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레벨이 갑이다
12화
식시귀 대왕에게 다가가자 먹물처럼 검은 꽃이 보였다.
꽃 위에는 연한 초록색으로 꽃의 이름이 떠 있었다.
‘죽음의 꽃? 채집물은 원래 없었던 것 같은데. 식시귀 대왕을 처치해야만 피는 꽃인가?’
미리 게임을 해 봤지만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해 볼 수는 없었다.
-‘죽음의 꽃’을 채집하시겠습니까?
이서우가 살짝 손을 갖다 대자 또다시 메시지가 떴다.
-죽음의 꽃을 획득하셨습니다.
채집 숙련도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올릴 수 있어 클로즈 베타 테스터 혜택을 잊고 있었는데, 죽음의 꽃을 보니 그제야 생각이 났다.
이서우는 죽음의 꽃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았다.
죽음의 꽃
등급 : 희귀
식시귀의 시체가 있는 곳에서 아주 짧은 시간만 꽃을 피운다.
일반 식시귀의 시체에서는 거의 볼 수 없고, 강화된 식시귀나 식시귀 대왕에서 낮은 확률로 나타난다.
죽음의 기운이 집약돼 있어 아주 강력한 독성을 띤다.
꽃 자체도 맹독을 품고 있지만, 정제하면 더욱더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다.
‘한마디로 독이네. 쉽게 얻어지는 건 아니니 일단은 가지고 있자.’
“모험가님, 괜찮으십니까?”
“네? 아, 네. 전 괜찮습니다.”
“휴우, 전 또 식시귀 대왕이 다시 살아났나 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험가님 덕분에 대원들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별말씀을요.”
이서우는 끝까지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토벌대 대장의 말이 끝나자 테루가 다가왔다.
“모험가님, 정말 대단했습니다! 별다른 피해 없이 홀로 식시귀 대왕을 죽이시다니.”
“후방이 든든해서 마음껏 싸울 수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모험가님 덕분에 우리가 안전하게 방어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테루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진심이 묻어나는 테루의 행동을 이서우는 묵묵히 받았다.
상대가 진정으로 고마워하는데 계속 아니라고만 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다.
“이것 참, 제가 깜빡했네요.”
-퀘스트 ‘식시귀를 토벌하라’를 완료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25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하급 강화석 1개를 획득하셨습니다.
-테루와의 친밀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다론 마을을 수호하는 경비대와의 친밀도가 전체적으로 상승합니다.
-명성이 100 상승했습니다.
메시지가 뜰 때마다 이서우의 표정이 환해졌다.
테루와의 대화가 끝나자 다시 토벌대 대장이 이서우에게 말을 걸었다.
“모험가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경비대에 들어오시지 않겠습니까? 조장의 위치는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조장은 최소 5년 이상의 경력이 있어야 오를 수 있는 위치로, 상당히 중책에 속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장의 지시를 받는 사람이 10명이나 된다.
한 사람의 말과 행동에 10명의 생명이 걸려 있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모험가입니다. 한곳에 묶여 있을 수 없는 운명이지요.”
“이런, 제가 너무 흥분해서 모험가님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했네요.”
토벌대 대장은 아차 하는 마음에 얼른 사과를 했다.
하지만 테루는 이서우를 붙잡고 싶은지 예의에 어긋날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대장님, 그러면 명예 대원은 어떨까요?”
“아! 그거 멋진 생각이야. 모험가님, 어떠신지요. 명예 대원은 매여 있지 않고 자유롭게 원하는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혹시 근처에 계시면 우리를 도와주셔도 되고요. 물론 보상은 제대로 할 생각입니다.”
“그게…….”
“아, 제가 깜빡했네요. 명예 대원만 되셔도 마을에 있는 모든 상점에서 물건을 30퍼센트 싸게 구입할 수 있습니다.”
“흠…….”
이서우가 다시 고사를 하려 하자 토벌대 대장이 얼른 나섰다.
거절하려던 이서우는 할인된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있다고 하자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했다.
10퍼센트라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겠지만, 30퍼센트는 엄청난 액수다.
