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레벨이 갑이다
38화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TV로만 보다가 실제로 보니 더 미인이시네요.”
“아, 네. 고맙습니다.”
설아는 형식적인 대답만 하고는 시선을 바로 했다.
그녀는 지금 글로벌사의 본사에 와 있었다.
글로벌 마케팅 책임자의 초대로 작은 회의실에 앉아 있는데, 다른 게임 채널의 진행자들도 있었다.
그중 한 사내가 설아의 옆에 앉아서 인사를 해 왔고, 평소 바람둥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기에 형식적인 대답만 하고 관심을 주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눈치도 없이 자꾸 말을 걸어왔다.
“설아 씨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아, 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진행을 하실 수 있으세요? 제가 아직 초짜라 꼭 좀 배우고 싶네요.”
“그냥 열심히 하는 거죠, 뭐.”
“괜찮으시면 제가 그 노하우를 좀 배울 수 있을까요?”
“죄송해요. 제가 누굴 가르칠 만큼 잘하지 못해서요.”
“에이, 여기 있는 진행자들 중에 설아 씨만큼 하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요.”
설아의 인상이 절로 일그러졌다.
맞은편에 3명의 진행자가 있는데도 대놓고 저런 말을 하다니.
설아는 예의가 없는 사람을 정말 싫어했다.
맞은편에 앉은 남녀 진행자들도 사내의 말에 짜증이 나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괜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다들 참는 분위기였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이거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글로벌 마케팅 부서의 총책임자 김승조입니다. 일단 영상을 보면서 이야기하죠.”
글로벌 마케팅 총책임자는 글로벌사의 핵심 인물 중 하나다.
회사의 모든 이미지는 그의 손에서 탄생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뉴 월드라는 게임을 어떻게 오픈할 것이며, 어떤 식으로 패치를 진행하고, 어떻게 더 많은 유저들에게 게임을 알릴지 등 상당 부분에 관여한다.
한데, 그런 중책을 맡은 인물치고는 젊었다.
많아도 4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내가 책상을 가볍게 툭툭 치자 테이블 중앙에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아시다시피 이제 게임이 오픈한 지도 넉 달이 되네요. 가입자도 드디어 1억 명이 넘었고요. 오픈을 하면서 대규모 이벤트를 할까 하다가 레벨도 낮은데 무슨 혜택이 돌아갈까 싶어 미루었습니다. 내부적으로 1억 명을 돌파하는 시점에 대규모 이벤트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고요. 그래서 여러분들을 모셨습니다.”
김승조가 말을 하는 동안에도 홀로그램의 영상이 바뀌었다.
그것은 뉴 월드의 지도로, 현재 유저들이 플레이를 즐기고 있는 대륙의 모습이었다.
세로로 긴 직사각형의 모습이었는데, 미국 땅을 세워 놓은 것과 유사했다. 하지만 미국보다 훨씬 컸다.
“대규모 이벤트는 전 대륙에 걸쳐 진행할 계획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모든 대륙에서 벌어지는 일을 골고루 시청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희들끼리 서로 장소가 겹치지 않았으면 한다는 거죠?”
“N게임넷의 이설아 진행자님께서 말씀하신 대롭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아무래도 홍보 효과가 반감될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런 걸 결정할 위치가 아니에요.”
“겸손하시네요. 이미 방송사 측에서는 진행자분들의 의견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
이설아는 인위적으로 지역을 정하고 진행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표정이 그다지 밝지는 않았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꾸준히 좋은 관계가 유지되지 않을까요?”
“지금 하신 말씀은 듣기에 따라 갑질로 여겨질 수도 있어요.”
“제 목소리에서 그런 느낌이 드나요?”
두 사람의 신경전이 치열했다.
어떻게 보면 이설아의 행동은 참으로 위험한 것이었다.
뉴 월드를 이용하는 유저가 1억 명이 되었다.
넉 달 만에 이룬 쾌거였다.
앞으로 더 늘면 늘었지 절대로 줄지 않는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관된 평가였다.
