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레벨이 갑이다
29화
“어, 점심시간이냐?”
-그래. 근데 아까 연락하니 안 받더라. 바빴냐?
“종명이한테 형님 소리 한번 들어 봐야지.”
-얼씨구, 뉴 월드에 푹 빠졌구나?
“빠지긴. 하려면 확실히 하고 싶은 거지.”
-그래서 레벨이 몇인데?
“나중에 직접 접속해서 확인해.”
-근데 레벨을 빨리 올려도 너랑 우리랑 거리가 멀어서 같이 게임하기 힘들걸.
“그래?”
-어. 100레벨은 돼야 그나마 만나기가 편해.
“그럼 한 1년은 같이 못 하겠네.”
-야, 우린 일하면서 하는 거거든!
박민수도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밤에 잠시 하는 게 전부였다.
그것도 야근이 없을 때나 가능하지, 일주일의 절반은 일이 바빠 접속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바쁠 텐데 어쩐 일로 전화했냐?”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나 싶어 연락했지. 참, 오늘 저녁에 뭐 하냐?
“별다른 일정은 없어. 왜?”
-불금이잖냐. 종명이랑 해서 오랜만에 가볍게 한잔하자고. 그러고 음주 게임도 한판 해야지.
“오랜만에 음주 게임?”
-콜?
“콜!”
세 친구는 학창 시절 유명한 게임이 나오면 주말에 밤을 새워 가면서 게임을 하곤 했다.
10대 때는 술을 마실 수 없었지만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는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이서우도 오랜만에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흔쾌히 수락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집 앞이었다.
전화를 끊었는데, 다시 진동이 울렸다.
이서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부업체 전화였다.
혹시라도 이웃이 들을까 봐 얼른 집으로 가서 통화를 했다.
며칠이나 지났다고 독촉을 하냐며 살짝 힘을 주어 말했지만 따져 묻는 뉘앙스를 풍길 수는 없었다.
이서우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사내도 목소리를 약간 비틀었다.
하지만 이서우는 그럴수록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적당한 선을 유지하면서 달래고는 통화를 끝냈다.
“이번 달까지라…….”
이야기의 핵심은 이번 달까지 1천만 원을 내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 1천만 원이 원금도 아니고 이자란다.
이자는 부모님이 내고 있다지만, 갈수록 원금과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니 무조건 이달 말까지는 내야 한다고 협박성 멘트까지 했다.
2주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1천만 원을 가져오라는 건 이서우에게 큰 부담이었다.
“정 안되면 열심히 마나 물약이나 팔지, 뭐.”
아직 얼마에 팔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처음처럼 1골드에 팔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10실버든 20실버든, 90퍼센트 이상은 남는 장사여서 시간만 넉넉하면 1천만 원도 만들어 낼 수는 있었다.
레벨 업은 스톱이 되겠지만 급한 불부터 꺼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던전으로 시선을 돌려 볼까 했지만 5분의 1로 분배를 해야 하니 회의적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퀘스트를 이어 하는 게 나았다.
“이번 퀘스트만 끝내도 100골드는 또 생기니까. 그리고 활력차도 팔자.”
사냥으로 얻는 골드는 그리 많지 않다.
80레벨의 몬스터를 처치해도 9실버고, 풀 파티 혜택을 받아도 5등분을 해야 하니 3실버 60브론즈밖에 얻지 못한다.
그것보다는 NPC와 관계를 잘 유지해서 굵직한 퀘스트를 받는 게 미래를 위해서도 이득이었다.
또한 란셀에게서 받은 활력차도 지금은 이서우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반 유저들에게는 중복이 되지 않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가벼운 스트레칭과 10분 정도 걷기 운동을 했다. 아직 몸이 온전하지 않아 오래는 할 수 없었다.
가벼운 운동으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는 다시 접속 방으로 갔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제조 레벨을 중급까지 찍는 것.
하지만 2퍼센트를 올리는 데도 무려 3시간이나 소요되었다.
아마 펠렌의 후예가 아니었다면 중급까지 가는 데 한 달은 걸리지 않았을까.
이서우는 떨리는 마음으로 중급에 제조가 가능한 아이템을 살폈다.
“아싸!”
