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레벨이 갑이다
25화
이서우는 한적한 곳으로 가서 벤치에 앉았다.
인벤토리를 열어 책 하나를 꺼냈다.
‘펠렌에 대한 단서가 있다고?’
이서우는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반담이 언급한 인물에 대해 알게 된 것도 놀라웠지만, 몬스터에게서 그 힌트를 찾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이템도 중요하지만 이서우는 오직 펠렌에 대한 단서에만 집중했다.
“하긴, 이게 당연한 건가.”
하이 레벨에 대한 정보가 있다면 그것을 뒷받침하고,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가 있는 게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그걸 만들어 놓을 필요가 없다.
이서우는 책이 자신의 손에 들어온 걸 필연으로 생각하고는 책을 펼쳤다.
이 두꺼운 책은 양피지로 되어 있었는데, 안에는…….
“헉.”
이서우는 꼬부랑글자가 써져 있는 것을 보고는 헛바람을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타오른 부족의 지도자가 남긴 책이니 당연히 트롤의 언어로 기록이 되어 있던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는 타오른 부족이 인간의 언어를 쓰고 있지만 타르타는 그걸 모르기에 트롤의 언어로 남긴 것이었다.
-자동 읽기가 가능합니다. 실행하시려면 책을 펼치고 ‘자동 읽기’ 명령어를 실행하시면 됩니다.
-특정 부분을 알고 싶다면 터치를 하고 ‘음성 지원’이라고 하시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안도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자동 읽기.”
명령어와 함께 책에 있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이서우는 ‘다스리는 자들의 대지’가 있는 위치에 집중했다.
“흠, 대륙의 북쪽 드래곤의 숲에 있다고?”
정확한 위치는 나와 있지 않지만 힌트는 얻었다.
하지만 아직 그의 레벨로는 갈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근데, 대륙 북쪽이 뚫려 있기나 한가.”
대륙은커녕 작은 마을에서 이제 겨우 벗어나려는데, 대륙 북쪽을 어떻게 간단 말인가.
“레벨을 조금 더 올리고 찾아가야겠네. 하긴, 그 예날 타르타가 가장 강했던 시절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레벨이 높았겠지.”
갈 수도 없는 곳인데 괜히 헛바람만 드는 게 아닌가 싶어 얼른 책을 닫았다.
아쉬움이 컸지만,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는 레벨 업이 급선무였다.
툭.
책을 닫고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데 얇은 가죽 하나가 떨어졌다.
“응? 이건…….”
가죽을 펼친 이서우는 그것이 지도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음성 지원.”
혹시나 싶어 맨 밑에 써진 글에 손을 갖다 대고 명령어를 말했다.
-루테인 마을.
‘아, 지난번에 도와줬던 남작 아들이 있던 그 마을이구나.’
이서우는 오크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남작의 아들을 떠올렸다.
이서우의 손가락이 점점 북쪽으로 향했다.
그때마다 마을 이름들이 음성 지원이 되어 줄줄 흘러나왔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드래곤 숲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미친, 여길 어느 세월에 가냐?”
드래곤 숲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한 정보가 있어 한껏 기대했는데 최소 300레벨은 되어야 갈 수 있는 지역이어서 이서우는 한숨만 깊이 내쉬었다.
“그래, 레벨이나 올리자.”
더 이상 확인할 게 없어 이서우는 책과 지도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전직 퀘스트도 없고, 다론 마을 던전에서 사냥을 할 레벨은 지났기에 이제는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가기 전에 이서우는 란셀을 찾았다.
퀴헬른과 타르타에게서 얻은 피와 심장이 혹시라도 물약을 만드는 데 유용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전직을 하지 못한 채 다음 마을로 이동하는 것이어서 준비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갈 생각이었다.
다른 어떤 마을을 가도 란셀보다 뛰어난 능력자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어라, 안에 안 계시나.’
보통은 먼저 알고 나오든지 안에서 호통을 치는데, 오늘은 조용했다.
안에 없나 싶어 들어가는데 웬걸, 안에서 차분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계셨네요?”
“이 녀석아, 도둑놈처럼 인기척도 없이 오면 이 늙은이 심장마비 걸린다.”
“저 왔다는 거 알고 계실 줄 알았죠. 그리고 아직 정정하신데 심장마비라뇨. 아마 저보다 훨씬 오래 사실 겁니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해야 할 일만 끝내면 조용한 곳에 틀어박혀서 적당히 시간 보내다가 빨리 가련다.”
“한 50년은 더 사시겠네요.”
“아주 저주를 퍼부어라, 이놈아!”
역정을 내는 것 같아도 란셀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낯선 곳에 와서 편하게 대화 나눌 상대가 없었는데, 이서우와는 나이를 떠나 잘 통하는 면이 있었다.
“참, 어르신. 이거 혹시 좀 쓸 만할까요?”
“헛! 그거 어디서 났느냐?”
“네? 타르타를 잡고 얻었는데요.”
“그게 타르타라고? 내가 알던 타르타는 그런 기운을 풍기지 않았는데. 사라진 세월 동안 못된 짓을 많이 했나 보구나.”
