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레벨이 갑이다
9화
외부와 마찬가지로 내부도 볼품이 없었다.
하지만 이서우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의원이 권한 의자에 몸을 맡겼다.
잠시 후, 의원이 차를 가져와 이서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백호의 뼈를 구해 왔다고?”
“그렇습니다만.”
“재밌는 녀석이구나.”
“의원님도 재밌는 분이시네요.”
“하하하하하!”
전혀 주눅 든 기색 없이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대답하는 이서우를 보며 의원은 호탕하게 웃었다.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하면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그에게 반감을 가졌다.
한데, 이서우는 오히려 태연한 모습을 보이니 흥미가 동하는 것이다.
이서우는 의원의 태도가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어나더 월드 시절에도 괴짜 노인들이 꽤 있었기에 금세 적응이 되었다.
“기력을 북돋워 주는 차다.”
“잘 마시겠습니다.”
의원의 말투가 처음보다는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래 봐야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서우는 노인의 태도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차분히 입으로 가져가자 상큼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활력차를 복용하셨습니다.
-30분 동안 근력 5, 체력 5가 증가합니다.
-버프나 다른 소모품 계열의 효과와 중복되지 않습니다.
‘향기가 심상치 않다 했더니 지속 효과가 있는 차였네. 이런 귀한 걸 아무렇지 않게 내놓을 정도면 꽤 능력은 있는 의원이라는 뜻인데.’
속마음과는 달리 이서우는 별다른 내색 없이 편안하게 차를 마셨다.
“마음에 드나 보구나.”
“괜찮은 차네요.”
“머리뼈와 등뼈는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용케 구해 왔구나.”
“조금 귀찮기는 했지만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말도 마십시오, 의원님. 부탁을 드린 지 5시간 만에 구해 오셨지 뭡니까? 전 모험가님이 포기하신 줄 알고 얼마나 놀랐다고요.”
“5시간 만에 구해 왔다고?”
“네, 의원님.”
겸손해하는 이서우의 대답에 페른이 나섰다.
자신이 한 일도 아닌데 자랑을 하고 싶은지 목소리까지 살짝 높아졌다.
페른의 말에 의원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서우를 바라보았다.
“차도 대접받았으니 전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
혹시라도 퀘스트와 연결되지 않을까 해서 살짝 노인을 떠본 것인데,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문을 나섰다.
그가 문을 나서는데, 경비대원으로 보이는 사내가 이서우의 옆을 스쳐 지나 의원으로 헐레벌떡 들어갔다.
경비대원의 뒷모습을 힐끗 본 이서우는 미련을 버리고 의원을 벗어났다.
‘그래, 친밀도를 대폭 올린 것으로 만족하자.’
이제 막 시작했으니 기회는 많다.
이서우는 결코 조급해하지 않았다.
급히 서두른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걸어 광장으로 향하던 이서우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래도 보상으로 받은 거니 확인은 해 봐야지.”
이서우는 페른에게 받은 돌을 꺼내 들었다.
매끈매끈한 돌
등급 : ?
아주 매끈한 돌이다. 가지고 있으면 왠지 행운이 올 것 같다.
“…….”
설명이 돌의 겉모습만큼이나 너무 깔끔해서 순간 할 말을 잃고 돌멩이를 쳐다보았다.
“뭐, 행운이 올 것 같다고 하니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어.”
이서우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돌멩이를 다시 넣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모험가님!”
던전을 가야 하나, 아니면 필드에서 더 강한 몬스터를 조금 더 사냥해야 하나를 놓고 고민하는데,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서우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은 조금 전에 의원으로 들어가던 경비대원 같은데.’
이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면식도 없는데 왜 자신을 부르는 것일까.
“무슨 일이시죠?”
“바쁘신데 붙잡아서 죄송합니다.”
경비대원이 다가오자 이서우는 바로 용건을 물었다.
그의 약간은 사무적인 말투에 경비대원은 미안한지 고개를 숙였다.
상대가 예의를 갖추니 이서우도 얼굴이 살짝 풀렸다.
“급히 달려오신 듯한데, 무슨 일인지 편안하게 말씀해 주세요.”
“아, 네. 고맙습니다.”
이서우의 걸음이 워낙 빨라, 전력으로 달려온 경비대원은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뗐다.
“전 페른의 오랜 친구 테루라고 합니다. 조금 전 페른의 치료제에 필요한 재료를 가져다주셨다고요?”
“제가 구해 드린 게 맞습니다.”
“상당히 빠른 시간에 그 귀한 재료를 구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가요?”
“그럼요. 그 구하기 힘들 재료를 5시간 만에 구해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당히 놀랐습니다.”
“제게 하고 싶은 말이 그건가요?”