엄청난 발전이 확실시되니 많은 기업들이 뉴 월드에 잘 보이려 하고 있다.
그중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건 누가 뭐래도 게임 채널이다.
뉴 월드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몰락을 할 수도, 성장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설아는 부당하다고 여기는 것이라면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녀가 N게임넷의 메인 진행자로 오를 수 있었던 건 그런 그녀의 노력과 능력 때문이었다.
“오해했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지금 하고 계신 제안은 게임 채널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해칠 수도 있는 부분이에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방송사도 중복이 되어서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보다 자기들만의 공간에서 좋은 방송을 만들어 가는 게 더 이득이 아닐까요?”
김승조의 차분한 말에 이설아도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인정할 건 인정한다. 그게 이설아의 큰 장점 중 하나였다.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 보지도 않고, 제가 경솔했네요.”
“아닙니다. 당연히 지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뉴 월드는 결코 여러분들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럼 이야기를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이번 대규모 이벤트는 몬스터 침공을 방어하는 게 목적입니다. 아마 조만간 그 징조가 나타날 겁니다. 현실감을 위해 이벤트 공지하고 해당 날짜가 되어 급히 몬스터를 마을로 보내는 낡은 형식이 되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니까 몬스터들이 이상행동을 보일 거고, 그런 현상이 고조되었을 때 몬스터들을 유저들이 모여 있는 마을로 보낼 거라는 뜻인가요?”
“네. 엄청난 규모가 될 겁니다. 새로운 영웅들도 많이 나오겠죠. 여러분들은 그런 영웅들을 찾아 영상을 찍고, 시청자들에게 소개해 주시면 됩니다.”
“쉬운 일은 아니네요.”
“네. 그래서 지역을 골고루 나눌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진행자들은 김승조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영웅이 어디서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한곳에서만 몰려 있지 말라는 뜻이었다.
김승조의 말이 계속 이어졌고, 게임 진행자들은 그의 말을 경청하며 궁금한 것은 그때그때 물어보았다.
김승조는 중간에 이야기가 끊겨도 표정 변화 없이 옅은 미소를 잃지 않고 응대해 주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진행자들의 표정은 밝아졌으며, 후반부로 갈수록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 * *
“어서 오게. 그렇지 않아도 자네가 오기를 기다렸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만 지냈으면 좋겠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지. 그리고 제다가 빨리 엄마를 받아들여야 되고.”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빠른 시일 내로 관계도 회복이 될 것입니다.”
“고맙네. 이게 다 자네 덕분이라네.”
“아닙니다. 남작님의 간절함이 통한 것이지요.”
남작은 이서우의 겸손한 태도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참, 지난번의 이야기를 마저 이어 가야지.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를 했었나?”
“수백 년 전부터 지하 공간이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맞네. 이곳은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곳이라네. 자네는 누가 이곳을 만들었는지 알고 있나?”
“귀족이 아닐까요?”
“아닐세.”
“네? 그러면 누가…….”
이서우는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지하에 거대한 공간을 만들었을지 궁금했다.
“나도 처음 발견했을 때, 참으로 궁금했다네.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도 많이 했지. 호기심이 일면 끝을 보는 성격이거든.”
“그러시군요.”
제다가 자신을 닮았다고 하더니 확실했다.
“내가 알아낸 바로는 이곳은 원래 제국이 관리하던 영토가 아니었네. 워낙 산세가 험준하고, 강력한 몬스터들도 많았기 때문이지. 그러다가 어느 시점부터인지 강력한 몬스터들이 사라졌네. 인간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부터지. 난 왜 강한 몬스터들이 보금자리를 버리고 사라졌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네. 끈질긴 추적 끝에 그 해답을 찾았지.”
남작은 한창 심각하게 이야기하다가 말을 끊었다.
목이 타는지 식어 버린 차를 비우고는 이서우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네는 혹시 그 이유를 알겠나.’라는 뜻이 담긴 듯한 눈빛이었다.
이서우도 궁금하기는 했다.
