 대해 더욱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친밀도가 소폭 상승합니다.

“저기, 모험가님, 실례인 줄은 알지만 제가 가진 전 재산이 이것뿐입니다.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이니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는 없을까요?”

페른이 아주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며 말했다.

‘헐, 1브론즈? 완전 개털이네.’

이서우는 페른의 손바닥에 놓인 1브론즈를 보며 잠시 갈등했다.

‘쩝. 그래. 당장 퀘스트도 없고, 한 푼이 아쉬운 마당이니 받자.’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라고 하니 그도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비록 1브론즈라고 하지만 페른 님에게는 전 재산이라 하셨으니 옮겨 드리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모험가님!”

페른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서우는 백호의 뼈를 들었다.

운반을 해야 하는 퀘스트여서 인벤토리에 저장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탄탄한 육체와 근력까지 겸비되어 있어 수십 킬로그램 정도는 거뜬히 들 수 있었다.

“그럼 절 따라오십시오.”

“네.”

이서우는 페른과 보조를 맞춰 천천히 이동했다.

‘이런 곳도 있었나.’

마을을 전부 돌아다녀 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보았던 비교적 깔끔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길도, 주변 건물도 마치 1970년대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봤었는데 이렇게 생생한 모습으로 마주하니 느낌이 색달랐다.

“조금 많이 허름하죠?”

“오래된 곳인가 보군요.”

“네. 마을에서도 가장 오래된 곳이죠.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천천히 가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그럴 수는 없죠.”

이서우를 배려하는 것도 있지만 다리가 나을 수 있다는 희망에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이제 다 왔습니다.”

“이곳입니까?”

“네. 비록 허름해 보이지만, 못 고치는 병이 없는 명의께서 운영하시는 의원입니다.”

“그렇군요. 재료는 여기 두면 되겠습니까?”

“네, 모험가님.”

이서우는 판자를 덧대어 지어 놓은 듯 허술한 집을 바라보며 백호 뼈를 내려놓았다.

-퀘스트 ‘백호의 뼈를 의원에게 전달하라’를 완료하셨습니다.

-1브론즈를 획득하셨습니다.

-페른과의 친밀도가 소폭 상승했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모험가님, 잠시만요.”

“네?”

“제가 오면서 가만히 생각을 해 봤는데, 아무래도 제 마음이 편치 않아서…….”

페른이 주머니에서 반질반질한 돌멩이 하나를 꺼내서 이서우에게 내밀었다.

이서우는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페른을 바라보았다.

“부끄럽지만 더 이상 경비대원으로 일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겠다는 잘못된 결심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꿈을 포기할 수 없어 다시 발길을 돌리는데, 우연히 이 돌을 줍게 되었습니다. 다른 것과는 달라 보여서 가져온 것인데, 이거라도 받아 주십시오.”

“그러셨군요. 이제는 다리도 나을 수 있으니 힘내세요. 그리고 그 돌은 고맙게 받겠습니다.”

상대의 진심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어서 이서우는 페른이 건네는 돌을 받았다.

그때였다.

“의원님!”

“왔으면 들어올 것이지 왜 시끄럽게 문 앞에서 떠들고 그래?”

거의 무너져 가는 판잣집에서 6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노인이 나왔다.

키는 175센티미터 정도였고, 머리가 희끗했지만 강직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쟨 뭐냐?”

“아이고, 의원님, 저의 은인이십니다.”

“은인?”

“네. 말씀하신 백호 뼈를 구해 주신 분입니다.”

“그래?”

이서우는 초면에 반말을 하는 의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프로그램된 대로 움직이는 NPC이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로 했다.

하지만 의원은 이서우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젊은 놈이 성격이 뭐가 그리 급해? 어차피 나나 이놈은 이걸 들지도 못해. 가지고 안으로 들어와. 차도 한잔하고 가고.”

“…….”

돌아가려는데, 의원이 이서우를 붙잡았다.

이서우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NPC와 친분이 생기는 거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이지.’

의원이 안으로 들어가자 이서우는 옅은 미소를 짓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