기분이 좋은 나머지 주먹을 힘껏 쥐며 소리를 내었다.
다행히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새벽 4시가 다 돼 가는 시간에 소리를 질렀으니 누가 봤으면 미친놈이라며 수군거렸을 것이다.
이서우는 재료를 확인했다.
트롤의 피로도 제작이 가능하지만 크리티컬이 떠서 고급 등급이 되어야 했다.
타르타의 피는 성공만 하면 고급이 될 수 있었지만 이서우는 트롤의 피를 재료로 썼다.
고급이 나올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도 궁금했지만 타르타의 피는 더 이상 구할 수가 없어 혹시 몰라 남겨 두기로 했다.
덩치가 큰 만큼 타르타의 피도 리터 단위로 있었는데,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르니 아껴 두는 것이다.
-트롤의 피 1리터를 사용해 트롤병 치료제를 만드시겠습니까?
“그래.”
이서우의 수락에 제작 진행 과정을 나타내는 바가 움직였다.
물약 제조 레벨이 오를수록 제작 시간이 길어져, 중급 물약은 대략 10초 정도가 걸렸다.
-제작에 실패했습니다.
“그래, 첫술에 배부를 수 없지.”
다시 트롤의 피를 사용해 시도했지만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결국 다섯 번을 해서 한 번 성공했다.
“제다 님의 상태는 크리가 떠야 하는데, 확률이 많이 낮네. 뭐, 그래 봐야 장비 제작 성공률과 비교하면 조족지혈이겠지만.”
크리가 뜰 확률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다섯 번에 한 번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 장비 제작에서 크리가 뜰 확률보다는 훨씬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비 제작을 할 때는 정말 피를 말렸다.
특히 높은 등급 아이템을 제작할 때는 온갖 미신을 다 끌어다 와서 준비를 했다.
샤워를 하고 청결을 유지한 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음식을 조심해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는 팬티를 며칠 갈아입지 않고 제작에 임하는 경우도 봤다.
아직 남은 트롤의 피가 많으니 이서우는 부담 없이 질렀다.
결국 20개째에 크리티컬이 떴다.
“휴우, 겨우 하나 만들었네. 가 볼까.”
이틀 내내 고생은 했지만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는 루테인 마을로 향했다.
“마차나 다른 이동 수단 같은 게 있으면 참 좋은데 말이야.”
이동에 시간을 많이 허비하는 시스템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은 게임 초반이어서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경비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마을로 들어간 이서우는 곧장 남작에게로 향했다.
“오오, 왔는가!”
“네, 남작님.”
남작은 이서우가 들어올 때부터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얼굴만으로도 성공 여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는 이서우의 표정이 좋았다.
지금처럼 기쁜 마음으로 환대를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찾은 거로군.”
“네. 일단 효능이 아주 강력한 치료제를 구했습니다. 제다 님이 잘 버텨 주셔야 하는데,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조금 걱정이 됩니다.”
“큰 문제가 되겠는가?”
“확실히 나을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약간의 부작용이야 어쩌겠는가. 아들 녀석이 사람 구실만 해도 충분하네.”
사람 구실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남작에게는 전투가 가능한 정도였다.
힘들게 만든 치료제이니 이서우는 남작이 원하는 정도는 충분히 치료가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일단은 제다 님을 만나 봬야겠습니다.”
“그러세. 어서 가지.”
귀족은 뛰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들과 관련된 일이니 날 듯이 달렸다.
“아, 아버지. 모험가님.”
“그래, 애비다. 괜찮으냐?”
“네. 모험가님 덕분에 힘이 나는 것 같아요. 쿨럭, 쿨럭.”
제다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게 눈으로도 확인이 되었다.
“그래, 장하구나.”
“걱정 마세요. 전 괜찮아요.”
남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아들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이틀 새 혈색이 상당히 나빠졌다.
목소리도 힘없이 쩍쩍 갈라졌다.
마치 말기 암 환자처럼 힘겹게 한 자 한 자 말하는 아들을 보는 남작의 마음은 타들어 갔다.
“치료제를 구했으니 이제 괜찮아질 거다. 다 낫거든 네가 가고 싶은 곳은 다 보내 주마.”
“저, 정말이세요?”