이서우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란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평소 잘 놀라지 않던 노인이어서 이서우는 호기심이 동했다.
“타르타를 잘 아시나 봐요?”
“암. 알고말고. 과거 드래곤 숲을 주름잡던 몬스터 중 하나였다. 드래곤이 사라지고, 여우 짓을 하던 놈이지.”
“여우 짓이라면……?”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서 호기를 부리는 거지 뭐겠느냐.”
“아!”
“아무래도 이것도 운명인 것 같구나.”
“네?”
란셀이 평소와 달리 진중한 얼굴을 하고서는 이서우를 바라보았다.
“그분의 흔적을 쫓다가 막힐 때면 도움을 주려 했는데, 타르타의 심장을 얻어 왔으니 이건 아무래도 지금 네게 주는 게 낫겠구나.”
“이게 뭐죠?”
이서우는 란셀의 손바닥에 있는 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낡아서 쓸모도 없을 것 같은데, 란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분께서 혹시 훗날 하이 레벨의 경지에 오른 자를 만나면 주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그분이라면 설마…….”
“그래, 맞다. 너보다 훨씬 먼저 그 길을 갔었던.”
“근데, 이걸 이제야 주시는 거예요?”
“네가 준비될 때를 기다렸다. 한데, 그날이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는데 이제야 이야기를 꺼낸 것이 살짝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도 부탁을 받은 것이니 특정한 조건을 갖춰야 이 책을 꺼낼 수 있었을 것이다.
책을 받아 들었다.
책을 펼쳐 보려는데 메시지가 떴다.
-펠렌의 후예로 전직하시겠습니까?
“헉!”
“이놈아, 뭘 그리 놀라느냐. 넌 운이 좋은 줄 알아라. 타고나기를 재수가 좋아서 쉽게 그 귀한 걸 얻은 것이니. 난 그분께 배워 보려고 정말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그런가요?”
“얼른 책이나 보지 않고 뭘 하느냐?”
이서우는 란셀이 펠렌을 쫓아다니며 가르쳐 달라고 졸라 대는 모습을 상상하고는 피식 웃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란셀이 호통을 쳤다.
‘펠렌의 후예로 전직할게.’
-펠렌의 후예로 전직합니다.
-모든 스텟이 30씩 상승합니다.
-새로운 스텟이 생성되었습니다.
-30개의 보너스 스텟을 얻었습니다.
-공격력이 상승합니다.
-방어력이 상승합니다.
-약초를 보는 눈이 발달합니다.
-숙련도에 따라 냄새만으로도 어떤 약초인지 구분이 가능합니다.
-숙련도에 따라 최고 신급 물약을 제조할 수 있습니다.
-숙련도에 따라 다양한 전투 보조 아이템을 제조할 수 있습니다.
-숙련도에 따라 장비를 강화시킬 수 있는 물약을 제조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산 기술을 극한까지 마스터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셨습니다.
-칭호 ‘전설을 잇는 자’를 얻었습니다.
-칭호가 자동으로 적용됩니다.
더 뛰어난 칭호가 자동으로 선택되도록 해 둬서 상태 창에 적용이 되었다.
한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겼다.
펠렌이라면 전설적인 인물인데 왜 약초와 물약에 대한 메시지가 뜨는 것일까.
이서우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얼른 캐릭터 창을 열었다.
“헉! 이게 대체…….”
이름 : 이서우
하이 레벨 : 50
칭호 : 전설을 잇는 자
*제작 성공률이 높아진다.
*제작 성공 시 높은 등급이 될 확률이 증가한다.
*제작 성공 시 숙련도 경험치가 50퍼센트 증가한다.
*제작 시간이 50퍼센트 단축된다.
*다른 생산 기술을 습득해도 모든 혜택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생산 기술 레벨에 따라 모든 혜택이 상승한다.
명성 : 650
직업 : 전설의 약초꾼
펠렌의 후예로, 모든 약초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전설의 약초꾼이 되면 죽은 사람도 살려 낼 수 있다고 한다.
*하이 레벨 특성 스킬
-약초 바르기
-???
……
-???
생명력 : 18,850(+1,110)
마나 : 13,590
공격력 : 2,132
속성 공격력 ▼
물리 방어력 : 1,796
마법 방어력 : 1,460
근력 : 195(+54)
민첩력 : 147(+7)
체력 : 168(+28)
지력 : 50
정신력 : 56
관찰력 : 30
*관찰력 : 약초꾼이 가져야 할 기본 능력이다.
*관찰력이 일정 경지에 이르면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보너스 포인트 : 96
생명력이 2만 가까이까지 올라간 것도, 마나가 1만 3천을 넘어선 것도, 모든 스텟이 30씩 증가하고 새로운 스텟이 생겨난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서우의 시야에는 오직 ‘전설의 약초꾼’이라는 글자만 보였다.
“허허허. 전설의 약초꾼이 된 것이 감격스러운가 보구나.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지금 나의 경지에 이르려면 10년이면 된다고.”
‘그게 그 뜻이었어?’
이서우는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란셀을 바라보았다.