“아닙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저를 좀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진지한 테루의 말에 이서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결코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협상에서 가장 최하책은 바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할 것 같군요.”
“당연히 그러셔야죠. 사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최근 제1 묘지 근처에서 식시귀들이 날뛰고 있습니다. 애초에 싹을 잘라 놨어야 했는데, 여러 일들이 겹치는 바람에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상황이 심각해지기 전에 대대적인 토벌을 해야겠다는 총경비대장님의 의지로 토벌 준비를 위해 의원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페른이 나을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고, 모험가님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토벌대에 참여했으면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바로 그렇습니다.”
경비대는 항상 부상을 달고 사는 운명을 지녔기에 각종 약들이 많이 구비되어 있다.
하지만 토벌대가 꾸려지면 평소보다 더 많은 약을 필요로 하기에 넉넉한 준비는 필수였다.
그래서 의원을 찾은 것인데, 페른에게서 이서우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충원이 되어야 하지만, 신뢰가 기본 바탕이 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서우는 페른의 신뢰를 받고 있는 데다가 능력까지 뛰어나니 테루로서도 놓칠 수가 없는 인재였다.
“부탁드립니다. 저희를 꼭 좀 도와주십시오.”
-테루가 당신에게 간절함을 담아 호소합니다.
“제가 해야 될 일이 정확히 뭔가요?”
“고, 고맙습니다!”
혹시라도 이서우에게 거절을 당할까 노심초사하던 테루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테루는 이서우가 뭘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을 했다.
식시귀를 토벌하라
마을 남쪽 제1 묘지터에 식시귀가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고 묘지까지 파헤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경비대는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토벌대를 구성했다.
난이도 : C
완료 조건 : 최소 10마리의 식시귀를 처치해야 한다.
성공 시 보상 : 2레벨 경험치, 20골드, 하급 강화석 1개.
실패 시 : 3레벨 다운, 경비대원들과의 친밀도 하락.
*완료 조건보다 더 많은 식시귀를 처치할수록 보상은 높아진다.
“출발은 언젠가요?”
“새벽 2시쯤에 가장 활발히 움직이기 때문에 자정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아직 4시간 정도가 남았네요.”
“네. 준비하실 것도 있을 테니, 천천히 준비하시고 남문으로 오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이서우는 테루와 헤어지고 물약을 비롯해 전투에 필요한 몇 가지 소모품을 구입했다.
몬스터에게서 드롭되는 물약은 성능이 좋지 않기 때문에 제작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필요했다.
식시귀에 대해 알기 때문에 굳이 사지 않아도 되지만 만약을 대비한 조치였다.
정비를 꼼꼼히 하고 인벤토리까지 정리했는데도 아직 3시간 이상이 남았다.
-바쁘냐?
-지금 마을인데, 왜?
-종명이가 접속 방으로 오겠다던데?
-종명이가?
-어. 내가 너랑 뉴 월드 접속한다고 말했거든. 그놈 일이 많아서 못 올 줄 알고 너한테는 그냥 말 안 했는데, 지금 온다고 하더라고. 아마 곧 도착하지 싶은데.
-그래? 그럼 잠시 종료해야겠네.
-나도 지금 종료할게.
-그래, 그럼 나가서 보자.
박민수와 류종명은 이서우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런 친구가 온다는데 얼굴을 비치는 건 당연했다.
이서우는 마을에 캐릭터를 세워 두고 접속을 종료했다.
“레벨은 좀 올렸냐?”
“조금만 기다리라니까 그러네.”
“이 형님을 따라오려면 100년은 이르다.”
“나중에 울면서 ‘형님, 아이템 하나만 주십쇼.’라고 하지나 마라.”
“그런 날은 안 올 테니 걱정 마.”
박민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류종명이 들어왔다.
“왔냐.”
“몸은 좀 괜찮아?”
“당연하지. 재활 훈련 잘하고 있으니 곧 멀쩡해지지 싶다. 저녁은?”
“당연히 먹고 왔지.”
류종명은 이서우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결코 동정의 마음은 품지 않았다. 그것이 친구에 대한 배려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서우는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차나 한잔하고 접속하자.”
“그러자. 나도 던전 한 탐 더 뛰고 왔더니 힘들다. 넌 가서 자리 맡아 놓고 와.”
“알았어. 3시간이면 되지?”
“너 괜찮겠어?”
“12시 안에는 들어갈 수 있으니 상관없어.”
“그래. 그럼 3시간 끊어.”
류종명이 자리를 잡으러 간 사이 이서우와 박민수는 휴게실에 자리를 잡고 음료를 시켰다.
테이블 자체에 터치스크린이 있어 주문은 어렵지 않았다.
