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레벨이 갑이다
20화
“그러니까 트롤들의 자료가 총대장에게 남아 있었다는 겁니까? 인연이 되어 퀘스트로 그걸 받으신 거고요.”
“네. 지도와 함께 책도 보여 주더군요. 가지고 나올 수는 없었지만 아주 오래전 사람보다 몬스터의 세력이 강하던 시절, 이 일대를 주름잡으며 많은 보물을 숨겨 뒀다는 글을 봤어요.”
“그렇군요. 하긴, 몬스터들의 천국이었다면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좋은 재료를 얻고, 귀한 물건들을 많이 만들어 두기는 했겠네요.”
“네.”
퀘스트라면 분명 그곳에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곳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걱정이 되다뇨?”
“책에는 트롤들이 아주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잔인한 짓이라고요?”
“네. 트롤들의 무섭도록 빠른 재생력으로 온갖 실험을 다 했더군요.”
“예를 들면요?”
“더 강해지기 위한 욕심 때문에 다른 몬스터와 자신들의 재생력을 결합해 키메라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오우거처럼 대형 몬스터도 존재한다고 하고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서우 님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곳에서 살아가는 트롤들의 문명 수준을. 아마 초창기에는 더 많은 시도와 더 많은 일들을 자행했을 겁니다. 그때는 인간들의 세력이 이렇게 크지 않았으니 방해받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흠.”
이서우는 진중한 표정으로 권지훈이 한 이야기를 곱씹어 보았다.
일리는 있다.
방해꾼들이 없다면 무슨 일이든 못 할까.
아마 하고 싶은 일은 전부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1차 전직을 하고 이곳을 벗어나기 전에 주어지는 퀘스트 같은데, 난이도가 상상 이상이네. 이러니 총대장도 아무에게나 퀘스트를 주지 못한 것이겠지.’
손발이 잘 맞는 파티는 예상치 못한 놀라운 일을 해내기도 한다.
오랜 세월 몬스터와 싸워 온 총대장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강한 몬스터가 있다면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이네요. 그만큼 보상도 좋다는 뜻일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요.”
권지훈은 자신감 넘치는 이서우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트롤들을 처치하면서 보여 준 그 능력이라면 충분히 자신감을 가질 만했다.
“일단, 이번 일부터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조용히 찾아보죠.”
“네.”
권지훈을 비롯한 다른 파티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봤다, 이서우의 힘을.
‘어쩌면 우리는 그의 진정한 힘을 아직 보지 못한 것일지도 몰라.’
폭풍처럼 몰아쳐 트롤들 사이를 누비며 활약하던 이서우.
그 모습도 충격적이었는데, 권지훈은 자꾸 그게 전부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서우는 대화를 끝내고 자신의 방으로 가서 누웠다.
머릿속으로는 이런저런 생각이 끊임없이 났지만 완벽한 컨디션을 위해 애써 비우고 잠을 청했다.
* * *
새벽부터 훈련장에는 뜨거운 기류가 흘렀다.
아직 태양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려면 시간이 있는데도 후끈 달아올랐다.
정찰병으로부터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총대장은 작전 회의를 통해 계획한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이서우는 가장 최근 트롤들의 지역을 경험한 터라 먼저 움직였다.
신속하고 은밀하게 이동해 트롤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어, 그들의 활약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마을을 나선 이서우는 마나를 이용해 숲을 누볐다.
다른 대원들과 달리 페른과 테루는 가벼운 복장을 했는데도 이서우의 뒤를 쫓는 게 쉽지 않았다.
‘역시, 모험가님은 대단하셔.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또 강해지신 걸까.’
자신들은 힘들게 쫓고 있는데 이서우는 너무 편안하게 숲속을 달리고 있으니 이전과는 또 다른 격차가 느껴졌다.
‘절대 초보 마을에서 놀 만한 사람이 아냐. 과연 오늘은 어떤 능력을 보여 줄까.’
권지훈도 페른이나 테루와 같은 생각이었다.
“본진과의 거리를 10분으로 맞춰 주세요.”
“네.”
이서우의 명령에, 연락을 담당하는 대원 하나가 나무에 뭔가를 박아 넣었다.
그러자 은은한 향이 퍼져 나왔다.
