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레벨이 갑이다
13화
아침 일찍 일어난 이서우는 문안을 하러 안방으로 갔지만 이미 부모님은 일을 하러 나가고 없었다.
거실의 식탁보를 보고 설마 했는데 두 분 다 나갔을 줄이야.
식탁보를 들어 보니 이서우가 좋아하는 된장찌개와 계란말이, 막 담근 배추김치와 두부조림, 김이 잘 놓여 있었다.
이서우는 샤워를 하고 찌개를 데워 두 그릇이나 비웠다.
잘 먹는 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효도였다.
‘집 근처 접속 방에 가는 게 낫겠지?’
오가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는 가까운 곳이 나았다.
이서우는 마음을 굳게 먹고 집을 나섰다.
‘인벤에 있는 돈이 27골드, 장비까지 포함하면 100골드가 넘네. 레벨을 올리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어.’
1골드에 1만 원이다.
몇백 원 정도 오르락내리락하지만, 유입되는 유저가 워낙 많아 수요가 엄청났다.
수요가 많으면 가격은 올라가기 마련이지만 공급도 많아서 거의 한 달째 가격이 유지되고 있었다.
당장 쓸 수 있는 돈은 27골드지만 잠재적인 가치까지 따지면 이서우는 하루 만에 100만 원을 번 셈이다.
이제 막 게임을 시작한 유저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액수였다.
하지만 이서우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갚아야 할 빚만 억 단위다. 이자를 납부하는 것도 벅찬 상황이니 빨리 레벨을 올려서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집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접속 방이 있었다.
접속 베드를 구입할 돈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당분간 접속 방에 와야 했다.
동네 접속 방이라 허름할 거라 여겼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베드도 100개나 되었고, 고급형도 10개나 갖추고 있었다.
이서우는 점심시간을 고려해서 5시간 정액을 끊었다.
‘의원이 꼭 찾아오라 했다는 걸 보면 분명 퀘스트를 줄 생각인 것 같은데, 어떤 걸까?’
이서우는 한껏 기대감을 가지고 접속 베드에 누웠다.
늠름한 캐릭터가 이서우를 반겼다.
접속하자 포근한 태양이 그를 맞아 주었다.
‘오후 5시네. 바로 가도 되겠어.’
일부러 의원과 가까운 곳에서 접속을 종료했기에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왔으면 들어오지 뭘 그리 멀뚱히 서 있어.”
‘귀신같은 노인이네. 하여튼 평범한 의원은 절대 아냐.’
밖에 눈이 달린 것인지, 이서우가 온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다.
게다가 집 안에서 말을 하는 것인데도 바로 옆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이서우는 차분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커튼 뒤쪽에서 졸졸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서우가 왔다고 차를 준비하는 것이리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상쾌한 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차나 한잔해.”
“네.”
처음 방문 때와는 향이 달라 이번에는 어떤 부가 능력을 부여해 줄지 기대하며 한 모금 마셨다.
‘어라, 그냥 평범한 찬가.’
입안에서 잠시 머물러 있던 차가 식도를 통해 들어갔는데도 아무런 메시지가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찻잔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신선초 차를 복용하셨습니다.
-1시간 동안 모든 스텟이 20씩 증가합니다.
-1시간 동안 공격력과 방어력이 100씩 상승합니다.
-1시간 동안 1,000의 생명력이 증가합니다.
-1시간 동안 1,000의 마나가 증가합니다.
‘헉!’
갑자기 몸이 달아오르더니 힘이 불끈 솟아오르자 화들짝 놀랐는데, 그게 차 때문이었다니.
이서우는 놀란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욕심이 나나 보구나.”
“이런 걸 보고 욕심을 안 내면 사람이 아니겠죠.”
“솔직해서 좋구나.”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노인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마음이 편안한지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이 차를 만드는 데 50년이 걸렸다. 그 정도 시간을 투자할 마음이 있으면 가르쳐 주마.”
“네? 50년요?”
“이 정도 능력이 되는 차를 그럼 거저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단 말이냐.”
“물론 그건 아니지만…….”
차의 효과는 탁월했다. 아니, 가히 최고라고 할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이서우는 NPC 밑에서 50년 동안 차나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싫은 게로구나. 하긴, 모험가들은 한자리에 머물러 있지 못하는 존재들이지. 이해한다. 하지만 안타깝구나. 너라면 10년이면 충분히 이 차를 만들 수 있을 텐데.”
아쉬움에 잠긴 목소리였지만 이서우는 10년이 아니라 1년도 한곳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노인의 보조를 맞춰 주기 위해 되물었다.