몬스터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던 보금자리를 피해 도망갈 이유는 더 강력한 침략자가 나타났을 때뿐이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이곳의 생태를 위협했을까.
“혹시 드래곤인가요?”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그 존재는 놀랍게도 인간이었네.”
“인간요?”
“그렇다네. 그것도 단 한 사람.”
이서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 한 사람에 의해 이 넓은 지역의 판세가 바뀌었다는 말인가.
그게 가능이나 할까.
이서우는 남작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게 질문이 자꾸 튀어나왔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내셨는지요.”
“알아냈지. 아주 힘들게 알아냈네.”
“그 사람이 누굽니까?”
“그분은 정말 전설적인 분이시네.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그분이 존재했는지도 모르지만, 마나를 다루는 기사나 검사 중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들은 알고 있더군. 심지어는 7서클 이상의 고위급 마법사들도 그분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그 사람이 누구냐고 다시 묻고 싶었지만, 남작은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해 멍한 눈빛이었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그냥 두면 알아서 술술 말을 하니 이서우는 괜히 중간에 말을 끊지 않고 기다렸다.
그리고 그는 다음 이어진 남작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분은 바로 펠렌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이시네.”
“네? 펠렌 님이라고요?”
“그래. 자네는 혹시 들어 봤나?”
“……네. 저도 그분의 이름을 들어 보기는 했습니다.”
“그렇군. 역시 자네처럼 강자가 그분의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을 리가 없지.”
남작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서우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서우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펠렌이 여기서도 등장할 줄이야. 내가 이곳에서 게임을 시작한 게 다 이유가 있었단 말인가.’
펠렌에 대한 정보가 모일수록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마치 거대한 퍼즐 조각이 맞춰지면서 하나의 그림이 되어 가는 과정처럼 여겨졌다.
“그분에 대해 또 아는 게 있으신지요.”
“나도 이곳을 그분이 만들었다는 것밖에 모르네. 왜 이런 수고를 하면서 이곳을 만들어야 했는지, 그 목적에 대해서는 결국 알아내지 못했네. 그럴 시간적 여유도 없었지.”
“아!”
그러던 중에 아내의 일이 터졌을 테니 조사를 더 진행할 수 없었으리라.
“사실, 이 이야기를 자네에게 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을 많이 했었네. 그런 절대 강자가 남긴 곳이라면 분명 큰 위험이 있을 테니까 말이야.”
“한데, 왜 제게 이야기를 해 주신 겁니까.”
“그냥 말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네. 마음이 간다고나 할까.”
“그렇군요.”
가족을 다시 모이게 해 준 은인이었으니 못 할 말이 뭐가 있을까.
게다가 홀로 모든 것을 이겨 내며 해결해 가는 모습을 보니 이서우라면 이번 일도 충분히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낼 거라 여겼다.
“하지만 조심하게. 나도 그 밑에는 뭐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네. 그분이 남기신 거라는 사실을 알고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네.”
“제가 가서 뭐가 있는지 보겠습니다.”
“이걸 가져가게.”
“이게 뭔가요?”
“고위급 신관에게 받은 것이네. 위험한 순간에 자네를 도와줄 것이네.”
“이렇게 귀한 것을…….”
“아닐세. 아내를 치료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얻었는데, 소용이 없었네. 아내가 자네 덕에 완치되었으니 이건 자네가 갖는 게 맞아.”
“가, 감사합니다.”
-신성의 목걸이를 획득하셨습니다.
이서우는 새벽별처럼 반짝이는 목걸이를 인벤토리에 잘 넣어 두었다.
“바쁜 사람을 너무 오래 붙잡았구먼. 지금 바로 갈 텐가?”
“잠시 정비를 하고 움직이겠습니다.”
“그래, 현명한 선택이야. 그럼 가기 전에 한번 들르게.”
“네, 남작님.”
이서우는 인사를 하고는 남작 성을 나왔다.
펠렌이 만든 곳이라면 미리 준비를 하고 가는 게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