비록 초보자 존이지만 물건을 사서 되팔기만 해도 앉아서 돈을 벌 수 있었다.
“모험가님만 사용할 수 있지만, 30퍼센트 할인된 가격이라면 꽤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군요.”
되팔아서 돈을 만들 생각에 들떠 있는데 눈치 없는 토벌대 대장 때문에 김이 팍 새고 말았다.
하지만 자기만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이득인 것은 분명했다.
한참 생각을 이어 가던 이서우는 결심을 내리고 입을 뗐다.
“자유를 침해받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어떤 방해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부탁에는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니 결코 모험가님이 손해 보실 일은 없으실 겁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받아들이겠습니다.”
“명예 대원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다론 마을의 명예 경비대원이 되셨습니다.
-다론 마을에 있는 모든 상점에서 30퍼센트 할인된 가격으로 물건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다론 마을 NPC로부터 받은 퀘스트를 완료하면 20퍼센트 더 많은 추가 보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유가 확실히 보장되면서 추가 혜택까지 얻을 수 있으니 나로서는 땡큐지.’
이서우는 토벌대 대장의 손을 맞잡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서우가 명예 대원이 되자 토벌대들이 그를 에워싼 채 축하의 메시지를 던졌다.
“모험가님,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그러죠.”
돌아가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몇몇 몬스터들이 덤벼들기도 했지만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중 절반은 이서우가 처리했다.
쉬면서 가도 될 텐데 열정적으로 사냥하는 그를 보며 경비대원들은 ‘역시!’라는 탄성을 터트리며 존경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경험치가 쏠쏠하단 말이야.’
마을에 도착하니 새벽 5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모험가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괜찮습니다. 언제든 의뢰를 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토벌대 대장은 힘주어 대답했다.
강한 사람이 1명만 있어도 피해는 현저하게 줄어든다.
제대로 된 대원을 키우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비싼 값을 지불하더라도 이서우에게 의뢰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테루와 헤어진 이서우는 캐릭터 창부터 살폈다.
돌아오는 길에도 몬스터와 전투를 펼친다고 짬을 내지 못했다.
이름 : 이서우
하이 레벨 : 29
칭호 : 다론 마을 명예 경비대원
*다론 마을에서 NPC들이 판매하는 모든 물건을 30퍼센트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다.
*다론 마을에서 받은 퀘스트를 완료하면 20퍼센트 상향된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명성 : 100
‘칭호랑 명성이 새로 생겼네.’
변화된 내용은 글자색이 달라 쉽게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어떤 상황에 처할지 모르니 보너스 스텟은 일단 그냥 두자.’
식시귀 대왕과의 싸움에서 보너스 스텟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기에 그대로 두었다.
“모험가님!”
캐릭터 창을 살피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페른이었다.
“치료는 어떡하고…….”
“1차 치료는 끝났습니다. 아직 두 번 더 남았지만 걷는 연습부터 꾸준히 해야 더 빨리 낫는다고 하셔서 마을을 돌아다니던 차에 토벌대가 복귀하는 것을 보고 온 것입니다.”
“그러셨군요. 치료가 잘됐다니 다행입니다. 빠른 쾌차하셔서 경비대원으로 복귀하시길 바랍니다.”
“꼭 그럴 겁니다. 완치되면 제가 술 한잔 쏘겠습니다.”
“기대하죠.”
이서우는 페른의 눈빛에서 희망을 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썩은 동태눈을 한 산송장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참, 한데 무슨 일로 절 찾으셨는지요?”
“아, 의원님이 한번 들르라고 하셨습니다.”
“의원님이요?”
“네. 언제든 괜찮으니 꼭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참, 토벌대에서 활약하신 일, 잘 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테루 님이 말했나 보군요.”
“네. 한데, 토벌대가 워낙 떠들어 놔서 아마 마을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겁니다.”
명성도 올랐고 NPC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빨리 퍼지기에, 10분이면 구석구석 소식이 전달되는 데 충분했다.
“이런, 눈치 없이 제가 모험가님의 시간을 방해했군요. 전 그럼 걷기 훈련을 마저 해야겠습니다. 꼭 의원님께 가 보세요.”
“네.”
