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레벨이 갑이다
34화
“헉!”
거래 중개소에서 확인한 아이템 가격은 절로 헛바람이 나오게 만들었다.
‘미친. 아무리 영웅 등급이지만 엄청나네. 유일이나 전설 등급은 대체 얼마라는 소리야.’
추가 옵션이 2개여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아이템 가격이 더 비쌌다.
수요가 많아지면서 아이템 가격도 상승했고, 무엇보다 7강이 되어 있어 조금 더 가격이 높았다.
이서우는 2천만 원에 올리고서는 창을 닫았다.
레벨 100을 찍으려면 뉴 월드에서 1년을 보내야 한다.
그렇게 고생해도 영웅 등급 이상의 아이템을 얻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던전에서 얻지 못하면 결국은 구입을 결정하게 되는데, 무기를 중요시하니 영웅 등급으로 맞추지만 나머지는 희귀 등급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동안 모은 돈을 다 들이부어야 했다.
골드 가격이 잘 떨어지지 않는 게 바로 그런 이유였다.
오픈한 지 거의 넉 달이 지난 지금은 조금씩 떨어지는 추세지만 그것도 오르락내리락해서 쉽게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게 유저들 대부분의 판단이었다.
‘생각보다 쉽게 1천만 원은 확보했네. 마나 물약은 어떤가 볼까?’
우편함을 열었더니 물약이 283개나 팔려 있었다.
“헉, 이것도 대박이네.”
나름대로 꼼수를 썼기 때문에 100개만 팔려도 좋겠다 싶었는데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즉구에 이 정도 팔렸다는 건 일단 가치는 있다는 거네. 그럼 차라리 4골드로 낮추고 조금 더 빨리 팔아 버리자.’
괜히 1골드 더 비싸게 팔려다가 며칠 동안 질질 끄는 것보다 빨리 팔아서 골드화시키는 게 낫다.
어차피 정해진 값에 판매를 할 것이어서 거래 중개소에 올렸다.
‘어중간하네.’
물건을 올리고 물약 재료를 산 다음 창을 닫았다.
재료는 적당히 구입했다.
너무 싹쓸이를 하면 값이 올라간다.
대충 정리를 마치고 뱀파이어 킹을 잡으러 갈까 했는데 시간이 어중간했다.
워낙 뱀파이어 숫자가 많아서 하루 만에는 퀘스트를 완료할 수 없을 것 같아 고민이 되는 것이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제작하면서 아이템 팔리면 현금화해서 빚 일부 갚고 접속 베드를 사자.’
아이템이 팔리면 3천 골드 이상이 생기기에, 이서우는 깔끔하게 2천만 원을 갚고 1천만 원으로 고급형 접속 베드를 살 결심을 했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걱정할까 봐 염려도 되었고, 빚이 있는데 접속 베드 산다는 것도 내키지 않아 미루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빚부터 다 갚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만, 접속 방은 공간 절약을 위해 비스듬히 눕혀 놓아 오래 접속하면 불편했다.
그럴 거라면 일부 빚을 갚고 고급형을 구입해서 편안하게 게임을 하는 게 낫다는 게 이서우의 판단이었다.
결심을 내린 이서우는 마나 물약 제조를 걸어 두고 아이템이 팔리길 기다렸다.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는 게 싫어서 거래 중개소에서 여러 아이템을 검색하며 시세를 확인했다.
‘아이템 시세 확인도 유료 구매를 해야 한다니.’
이서우가 가입한 사이트에서도 다양한 아이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아이템별로 따로 시세 추이라든지, 어떤 아이템이 인기가 있는지, 가격이 향후 오를지 내릴지 등 아주 상세히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유료라는 거다.
시간이 돈인 세상이니 큰 불만은 없지만, 가난한 사람은 그 어떤 혜택도 누릴 수 없다는 게 씁쓸했다.
1시간 정도 물건을 살피는데 장비가 팔렸다는 메시지가 왔다.
이서우는 돈을 찾고, 완성된 마나 물약을 올렸다.
골드를 현금화한 뒤 바로 접속을 종료했다.
뉴 월드 측에서 이미 현금 거래를 공식적으로 인정을 했기에 게임 내에서도 바로 골드를 사고팔 수 있었다.
뉴 월드 홈페이지에 접속한 이서우는 접속 베드 사양을 살펴보았다.
“맞춤형도 있네. 헐, 풀 옵션은 가격이 후덜덜이네.”
맞춤형은 스페셜형보다 한 등급 좋은 재료를 사용해서인지, 가장 저렴한 게 7천만 원이었다.
재료의 품질을 한 등급 올릴 때마다 3천에서 5천만 원 이상씩 가격이 상승했다.