펠렌의 후예로 전직을 한다고 해서 뭔가 대단한 것일 줄 알았는데, 고작 약초꾼이라니.
“이 녀석아, 수십수백만 약초꾼이 평생을 바쳐도 이루지 못하는 경지가 바로 펠렌 님이 이룬 경지다. 누구보다 쉽고 빠르게 이룰 수 있게 되었는데 표정이 왜 그런 것이냐!”
“전 전투가 좋습니다.”
“쯧쯧쯧, 나의 재능이 부족해 약초만 붙잡고 지냈지만, 펠렌 님은 그렇지 않았다. 드래곤 숲을 호령하던 타르타를 바보로 만들고, 전 대륙에 이름을 떨친 분이다.”
“한데, 그분에 대한 소문이나 기록은 거의 전무하잖습니까.”
“전설적인 존재가 있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분이 펠렌 님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극소수일 뿐이지. 그분에 대한 건 내가 보증한다!”
란셀이 침까지 튀겨 가며 말했지만, 이서우는 약초꾼이 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순간이지만 진짜 하이 레벨이 특별한 존재인지 의구심이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곧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털어 냈다.
약초꾼이 되었다지만 능력치는 오히려 상승했다.
지금까지도 사냥에 문제가 없었으니 상관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녀석, 드디어 그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구나.”
“그럼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죠.”
생각을 달리하니 그제야 변화가 보였다.
새롭게 생성된 스텟과 보너스 스텟까지 포함해 총 210개가 올랐고 생명력도 5천, 마나도 2천이나 올랐다.
어디 그뿐인가. 공격력과 물리 방어력, 마법 방어력도 각각 500씩 증가했다.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렇게 좋아졌는데, 약초꾼이라는 말 때문에 느끼지 못했다니.’
이서우의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맺혔다.
그 모습을 보며 란셀도 덩달아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남기신 책부터 확인해 보거라.”
이서우는 들고 있는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왕 약초꾼이 되었으니 펠렌이 뭘 기록해 놓았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이 책을 보고 있다면 나의 후예가 되었다는 뜻이겠지. 그렇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책이니.
우선 축하한다,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 것을.
첫 페이지 내용은 간단했다.
책장을 넘기자 조금 더 글자가 많았다.
나는 오랜 시간 수련에 매진했다.
정말 미친 듯이 수련을 했지.
밥을 먹으면서도, 잠이 들기 직전까지도 오직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를 맛보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자 벽과 마주하게 되었다.
육체의 한계를 느낀 것이지.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연구를 거듭했다.
그리고 찾았다, 한 차원 높은 경지로 오를 수 있는 방법을.
두 번째 페이지에는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글이 있었다.
이서우는 점점 책 내용에 빠져들었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마나였다.
마법사들이 강력한 힘을 내게 하는 원동력.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 마나를 잘 다루기 위해서는 육체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 마나를 자연스럽게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중략……
마나를 모든 동작에 담을 수 있는 육체가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마법사들처럼 마나를 빠르게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고민하던 난 우연한 기회에 그것을 극복할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나는…….
‘그러니까 요약하면, 약초를 이용해 마나를 회복할 수 있는 물약을 만들었다는 거네. 전설의 약초꾼이 되면서 마나가 마르지 않게 되었고. 이거 완전 대박이잖아!’
이서우는 책을 보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마나를 회복시켜 주는 물약이 없어 답답하던 차였는데, 펠렌은 이런 식으로 해결책을 찾았다니.
이서우는 버퍼와 사냥하면서 마나 회복 속도가 살짝 증가한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런데 버퍼의 도움이 없이 그게 가능하다?
이서우는 당장 생산 스킬 창을 열었다.
“이놈아, 지금 아무리 봐도 네가 만들 수 있는 건 가벼운 상처를 치료하는 흔한 약뿐이다. 경험을 쌓고 약초에 대해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더 많은 것을 습득할 수 있다. 관찰력이 상승했을 테니 지천에 널린 게 다 약초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욕심은 그만 부리고 밖으로 나가라.”
“그러네요. 알겠습니다.”
펠렌이 남긴 것이라 처음부터 뛰어난 성능의 마나 물약이 있을 줄 알았는데, 현재 그가 제작할 수 있는 것은 최하급 생명력 회복 물약이 전부였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숙련도를 빨리 올려 마나 물약을 만들 상상을 하니 핑크빛 미래가 머릿속을 온통 채웠다.
이서우는 밝은 미래를 그리며 창을 닫았다.
‘어차피 루테인 마을로 가려 했으니 가면서 약초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자. 제대로만 이용하면 돈을 갈퀴로 쓸어 담을 수 있어. 흐흐흐.’
마나 회복과 관련된 아이템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버퍼만 회복 효과를 소폭 상승시킬 수 있다.
그러니 잘만 활용하면 대박이었다.
란셀은 타르타와 퀴헬른의 심장과 피로 만들 수 있는 소모품 아이템을 완성해 이서우에게 건넸다.
란셀과 작별한 이서우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루테인 마을로 가기 위해 북문으로 향했다.
한데, 거기서 이서우는 경비대원에게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