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레벨이 갑이다
28화
“야, 이놈아, 전설의 약초꾼이나 되는 녀석이 그걸 못 고쳐?”
역시나 란셀의 반응은 이서우가 예상한 대로였다.
어째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예측이 쉬울까.
하지만 그의 그런 호통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할아버지를 대하는 것 같은 친근함이 느껴졌다.
“전설의 약초꾼이라고 처음부터 잘하나요?”
“그분의 뒤를 잇는 건데 당연히 처음부터 잘해야지. 너 혹시 약초꾼 되고 아무것도 안 했어?”
“숙련도 올리는 것 말고 딱히 할 게 있나요?”
“그분으로 빙의가 되어서 제조에 매진해야지!”
“빙의 그거 함부로 하는 거 아닙니다.”
“할 수는 있고?”
“가능은 합니까?”
“당연하지. 넌 그분의 뒤를 잇는 인재가 아니냐. 그분이 주신 혜택도 있을 텐데 그걸 못하면 말이 안 되지.”
“혜택요? 없는데요?”
“없긴 왜 없어? 숙련도도 남들보다 훨씬 빨리 오르고, 더 효과가 좋은 걸 만들 수 있는데. 게다가 그분이 친히 책도 남기셨고.”
“그런 게 있을 리가…….”
이서우는 직접 확인을 하기 위해 한 번에 생산 기술 창과 캐릭터 창, 칭호 목록 등 열 수 있는 건 다 열어 보았다.
없다고 생각했는데, 있었다.
당시 약초꾼으로 전직을 했다기에 충격을 받아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칭호 목록에 ‘전설을 잇는 자’라고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전설을 잇는 자
*제작 성공률이 높아진다.
*제작 성공 시 높은 등급이 될 확률이 증가한다.
*제작 성공 시 숙련도 경험치가 50퍼센트 증가한다.
*제작 시간이 50퍼센트 단축된다.
*다른 생산 기술을 습득해도 모든 혜택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생산 기술 레벨에 따라 모든 혜택이 상승한다.
“진짜 있네요, 혜택이…….”
확인해 보니 란셀의 말이 맞았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네 번째였다.
모든 생산 기술에 적용된다니. 그 부분을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펠렌 님이 혹시 생산직이셨나요?”
“…….”
란셀은 이서우와 대화를 나누면서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대체 뭘 봐서 전설적인 인물을 보고 생산직이라고 했을까.
한데, 생각해 보니 이서우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하긴, 내가 너무 오래돼서 잠시 깜빡했는데, 그분이 참 생산성이 좋으셨지. 못하는 게 없으셨으니까. 드워프 장로도 한 수 접어줄 정도로 장비 제작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셨어. 어디 그뿐인가. 마법사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주문서 제작까지 가능하셨지. 마나를 어떻게 그런 식으로 쓸 생각을 하셨는지. 그분의 무력이 너무 인상이 깊어 내가 그분의 대단함을 잊고 있었어. 허허허.”
란셀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깨달음을 얻은 도인처럼 웃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우의 다음 말에 과거로의 회상이 끊어졌다.
“그분이 대단하신 건 알겠는데, 전 이제 시작하는 초보잡니다. 어떻게 처음부터 심각한 트롤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는 불가능하지. 하지만 네 물약 제조 기술이 초급만 벗어나도 할 수 있다.”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 한 가지 더 필요한 게 있지.”
“필요한 거라면…….”
“네가 구한 타르타의 심장과 피. 그걸 어디서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곳에 답이 있다.”
“네?”
전혀 예상 밖의 말에 이서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당시 분명 아무것도 보지 못했었다. 그렇다는 것은 치료제를 만들지 못한다는 뜻이다.
“네가 그걸 구해 올 때는 펠렌 님의 후예가 아니지 않았느냐. 지금이라면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
이서우는 펠렌의 후예가 되고 새롭게 생성된 관찰력 스텟을 떠올렸다.