이서우의 확답을 들은 페른은 미소가 사라지지 않은 얼굴로 활기차게 마을을 걸었다.
‘의원이라……. 무슨 일일까?’
언제든 오라고 했지만 새벽부터 찾아갈 수는 없었다.
-호크아이 님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민수가?’
이서우는 우편함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발신자 : 호크아이
수신자 : 이서우
내용 : 서우야, 나랑 종명이 던전에서 전멸했다. 접속 제한 페널티 걸렸는데, 넌 어떡할래? 종명이는 맥주나 한잔하러 가자던데.
‘잘됐네. 어차피 당장 의원에게 찾아갈 수도 없는 상황인데 오랜만에 녀석들과 시원한 맥주나 한잔 걸쳐야겠다.’
이서우는 마을에 캐릭터를 세워 두고 접속 종료를 했다.
“빨리 나왔네?”
“마침 퀘스트를 완료했거든. 근데 칠칠치 못하게 전멸이 뭐냐, 전멸이.”
“초반을 많이 즐겨 둬라. 너도 1차 전직 하면 몇 번 죽을 테니.”
“이 형님에게 죽음은 없다.”
“퍽이나. 일단 자리 옮기고 이야기하자.”
“그래.”
이서우는 추억이 담긴 호프집으로 갔다.
예전 모습이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었다.
대학생일 때 늘 붙어 다니던 세 사람은, 맥주를 마시며 과거로의 여행을 떠났다.
대부분 가상현실로 수업을 하니 학교를 갈 일이 자주 없었지만, 셋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났다.
그러니 아직은 젊은 나이임에도 추억이 꽤 많았다.
이야기가 한참 진행되어 뉴 월드에 이르렀다.
“참, 서우 너 장비 다시 보냈더라. 초반에는 현질 안 하면 장비 사는 것도 힘든데 그냥 쓰지.”
“20레벨 고급 장비로 구입했다.”
“뭐? 벌써?”
“헐, 무슨 돈이 있어서?”
박민수와 류종명은 하루 만에 20레벨 장비를 구입했다는 이서우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들은 10레벨 고급 장비를 맞추는 데도 몇 날 며칠이 걸렸다.
“퀘스트하다 보니 생기더라고.”
“레벨이 몇인데?”
“29밖에 안 돼.”
“뭐? 29레벨? 너 거짓말이지?”
“내가 비싼 밥 먹고 거짓말하게 생겼냐.”
“헐, 대박! 하루도 안 됐는데……. 사기 아냐?”
“그러게. 어떻게 벌써 29렙을 찍지?”
“내가 말했잖냐, 이 형님이 곧 너희들 레벨 따라잡는다고. 나 스샷 다 찍어 놨다.”
“…….”
큰소리를 친 두 사람은 갑자기 취기가 올라오는 듯했다.
이 속도라면 진짜 곧 따라잡힐지도 몰랐다.
“너 동영상 찍었어?”
“동영상?”
“그래. 네가 광렙한 과정을 찍어서 방송사에 팔아도 되거든. 아마 시청률 꽤 나올걸.”
“그런 것도 돈이 돼?”
“그럼. 뉴 월드는 남들이 못 한 걸 영상으로 찍으면 더 돈이 많이 돼. 1인 방송으로 틀어도 꽤 수입이 짭짤할걸.”
“괜히 다른 사람이 내 플레이를 본다는 게 찝찝해.”
“인기가 곧 돈이야. 쓸지 말지는 나중에 결정해도 되니 지금부터라도 꼬박꼬박 찍어 둬.”
이서우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동영상을 판매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 플레이를 남들이 보면 절대 안 되지, 암.’
괜히 몇 푼 벌려다가 관심을 받아 행동반경이 좁아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유명해지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기반을 다지는 게 우선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니 불은 다 꺼져 있었다.
친구와 저녁을 먹은 뒤 접속 방으로 가면서 전화를 했기에 부모님은 자고 있었다.
통화를 하면서 걱정 어린 목소리를 들었지만 뉴 월드에서 승부를 볼지 확실히 결정을 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서우는 안방을 잠시 바라보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편안한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