몬스터들은 맡을 수 없고 인간만 느낄 수 있어서, 통신용으로 많이 쓰는 방법이었다.
나무에 박아 둔 것은 메모와 막대 사탕 정도 되는 구슬이었다.
구슬은 10분 간격으로 완전히 다른 색깔로 변하고, 1분 단위로 진한 정도가 달라 아군이 이동한 시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한참을 달려 트롤 지역 서쪽에 도착했다.
이서우가 멈추자 권지훈이 바짝 다가왔다.
“조용하네요.”
“그러게요. 너무 조용하네요.”
이서우는 주변이 지나치게 잠잠한 것이 거슬렸다.
몬스터들이 사는 곳은 대부분 서로 영역 다툼도 하고, 영역을 침범해서 싸움도 나곤 한다.
“트롤들의 힘이 워낙 막강해 다른 몬스터들이 접근을 하지 않는 건 아닐까요.”
“최근 일을 주변 몬스터들도 분명 알았을 거예요. 레벨 차도 그리 많이 나지 않고 개체 수도 더 많은 오크들도 조용하고, 라이칸스로프들도 잠잠한 게 좀 수상하네요.”
“족장과 부족장이 죽으면서 지도자의 공백이 생긴 게 원인 아닐까요?”
“그걸 알아봐야겠네요.”
이서우는 찝찝한 기분을 안고 가고 싶지 않아 페른과 테루에게 주변을 잘 감시하라고 명령했다.
“대장님, 혼자서는 위험합니다.”
“일회성인데 대장이라뇨. 그냥 이전처럼 편하게 불러 주세요.”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를 이끄시는 대장님이시니 그렇게 부르는 게 맞습니다. 오히려 대장님이 저희들에게 하대를 하셔야죠.”
“전 이게 편합니다. 어쨌든 저 혼자 움직이는 게 오히려 더 안전합니다.”
“그건 그렇지만…….”
“금세 다녀올 테니 본진에 전하세요. 깊숙이 들어오지 말고 대기하라고.”
“네, 대장님.”
이서우는 혹시 몰라 정찰부터 하고자 했다.
반담이 이미 정찰을 보냈다고 하지만 직접 눈으로 봐야만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빙 둘러 북쪽 지역까지 크게 훑은 이서우는 후방으로 트롤들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
‘뭐지?’
경계를 서고 있어야 할 트롤들이 보이지 않았다.
일렁이는 횃불이 곳곳에 꽂혀 있어 경계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도 생명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서우는 천천히 접근했다.
‘비었어.’
안으로 계속 접근했지만 트롤은 1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저것 잴 것 없이 빠르게 깊숙이 들어갔다.
핵심 건물들이 있는 곳까지 갔지만 마찬가지였다.
“젠장, 이놈들이 설마…….”
이서우는 방향을 틀어 힘차게 지면을 박차며 파티 창을 열었다.
-트롤들이 우리가 오는 걸 알았습니다. 당장 본진에 전달하라고 말해 주세요!
-네? 네!
다급한 메시지를 받은 권지훈은 얼른 페른과 테루에게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서우 님. 지금 본진이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네?
-연락 담당이 다급히 와서 소식을 전했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달려갈 테니 페른 님과 테루 님에게 서둘러 지원을 하라고 전해 주세요.
-네!
이서우는 트롤들이 본거지에 머물러 있는 척하면서 다론 마을을 치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움직였다.
‘피해가 적어야 할 텐데.’
이서우는 마나를 더욱 실었다.
슈슈슉, 슉슉!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멀리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때였다.
다론 마을을 수호하라
총경비대장 반담은 트롤들이 다론 마을을 침략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500마리의 트롤들에 묶여 움직일 수 없게 된 반담은 총경비대장의 권한으로 다론 마을을 이용하는 모험가들에게 마을 보호 임무를 의뢰했다.
난이도 : C
완료 조건 : 트롤들을 마을에서 몰아내거나 모두 처치. 남은 트롤 500.
성공 시 보상 : 1레벨 경험치, 10골드.
추가 보상 : 트롤 1마리당 1골드, 100마리당 1레벨 경험치.
실패 시 : 3레벨 다운.
퀘스트 거절 시 : 다론 마을 NPC들과의 관계 악화.