다른 유저들은 전직을 하면 새로운 스텟이 생성된다고 했는데, 자기는 그런 게 없다며 살짝 언짢아한 적이 있었다.
한데, 그게 이렇게 행운을 가져다줄 줄이야.
이서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제가 가져와야 할 건 어떤 건가요?”
“맨입으로?”
“에이, 우리 사이에 왜 그러세요.”
“세상의 이치란, 가까운 사이일수록 계산이 확실해야 하는 법이야.”
란셀은 펠렌에게 너무 큰 은혜를 입었다.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게 모두 그의 가르침 때문이었으니까.
그런 은인의 후예이니 친손자처럼 가깝게 여겨지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란셀은 절대로 무조건 퍼 줄 생각은 없었다.
“좋습니다. 뭐가 필요한지 말씀만 하세요.”
“지금은 없고, 나중에 부탁할 게 있으면 부르마.”
“너무 무리한 거 요구하시면 힘듭니다.”
“끽해 봐야 재료나 구해 달라는 거밖에 더 있겠느냐. 젊은 놈이 겁은 많아서는.”
“하하하. 뭐, 그 정도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언제든 들어 드려야지요.”
“됐다, 이 녀석아. 가서 그놈이 죽은 자리를 살펴봐라. 그러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썩 꺼져라, 이놈아.”
“네, 어르신. 감사합니다!”
이서우는 기분 좋게 대답하고는 란셀 의원을 나왔다.
이미 클리어한 곳이니 다른 준비를 할 필요는 없었다.
남문을 나와 전속력으로 달렸다.
마나가 증가하고 밸런스 숙련도가 오를수록 훨씬 안정적이면서 빠른 이동이 가능했다.
‘칭호 혜택이 있으니 초급은 그나마 빨리 벗어날 테고, 문제는 중급인데. 설마 중급 10레벨에 만들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이서우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머리를 흔들었다.
만약 그랬다면 란셀이 직접 만들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석상 정수리로 가서 비밀 문을 열었다.
한번 와 본 곳이니 거침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문은 모두 열려 있었다.
안이 어두웠지만 밤에도 잘 보일 정도로 시력이 발달되어 있어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고 보면 참 간단하게 장치를 설치했네.”
이서우는 긴 복도를 지나며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렸다.
트롤의 조상이 만든 곳이라고 해서 뭔가 대단할 줄 알았는데, 긴 창에 키메라가 전부라니.
“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족장이 홀로 이곳을 지나가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긴 해. 재생력과 힘을 보는 거였다면 이곳만으로도 충분하긴 하지.”
그가 경험한 줄탄은 이곳을 절대 무사히 지나갈 수 없다.
아마도 닭꼬치처럼 꿰여 힘들어했을 것이다.
타르타가 바라는 것도 그거였다.
재생력을 기반으로 하는 힘, 그 기본을 갖춘 자라야만 자신의 유산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겼으리라.
잠시 생각에 잠겨 걷는 사이 복도 끝에 도달했다.
타르타가 있던 공간으로 들어가자 벽 주변에 꽂혀 있던 횃불이 타올랐다.
“이곳은 아직 유지가 되나 보네.”
이서우는 이곳에서 오래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아 주변을 살폈다.
확실히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러니 나올 때 못 본 거구나.”
죽음의 꽃은 눈으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바닥 자체가 검은 색을 띨 뿐 초록색 글자도 없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자 평범한 흙바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흙을 집어 들자 설명이 나왔다.
타르타의 진액을 먹은 흙
수백 년을 살아온 타르타의 생명력과 재생력이 만나 새로운 형태의 물질이 되었다.
“강한 생명력과 재생력을 품고 있으니 트롤병 치료제로 충분하겠네.”
이서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타르타의 진액을 먹은 흙은 담았다.
양이 그리 많지 않아 손으로 박박 긁어모아 커다란 유리병에 넣었다.