“그럼. 낫기만 한다면 이 애비가 뭘 못 해 주겠느냐.”
“그럼 저, 거기 가고 싶어요.”
“거기라니 어디를 말하는 것이냐. 말만 해라. 보내 주마.”
“지하에요.”
“…….”
평소 워낙 호기심 많은 아들이었기에 위험한 곳은 되도록 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나마 갈 때에도 호위를 대동하고 가야 했던 제다였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위험한 곳이라 생각되면 남작의 만류로 가지 못했다.
지나친 보호에 제다는 가고 싶은 곳이 많았는데, 그중 첫 번째가 바로 지하였다.
아버지가 지하 이야기만 나오면 지나치게 화를 내서 지금은 아예 지하 이야기도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남작으로서는 당황스러웠다.
설마 제다가 지하를 가고 싶어 할 줄이야.
그렇다고 뭐든 들어주겠다고 했는데 다시 말을 바꿀 수도 없었다.
고민하던 남작은 이서우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너의 주치의가 함께한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마.”
“모험가님은 분명 들어주실 거예요.”
“일단 치료부터 하자꾸나.”
“네, 아버지.”
남작은 꼭 잡은 제다의 손을 놓지 않고 이서우를 바라보았다.
“나가야 하나?”
“네. 아무래도 혼자가 집중하기 편합니다.”
“알았네. 잘 부탁하네.”
“걱정 마십시오. 말끔히 나을 겁니다.”
이서우의 확신에 찬 말에 남작은 제다의 손을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파하는 아들을 두고 가는 것이 힘든지, 문을 나서는 내내 침대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남작이 나가자 이서우는 치료제를 꺼냈다.
“이걸 마시면 분명 효과를 볼 것입니다. 조금 고통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을 수만 있다면 그깟 고통,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미 짧은 시간 극심한 고통으로 고생한 제다다.
이서우는 치료제를 들고 제다 가까이로 다가갔다.
“혹시 흘릴지도 모르니 제가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조그만 병 하나도 들지 못한다는 사실이 부끄럽지만, 아까운 치료제를 혹시라도 쏟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서우는 차분히 치료제를 제다의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꿀꺽.
“천천히요.”
알아서 조절할 거라 생각했는데, 마음이 급했는지 넘어가는 소리가 너무 빨랐다.
이서우는 병을 살짝 뒤로 젖혀 붓는 양을 조절했다.
치료제가 다 사라지자 제다가 갑자기 목을 움켜잡았다.
“버티셔야 합니다.”
제다의 눈동자에 실핏줄이 보였고, 이마에는 땀이 살짝 맺혀 있었다.
“으으으, 모, 험가님. 저, 저 좀…….”
이서우는 다른 것을 할 수 없어 제다의 손을 잡아 주었다.
하지만 제다의 발작 증세는 갈수록 심해졌다.
급기야는 입에 거품을 무는 상황까지 왔다.
눕힐 수 없어 이서우는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를 덥석 안아 버렸다.
자신을 붙잡고 힘을 줘서 차라리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라는 뜻이었다.
등이 따끔거렸다.
사람은 고통이 극심하면 손톱이 빠지는지 치아가 나가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제다가 바로 그랬다.
어찌나 손에 힘을 주는지, 가죽 방어구를 입고 있는데도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10분쯤 지나자 서서히 제다가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이서우는 그제야 제다를 품에서 풀어 놓았다.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안의 상황을 주시하던 남작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아들의 신음 소리가 들릴 때부터 들어오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 봐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다가 잠잠해지자 그제야 문을 벌컥 열고 아들을 확인한 것이었다.
“제다야!”
“괜찮습니다. 다행히 약이 효과가 있나 봅니다.”
“고, 고맙네. 정말 고마워!”
아들의 안색이 많이 좋아지고, 피부 색깔도 희미해진 것을 보고는 이서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들과 이서우를 한참이나 번갈아 쳐다보던 남작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겉으로 봐도 아들의 상태가 빠르게 호전되고 있으니 안도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한숨 속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바쁠 텐데 자꾸 귀찮게 해서 미안하지만 나와 잠시 이야기를 좀 하세.”
“네, 그러지요.”
남작은 하인을 시켜 아들을 돌보도록 하고는 이서우와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