‘강제 퀘스트나 마찬가지네. 하긴, 마을이 없어지면 유저들도 활동을 못 하니 안 받을 수는 없겠지.’
“서우 군!”
“반담 님, 제가 돕겠습니다!”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아채고 부르는 반담에게 대답하며 이서우가 빠르게 다가가 트롤의 목을 잘라 버렸다.
하지만 반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지금 마을이 위험하네. 자네와 자네 팀은 마을을 지켜 주게.”
“하지만…….”
“아냐. 오히려 내가 미안해. 험한 길을 자네 팀만 보내서.”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여긴 괜찮네. 겨우 500밖에 안되니 막을 수 있어. 문제는 마을이지. 서둘러 주게.”
“네, 반담 님.”
-퀘스트 ‘트롤을 일망타진하라’가 갱신되었습니다.
이서우는 퀘스트 내용을 빠르게 확인했다.
보상이나 다른 건 변함이 없고, 퀘스트 이름과 완료 조건만 바뀌어 있었다.
‘방금 전 뜬 퀘스트와 비슷하네. 이거 일타이피겠는데?’
이서우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트롤을 베어 버리고 권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퀘스트 받으셨습니까?
-네.
-그럼. 우린 마을로 갑시다.
-하지만…….
-이곳은 경비대원들만으로 충분합니다. 마을이 급해요.
-알겠습니다.
이서우가 앞장서며 트롤들을 무섭게 베어 넘겼다.
순식간에 5마리를 처치했다.
이서우의 짧은 활약에 대원들은 사기가 올라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마음 같아서는 잠깐이라도 전투에 참여한 뒤 마을로 가고 싶었지만, 상황이 심각했다.
아직까지는 트롤들이 마을을 침략하지 않았지만, 늑장을 부리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속도를 높이겠습니다.
-네.
이서우가 속도를 높이자 권지훈을 비롯한 파티원들은 그를 쫓는 것도 힘겨운지 이동이 아니라 공격에 사용하는 스킬까지 활용하며 따라왔다.
버퍼의 버프가 있어 어느 정도 속도가 붙었지만 그건 이서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버프가 있어 그들이 더욱 힘들었다.
이서우가 이처럼 빠르게 이동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지훈 님.
-네, 서우 님.
-1차 전직 유저들, 보통 던전에 많이 가죠?
-네. 아무래도 마지막 던전에서 장비를 맞춰야 다음 지역에서 편하니까요. 전직 유저가 아니라도 던전 위주로 사냥을 하는 유저들이 많습니다.
-40대 후반 유저가 몇 명이나 있으면 막을 수 있을까요?
-제가 볼 때는 적어도 1천 명은 있어야 합니다.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2천 명 수준은 되어야 하고요.
-큰일이네요. 대부분 던전에 있을 텐데.
-그렇죠. 40레벨이 되는 순간 거의 던전의 노예가 된다고 봐야 하니까요. 30레벨대는 아예 트롤들을 상대할 수 없을 텐데, 저도 조금 걱정이 되네요.
-일단 최대한 속도를 높여 봐요.
-네.
이서우는 줄어드는 마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속도를 높였다.
5분이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1천의 마나가 빠져나갔다.
이 속도라면 10분 안에 마을이 보이겠지만, 마나의 소모는 더 클 것이다.
그렇게 3천의 마나가 소모되었을 때, 드디어 트롤들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그가 원하던 모습은 아니었다.
-서우 님, 마을이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네, 보입니다. 다행히 늦지 않아서 이제 막 교전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빨리 합류하도록 하죠.
-나영아, 마나 여유 있지?
-응. 다행히 전직 끝내서 여유는 있어.
-전직 퀘 마치기 전이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힐 팍팍 해 줄 테니 걱정 말고 들이대.
-오케이!
이서우는 권나영의 말에 그제야 자신이 파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혼자 게임을 하다 보니 파티 중인 걸 깜빡했네. 이러면 마음껏 휘저을 수 있지.’
이서우는 대검을 빼 들고 하체와 허리에 마나를 집중했다.
그러자 그의 속도가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헉!”
뒤쫓아 가던 권지훈은 숙련도가 높아진 대시 스킬을 사용했는데도 이서우를 놓쳐 버리자 당황했다.
하지만 탱커답게 냉정을 되찾고, 검과 방패를 들고 트롤들에게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