그때였다.
-침입자 발생! 침입자 발생!
-주인님의 정수가 담긴 진액을 훔쳐 가려는 침입자가 발생했다! 방어 체계를 가동하라!
갑자기 굵직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모든 문이 닫혀 버렸다.
이서우는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아무리 방어 체계가 발동해도, 이곳의 주인을 월등히 뛰어넘는 강력함은 아닐 것이다.
그그그그그긍!
잠시 상황을 지켜보고 있으니 천장에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마치 돔이 열리는 것처럼 천장이 입을 벌렸다.
툭툭, 투투투투투툭!
동시에 사방 벽에서 어른 손목 두께의 긴 쇠꼬챙이가 튀어나왔다.
벽을 뚫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천장에서 몬스터가 떨어졌다.
수십 마리나 되었는데, 모두 키메라였다. 그것도 70레벨이나 되는.
라이칸스로프, 오크 전사, 오크 대장, 트롤, 심지어는 오우거까지, 50레벨 초반대에서 80레벨의 몬스터까지 다 섞여 있어 해괴망측한 모습을 한 몬스터들이었다.
하지만 이서우는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순식간에 키메라들이 이서우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 순간 이서우의 모습이 사라졌다.
굳이 이런 곳에서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아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퍽퍽퍽퍽퍽퍽!
대검을 꺼내지 않고 두 다리로 몬스터들의 복부와 가슴을 후려 찼다.
마치 풍차가 도는 것처럼 키메라들이 날아가 벽에 박혔다.
2차 발 공격이 이어지면서 몬스터들이 겹겹이 박혀, 마치 어묵이 꼬챙이에 꽂혀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몬스터들의 재생력이 워낙 뛰어나 이서우는 대검을 꺼내 들었다.
평소와 같은 대검이지만, 펠렌의 후예가 된 지금은 무기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마나가 늘어나고 능력이 증가하면서 한 수 한 수가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몬스터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이서우는 계속해서 키메라들을 공격해서 벽으로 밀어붙였다.
벽에서 튀어나온 쇠꼬챙이가 워낙 길어 3마리까지 겹겹이 박혀 버렸다.
그래도 죽지 않고 버티자 이서우는 꼬챙이에 박힌 몬스터의 목을 잘라 버렸다.
-키메라를 처치하셨습니다.
-832,000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질긴 가죽 갑옷을 획득하셨습니다.
-5실버를 획득하셨습니다.
키메라 처치 메시지가 5.1채널 돌비 서라운드 입체음향 시스템처럼 들려왔다.
그리고 반가운 메시지도 들렸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마나는 거의 1만 가까이 빠져나가고, 무기나 방어구 아이템은 일반 템 이외에는 별게 없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50레벨이 되면서 레벨 업 소식이 점점 더뎌져서 갈증이 심했는데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이서우는 남은 몇 마리를 더 처치하고 정리를 했다.
“다음에는 마나 회복 물약을 쓰고 사냥을 해 봐야겠네.”
만든 본인도 제대로 성능을 모른다면 그 값어치를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
이서우는 몬스터에게서 얻은 재료들도 꼼꼼히 살폈고, 혹시 다른 재료가 있는지도 세밀하게 조사를 했다.
더 이상 재료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곳을 벗어났다.
생산직으로 전직을 하고 나니 재료가 다르게 보였다.
일단 마을로 간 이서우는 물약 제조 기술 레벨을 올리기 위해 조용한 곳으로 갔다.
초급 8레벨이고 칭호 혜택까지 있어서 중급으로 쉽게 오를 줄 알았는데, 접속 종료 시간을 꽉 채우고서도 도달하지 못했다.
‘제길. 딱 2퍼센트 남았는데 시간이…….’
결국 이서우는 초급 9레벨 98퍼센트에서 접속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서우는 다음 접속에 확인하는 것으로 하고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