“저라면 10년이라니,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넌 아마 모든 무기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걸 어떻게…….”
“오래 살다 보면 보이는 법이다. 어쨌든 모든 무기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직업이든 다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의미고, 모든 직업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뜻이지.”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군요.”
이서우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이 레벨이 모든 무기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모든 직업을 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의미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이서우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나의 직업을 마스터하는 데에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그 많은 직업을 어떻게 다 습득한단 말인가.
“회의적인가 보구나. 하지만 직접 전투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투에 필요한 물건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건 그렇죠. 자신에게 잘 맞는 도구만큼 힘이 되는 것은 없을 테니까요.”
“비단 장비만이 아니다. 장비를 더 강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나 말끔히 수리할 수 있는 기술, 전투력을 높여 주는 보조 수단, 회복에 필요한 약이 있으면 든든하겠지.”
“그러니까 전투를 보조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기술들을 익히라는 말씀이신가요?”
“그거야 네가 결정할 일이지. 난 그저 너의 재능이 아까워서 조언을 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젊은 녀석이 그래도 기본 예의는 갖추고 있구나.”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 같지만 노인이 칭찬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서우는 아직 생산 기술을 배울 생각은 없었다.
한 가지 생산 기술을 익히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직 레벨 업이 우선이었다.
“한데, 절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다.”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다시 차를 호로로 마시며 뜸을 들였다.
찻잔이 거의 빌 때쯤 노인이 말을 이었다.
“넌 최고의 치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뜬금없는 말에 이서우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죽음 직전에서도 살릴 수 있는 치료가 최고 아니겠습니까.”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지. 하지만 말이다, 죽을 때까지 아프지 않고, 심각한 부상을 당해도 자가 치유가 가능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면 어떻겠느냐.”
“그게 가능이나 한 일입니까?”
“80년을 연구하니 그 방법이 보이더구나.”
“80년요?”
“이 녀석아, 이래 보여도 내일모레면 백 살이다.”
“헉!”
흰머리는 있지만 눈빛이 너무 또렷하고 정정해 보여서 젊게 봤는데, 백 살이 다가오고 있다니.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어쨌든 그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험이 필요하다. 구해 주겠느냐.”
“임상 실험에 필요한 몬스터를 구해 달라는 뜻입니까?”
“그렇지.”
-란셀 노인이 당신에게 실험에 필요한 몬스터를 잡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어떤 몬스터를 말씀하시는지요.”
“아무래도 재생 능력이 뛰어나야겠지. 트롤에 대해 아느냐?”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설마, 트롤을 잡아 오라는 겁니까?”
“그래. 왜? 겁나는 것이냐?”
“그럴 리가요.”
“다론 마을에 서식하는 녀석들은 다른 지역 놈들보다 힘은 조금 약하지만 머리가 좋은 녀석들이다.”
“상관없습니다.”
이서우는 트롤의 약점도 알고 있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노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남쪽으로 7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군락을 이루며 살고 있다. 크기는 2미터로 트롤치고는 작은 편이지만, 무시하면 큰코다친다. 반드시 젊은 녀석으로 잡아 와야 한다. 귀 뒤쪽에 하얗고 큰 점이 있으니 구분하기 쉬울 거야. 수컷과 암컷 각각 3마리씩이면 돼.”
다론 마을에 사는 트롤을 생포하라
신의 영역을 살짝 엿본 란셀 노인은 뛰어난 재생력이 있는 몬스터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방으로 알아보던 그는 유독 다론 마을에 사는 트롤들이 다른 곳에 사는 트롤보다 뛰어난 재생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 트롤을 생포하기 위해 다론 마을에 머물렀지만 군락을 이루고 있어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침 식시귀 대왕을 홀로 처치했다는 소문을 듣고 당신에게 부탁하게 된 것이었다.
난이도 : C+
완료 조건 : 젊은 트롤 암컷 3마리, 수컷 3마리 생포.
성공 시 보상 : 3레벨 경험치, 50골드, 활력차 100그램.
실패 시 : 5레벨 다운.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
‘오, 활력차까지? 생포하려면 조금 귀찮겠지만 이 정도 보상이면 할 만하지.’
“참, 수백에서 많게는 수천 마리까지 모여 사는 데다가 지능까지 높아 생포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놈들은 자포자기하면 스스로의 몸을 망가뜨리려 한다. 그러니 특별히 조심해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더 궁금한 것은 없느냐?”
“네.”
“꽤 험난한 여정이 될 테니 가져가서 피로가 쌓일 때마다 마셔라.”
“감사합니다.”
란셀 노인이 작은 병을 몇 개 내밀자 이서우는 냉큼 받아 들었다.