뉴 월드가 제공하는 가장 최고급 재료로 모든 옵션을 다 적용한다면 10억 이상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나왔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부자들은 자신만이 선호하는 게 있는데, 금이나 보석,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가죽과 천 등을 주문하면 수십억이 되는 접속 베드도 있었다.
이서우는 고급형을 주문했다.
저녁 시간이니 오늘은 배달이 안 되고, 내일 오전에나 설치가 가능했다.
이서우는 바로 대부업체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확한 거래를 위해 에스크로를 이용했다.
이자로 1천만 원, 원금으로 1천만 원을 지불했다.
이자와 원금을 갚았다는 증명을 확실히 기록으로 남긴 이서우는 승인을 했다.
전자 기록은 아주 강력한 증거 효력을 가졌고 안전해서, 법적인 다툼이 생기면 이서우가 유리하다.
-그렇게 앓는 소리를 하더니 하루 만에 떡하니 구해 오셨네. 역시 사람은 급하면 길을 찾는다니까. 안 그래요, 고객님?
“부모님이나 그만 괴롭히시죠.”
-걱정 마세요, 고객님. 돈만 꼬박꼬박 잘 주시면 일절 귀찮게 할 일이 없거든요. 그럼 다음 달에도 잘 부탁합니다, 고객님.
비꼬듯 말하는 대부업체 사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서우는 부모님이 운영하는 가게로 가 볼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가 가면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다.
아직 몸도 다 회복되지 않은 자식에게 일을 시킬 부모는 없었다.
‘빚부터 무조건 빨리 갚자. 그게 부모님을 돕는 거야.’
고생하실 부모님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지만 지금 이서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많은 돈을 버는 것이었다.
이서우는 인터넷에 접속했다.
증강 현실과 가상현실을 접목한 기기나 홀로그램 기기가 없어 구형 스마트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서우는 뱀파이어 킹에 대한 정보를 살폈다.
어나더 월드 시절에도 있었던 몬스터지만, 지금처럼 대규모 형태의 마을을 형성하지는 않았었다.
“인기가 없는 녀석인가 보네.”
뱀파이어에 대한 정보 자체가 별로 없었다.
잡템도 잘 안 주고, 준다 해도 쓸데가 없는 것들이니 좋아할 유저가 없었다.
보이는 건 퀘스트 정보밖에 없었다.
대부분 쉬운 퀘스트여서 그런지 따로 정보를 구입하지는 않아도 볼 수 있었다.
“로드는 레이드 몬스터여서 인기가 있는데 킹은 별로네. 하긴 그렇게 뱀파이어들 속에 둘러싸여 있는데, 네임드 잡으러 누가 거길 가겠어. 차라리 던전을 가지.”
뱀파이어에 대한 정보를 넘기고 귀족에 대한 것을 살폈다.
루테인 남작과 인연을 맺으면서 다른 귀족과도 연결될 확률이 높아졌다.
우우우우우웅!
“짜식, 타이밍 하고는. 그래, 끝났냐?”
-어. 오늘 삼결살에 쐬주 한잔 하자. 너 우리 가던 거기 알지?
“삼겹두판? 거기 아직도 있어?”
-그래. 30분 뒤에 거기서 보자.
“종명이는?”
-시간 맞춰서 도착한다고 했다.
“그래. 그럼 조금 있다 보자.”
이서우는 미소를 지으며 통화를 끊었다.
택시를 호출한 뒤 식탁에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 늦는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한창 바쁜 시간일 테니 전화나 문자를 남기는 것보다는 메모가 나을 것 같아 그렇게 한 것이다.
밖으로 나가니 택시가 오는 게 보였다.
목적지를 말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이서우는 편안하게 자율 주행으로 움직이는 택시에 누웠다.
5년 전만 해도 자율 주행 차들은 골목을 어려워했다.
하지만 지금은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길부터 오프로드까지, 못 가는 곳이 없었다.
G사는 이를 위해 오랫동안 데이터를 축적했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뉴 월드가 역사에 한 획을 그을 게임이라면, G사의 인공지능 기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역사를 쓰고 있었다.
이서우는 삼겹두판으로 갔다.
예전에 이서우는 호기심에 사장님에게 물었다, 왜 삼겹 한 판도 아니고 두 판이냐고.
사장님 왈, 한 판은 섭섭하다나?
그 말을 듣고 웃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이 꽤 많았다.
“몇 명이세요?”
“3명요.”
“원하는 자리에 편하게 앉으세요.”
“네.”
이서우는 구석의 조용한 자리로 갔다.
2020년에나 볼 수 있었던 테이블 촉감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연기 흡입구를 보니 어릴 때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고기를 사 와서 온 집 안이 연기로 자욱했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눈이 매워서 고생을 했지만 이서우에게는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 부모님과 즐겨 먹던 음식들이 좋았다.
자리를 잡고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는데 박민수가 왔다.
“일찍 왔네?”
“나도 방금 왔다.”
“주문은?”