음료가 나오는 시간도 짧아, 류종명이 들어올 때 마실 것도 같이 나왔다.
“일은 좀 할 만해?”
“성과가 잘 안 나오니 영 재미가 없다.”
“엄살은. 쟤 아마 올해 성과급 엄청 받을걸.”
“그래?”
“야, 너도 마찬가지잖아.”
박민수와 류종명은 젊지만 능력이 있어 회사에서 상당히 인정을 받고 있었다.
노력에 따라 어느 정도 대가를 얻을 수 있는 문화가 형성이 되어, 젊은 나이에 평균보다는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서우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가장 친한 친구들이니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그나저나 레벨은 좀 올렸어?”
“이 형님이 또 게임에는 일가견이 있잖냐. 벌써 21렙이시다.”
“헉! 뭐? 21렙?”
박민수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어떻게 게임 시간으로 30시간 만에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류종명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너 버그 같은 거 쓴 거 아니지? 아니지, 뉴 월드는 버그 따위는 없는데.”
“내가 사냥 센스는 좀 있잖아. 쉬지 않고 사냥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 그것보다 넌 몇 렙인데?”
“난 민수랑 같아. 일하다 보니 아무래도 쉽지 않다. 휴일에는 거의 둘이서 살다시피 하는데도 힘들어.”
그때, 휴게소 벽에 걸려 있는 스크린에서 귀를 쫑긋 세울 만한 영상이 흘러나왔다.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영원한 도우미 설아예요. 오늘은 여러 차례 여러분과 인사를 나누네요. 자주 봐서 좋다고요? 네, 저도 여러분과 같은 마음이라는 거, 꼭 알아주세요. 자, 제가 왜 다시 나타났는지 궁금하실 테니 빨리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지금 온라인에서는 난데없이 뜨거운 설전이 벌어지고 있답니다. 뉴 월드를 하는 유저분들이라면 잘 아시겠죠, 공식 랭킹 1위가 누군지를요.
접속 방의 TV는 게임 채널에 고정되어 있다.
주로 그날 있었던 던전 공략이나 게임 정보에 대해 방송을 한다.
정보의 가격이 비싸지만, 시청자들이 워낙 많다 보니 방송사에서도 과감한 투자를 하는 추세다.
그중 유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채널은 N게임넷이다.
설아는 N게임넷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진행자였다.
“저거 생방송인가 본데?”
“그러게. 흔한 일은 아닌데. 전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던전이라도 공략했나 보네. 아니면 등급 높은 장비라도 얻었든지.”
“전신?”
“아, 서우 넌 아직 모르겠구나. 방송에서 자세히 말해 줄 것 같으니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 봐. 너도 뉴 월드를 하려면 전신 님에 대해서는 알아 두는 게 좋아.”
박민수는 묘한 미소를 짓고는 스크린으로 눈을 돌렸다.
진행자의 말이 이어졌다.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급히 정길동 님을 모셨답니다. 아마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겠지만, 공식 랭킹 50위로 뉴 월드에서 많은 활약을 하고 계신 분이시죠. 안녕하세요.
-네, 반갑습니다.
-시청자분들이 궁금해하시니 바로 물어볼게요. 정길동 님도 그 영상 보셨나요?
-네. 그렇지 않아도 오면서 재차 확인을 했습니다.
-시청자분들, 들으셨죠? 현재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동영상을 두 번이나 확인하고 오셨다네요. 자, 그럼 다들 궁금하실 텐데, 제가 바로 정길동 님에게 진위 여부를 여쭤볼게요. 정길동 님. 정말 그 영상에 나온 유저가 공식 랭킹 1위이신 전신 님이 맞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도 판단하기 애매하다는 겁니다.
-네? 정길동 님도 판단이 힘들다고요?
설아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 토끼 눈을 했다.
“전신 님의 영상이 떴나 보네. 쉽게 볼 수 있는 영상이 아닌데.”
“그러게. 근데,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힘들다는데?”
“이상하네. 전신 님은 딱 보면 다들 아는데. 랭킹 50위가 그걸 모를 리는 없고……. 대체 무슨 영상이지?”
“한번 찾아봐야겠네.”
박민수가 스마트 워치를 툭 건드리자 팔목 위로 9인치 정도의 홀로그램 화면이 떴다.
“야, 저기 화면 뜬다.”
“그래?”
N게임넷에 접속하려다 말고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한 사람이 사냥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초상권 때문에 허락받지 않은 동영상은 얼굴이 흐릿하게 나온다.
비록 얼굴은 확인이 안 되지만 영상을 보는 사람들은 그 움직임이 낯익다고 생각했다.
박민수와 류종명도 마찬가지였다.
“야, 저거 전신 님 맞는 것 같은데?”