“그만 가 보거라.”
“네.”
이서우도 얼른 퀘스트를 완료하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의원을 빠져나왔다.
이서우는 먼저 남문 근처에 있는 거래 중개소로 갔다.
마을 남쪽은 식시귀 등 주로 아이템을 잘 주지 않는 몬스터가 서식하고 있어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어서 이서우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역시나 거래 중개소는 한가했다.
이서우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바로 죽음의 반지에 대한 것이었다.
‘어라, 없네.’
식시귀는 잡템조차도 잘 주지 않고, 동급 퀘스트에 비해 보상도 떨어졌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퀘스트를 다 했지만 길드 단위로 뭉치면서 식시귀에 대한 소문이 나자 외면받게 되었다.
지금은 솔로로 즐기는 유저들이나 가끔 사냥을 하는 정도였다.
이서우는 비슷한 옵션이 있는 반지를 확인해 보았다.
‘헉!’
가격을 본 이서우는 화들짝 놀랐다.
옵션이 3개나 붙어서 비쌀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500골드라니!
‘지금 팔아야 하나.’
착용 레벨이 40이기 때문에 당장 착용할 수가 없어 고민이 되었다.
당장 팔자니 레벨을 올리는 속도가 빠르다는 게 신경 쓰였고, 기다리자니 아이템 가격이 내려갈까 봐 우려되었다.
고민을 하던 이서우는 경매장으로 갔다.
유사한 물건만 있어서 가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시작가를 100골드로 하고 기한은 게임 시간으로 24시간을 선택했다.
혹시 몰라 즉시 구매가도 설정했다. 가격은 700골드였다.
물건을 올리고 경매장을 나오는데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이서우는 친구가 연락을 한 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쪽지를 보았다.
-경매장에 올려놓은 ‘죽음의 반지’가 700골드에 낙찰되었습니다. ‘받기’를 선택하시면 수수료 3퍼센트를 제외한 금액이 입금됩니다.
이서우는 어리둥절해 잠시 멀뚱히 서 있다가 골드를 받았다.
정말로 679골드가 인벤토리에 들어왔다.
기존에 있던 금액과 합쳐져 700골드가 넘었다.
이서우는 ‘내가 너무 싸게 올려놨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약간 비싸게 올려 둔 것이었는데, 특별히 암흑 속성이 필요한 유저가 있어 바로 팔려 나간 것이었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30레벨 반지라도 하나 사서 가자.’
스텟의 상승으로 큰 이득을 봤기에 투자를 하기로 결정했다.
가면서 레벨이 오를 테니 25레벨 장비는 넘기고 곧장 30레벨을 검색했다.
이서우는 추가 옵션이 1개고 수치도 보통인 반지를 2개 구입했다.
옵션은 어느 수준 이상을 넘어가면 약간의 차이로도 가격이 급상승한다.
당장 좋은 아이템보다 도움이 되는 아이템이 필요하기 때문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래도 30레벨 희귀 등급이어서 그런지 개당 70골드가 소모되었다.
강고한 강철 반지
등급 : 희귀
착용 레벨 : 30
공격력 20~25
추가 옵션 : 근력 +5
단단한 강철 반지다.
아주 심플한 옵션이지만 근력이 붙어 있어서 이서우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귀고리랑 목걸이도 그냥 사?’
돈이 넉넉하니 쓰고 싶은지, 비어 있는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서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이템 가격 변동 추이를 살펴본 뒤 구입을 결정했다.
가격도 적당하고, 쓸 만한 귀고리와 목걸이를 찾았다.
튼튼한 체력 귀고리
등급 : 희귀
착용 레벨 : 30
마법 방어력 : 20
추가 옵션 : 체력 +5
화려한 보석 목걸이
등급 : 희귀
착용 레벨 : 30
공격력 : 40~50
추가 옵션 : 근력 +10
마법 방어가 낮아 귀고리는 마방을 선택했다.
‘1개 팔아서 액세서리 세트를 맞추네.’
트롤 생포를 위한 도구 구입까지 끝낸 이서우는 곧장 남문으로 갔다.
보통의 경우 낯선 지역으로 가게 되면 그곳에 대한 정보를 찾은 뒤 움직이지만 이서우는 자신감이 넘쳤다.
필드 네임드인 식시귀 대왕까지 처치한 상황이니 사기충천이었다.
“역시 상당히 효과가 좋은 거였네.”
남문을 나서기 전 란셀에게서 받은 병을 확인했다.
괜찮은 아이템도 착용했고 물약도 성능이 뛰어난 것이 있으니, 이번 퀘스트는 쉽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서우는 힘차게 남문 밖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