“아직.”
“종명이도 곧 올 테니 미리 시켜.”
이서우는 삼겹살 5인분과 소주를 시켰다.
술을 그다지 잘 마시지는 않지만, 친구들과 가볍게 즐기며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밑반찬이 깔리고, 붉은색과 흰색이 선명하게 구분된 삼겹살이 나왔다.
참숯이 가운데 자리를 잡고 불판이 올라오자, 류종명이 도착했다.
“미안하다. 좀 늦었다.”
“타이밍 잘 맞춰 왔네, 뭐.”
“오랜만에 서우 고기 굽는 솜씨 좀 볼까?”
“야, 양심도 없이 환자한테 시키냐? 이 형님 힘들다.”
“엄살은. 알았다. 오늘은 내가 아주 바짝 태워서 바치마.”
“됐다, 됐어. 내가 한다.”
타 버린 고기를 상상만 해도 끔찍한지 이서우는 얼른 박민수에게서 집게를 뺏어 들었다.
살짝 달궈진 불판에 삼겹살을 나란히 깔자 지글거리는 소리가 침샘을 자극했다.
박민수가 잔을 돌리며 소주를 따라 주었다.
고기가 아직 덜 구워졌지만 가볍게 한 잔 걸치며 시동을 걸었다.
밑반찬을 한두 젓가락 집어 들고는 예열을 위해 다시 한 잔 나누었다.
“술이 많이 고팠나 보다?”
“요즘 바빠서 통 기회가 있어야지.”
“그러게 말이다. 뭔 영광을 보겠다고 맨날 야근을 밥 먹듯이 했는지 모르겠다니까.”
박민수와 류종명은 미친 듯이 일만 했다.
요즘은 대학에 그렇게 목숨을 거는 시대가 아니다.
전문 기술만 있어도 취직도 잘되고, 고액 연봉을 받을 수도 있다.
북한이 백기를 들면서 군대도 의무가 아니어서 많은 청년들이 20대 초반부터 일터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박민수와 류종명은 몇 년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을 하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마침 그때 이서우가 깨어났다.
그들은 과거 함께 지내며 즐겁게 보내던 때를 떠올리며 인생의 즐거움을 다시 한 번 누려 보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정해진 일만 잘 소화해도 꽤 보수가 좋기 때문에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 역사적인 순간이 바로 오늘이었다.
원래는 토요일로 할까, 하다가 주말 내내 놀아 보자는 생각에 약속 시간을 당긴 것이다.
고기가 익고 술잔이 도는 횟수도 늘어났다.
술이 술술 들어가니 류종명이 살짝 태클을 걸었다.
“적당히 마셔라. 그러다 파티 전멸시킨다.”
“전멸할 삘이면 열심히 튀어야지.”
“그러다 소문 퍼져서 차단당할라.”
“장사 하루 이틀 하냐. 요령껏 해야지.”
“아예 접속 안 되면 어쩌려고?”
“그건 좀 문제네.”
알코올을 지나치게 섭취하면 접속이 되지 않는다.
뉴 월드 측에서 걸어 둔 안전장치였다.
하지만 한 병 정도는 크게 문제가 없어, 각자 양을 잘 맞춰서 마셨다.
“참, 둘 다 52렙이지?”
“이번 주말 내내 달리면 55까지는 찍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러는 넌?”
“너 저번에 나랑 한 약속 기억나지?”
“나 따라잡으려면 10년은 이르다니까 그러네.”
“접속해서 확인하라고 그냥 두려 했는데, 직접 형님 소리 들어 봐야겠다.”
이서우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두 사람은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아니, 며칠이나 됐다고 52레벨을 넘었단 말인가.
두 사람은 불신의 표정으로 이서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서우는 힘주어 말했다.
“이 형님 56레벨이다.”
“뭐? 56렙? 야, 너 구라지? 어디서 약을 팔아!”
“구라는 개뿔. 접속하면 들통날 구라를 왜 치냐?”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벌써…….”
“이 형님이 말했잖냐, 곧 따라잡는다고.”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56렙을 찍냐? 버그 쓴 거 아냐?”
“버그 같은 소리 하네. 얼른 형님이라고 안 불러?”
“접속해서 확인부터 해야지.”
류종명은 똥 씹은 표정을 하고는 사실 확인부터 주장했다.
이서우는 그러라며 어깨를 으쓱하면서 기분 좋게 술잔을 털어 넣었다.
잘 익은 삼겹살 한 점을 안주로 먹으니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이서우의 레벨 소식을 들은 두 사람은 술맛이 떨어졌는지 얼른 접속 방에 가자고 했다.
개선장군凱旋將軍이라도 된 듯 이서우는 기분 좋게 접속 방으로 갔다.
접속하자마자 류종명에게서 귓말이 왔다.
-형, 님.
-크크크, 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