“그러게. 저런 움직임을 보이는 유저는 전신 님이 거의 유일한데.”
“그래도 또 모르지. 레벨을 비공개로 해 둔 사람도 꽤 있으니까.”
“하긴, 그렇긴 하지. 한데, 왜 저렙 존에 있지?”
박민수의 말에 류종명도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거 나잖아?’
전투 영상에 나오는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백호들 사이를 누비며 사냥하는 사람이 누군지 이서우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서우는 어이없는 얼굴로 영상을 계속해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진행자들의 말이 이어졌다.
이서우는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려고 귀를 기울였다.
-정말 대단하네요! 제가 봐도 확실히 전신 님의 전투처럼 압도적이고 호쾌한데 왜 판단하기 힘들다는 거죠? 혹시, 저렙 존이라서 그런 건가요?
-네. 저도 움직임은 확실히 전신 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저런 저렙 존에 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간혹 머릿속이 복잡할 때, 초보 존에서 장비를 다 벗고 사냥하시는 랭커들도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전신 님도 딱 한 번이지만 그런 경우가 있지 않았나요?
-네. 저도 그 사건은 잘 알고 있습니다. 뱀파이어 로드 공략에 실패한 직후에 그러셨죠. 하지만 그때도 30대 레벨 몬스터 존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레벨이 더 높아졌는데 20대 중반 레벨 존에 간다? 전 아니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싶군요.
-정길동 님의 말씀도 충분히 이해가 가네요. 하지만 주변에 있던 유저가 전신 님의 사인까지 받았는데, 혹시 보셨나요?
-네. 저도 봤습니다. 제가 전신 님이 아니어서 잘 모르지만 급조된 사인이라는 게 한눈에도 보이더군요.
-그럼 정길동 님은 전신 님이 아니라고 보시는군요.
-정확한 건 전신 님이 직접 나타나셔야 알 수 있겠지만, 아닌 쪽에 무게를 두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여러 상황을 보면 확실히 아닌 것 같은데 워낙 전투 감각이 뛰어나서 혼란스럽다,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요?
-지금으로서는 그렇습니다.
-전신 님이 나서 주시면 다 해결될 텐데 아쉽네요.
-그분은 워낙 나서기를 싫어하시니 아마 힘들 겁니다. 저도 아직 직접 보지는 못했으니까요.
-그렇군요. 하지만 걱정이네요. 전신 님이 안 나서 주셔서 당분간은 이 문제로 시끄러울 것 같으니. 자, 전신 님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고, 정길동 님의 던전 공략 소식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할게요. 어머, 아쉽게도 광고 시간이네요. 뉴 월드를 사랑하는 유저 여러분, 그럼 1분 뒤에 만나요.
이서우는 광고 장면이 나오자 시선을 거두었다.
‘전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뉴 월드 내에도 있을 줄이야.’
이서우는 다행스럽다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살짝 나빴다.
오랜 세월을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던 것인데, 다른 사람이 쓰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전신에 대한 생각을 이어 가는데 박민수가 말을 걸어왔다.
“서우는 전신 님을 처음 보겠네?”
“전신이 아니라는 데 무게를 두는 것 같던데?”
“에이, 딱 봐도 전신이야. 전신 아니면 누가 저런 움직임을 보여. 대부분 스킬이나 능력치에 의존하지만 그나마 전신은 전투 능력이 뛰어나잖아. 그러니 전신 님이 맞아.”
“랭킹 1위가 할 일이 없어 저곳에 있겠어?”
“그렇긴 하지만 과거 이력도 있고, 사냥하는 스타일이 비슷해.”
박민수는 확신하듯 말했다.
전신이 등장하는 동영상이 많지 않지만 몇몇 영상들이 계속 반복해서 게임 채널이나 인터넷에서 재생이 된다.
보는 눈이 생긴다고, 자주 보다 보면 금세 유사성을 찾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나도 민수 말에 동의해. 아마 전신 님이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러셨을 거야. 저번에 인터뷰 보니 초심이 흐릿해지면 꼭 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게 아마 저렙 존에 가는 게 아닐까 싶어.”
“그래? 멋진 사람이네.”
“완전 쩔지. 뉴 월드 유저들의 우상이야, 우상.”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 그런 의미에서 사인받은 사람이 부럽네. 난 언제쯤 받아 보나.”
이서우는 들뜬 모습으로 말하는 친구들에게 차마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야, 시간 간다. 접속이나 하자.”
당사자를 앞에 두고 자꾸 칭찬을 하니 어색한지 화제를 돌렸다.
“서우, 너 아이디 뭔데?”
“나? 이서우.”
“본명이네. 친추해 둘게.”
“그래.”
휴게실을 나선 이서우와 친구들은 접속 베드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