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레벨이 갑이다
47화
‘더럽게 크네.’
성안에 들어왔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규모가 중세 시대의 성보다 몇 배나 크니 어디서 찾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나마 가장 화려해 보이는 방으로 가서 살펴봤는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 특별해 보이는 반지는 아닌데.”
이서우는 퀘스트를 받을 때 본 그림을 다시 한 번 살폈다.
선명한 홀로그램으로 뜨니 반지의 외형은 쉽게 눈에 익었다.
“여긴 뭐지?”
가장 화려한 방 근처에 굳게 닫힌 문이 있었다.
힘으로 밀어도 열리지 않았다.
쾅!
마나를 실어 발로 차 버리자 쇠로 된 문이 떨어져 나갔다.
-침입자 발생! 침입자 발생!
불이 환해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지만 이서우는 무시하고 안을 살폈다.
“와, 대박!”
이서우는 온갖 화려한 장비들과 골드가 있는 것을 보며 얼른 달려갔다.
-소유할 수 없는 아이템입니다.
-소유할 수 없는 골드입니다.
“그림의 떡이네.”
얼른 인벤토리에 넣으려 했으나 잡을 수가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이서우는 액세서리가 있는 곳으로 갔다.
하나하나가 영웅급 이상의 포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서우는 반지란 반지는 전부 꼼꼼히 살폈다.
하지만 남작 부인의 반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5레벨을 보상으로 주는데 이렇게 쉬우면 말이 안 되지.’
이서우는 인내심을 가지고 킹의 방 주위를 열심히 뒤졌다.
“다 똑같아 보이는데 무슨 옷이 이리 많지?”
검은색 일색의 한결같이 똑같은 디자인이지만, 수백 벌에 달하는 옷이 걸려 있었다.
신발도 생김새가 같은 것이 수백 켤레였고, 벨트와 나비넥타이도 한쪽에 빼곡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서랍이라는 서랍은 다 열어 보면서 꼼꼼히 살폈다.
결국 이서우는 온 방을 다 뒤졌지만 반지를 찾지 못했다.
“아! 혹시!”
낙담한 얼굴로 터덕터덕 긴 복도를 걷는데,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서우는 급히 뱀파이어 킹의 거처로 갔다.
이번에는 반지가 있을 법한 곳만 살피지 않았다.
툭툭.
쿵쿵.
벽을 손으로 두드리기도 하고, 바닥을 발로 차면서 한 뼘 단위로 쪼개서 살폈다.
거대한 사이즈의 침대에 도달했을 때였다.
“찾았다!”
발로 바닥을 차는데, 속이 빈 소리가 났다.
이서우는 가로세로 5미터가 넘는 대형 침대를 잡고는 뜯어내듯 힘을 주었다.
거대한 침대가 힘없이 뒤집어졌다.
계단이 보였고, 이서우는 차분히 길을 따라 내려갔다.
이상하게 뉴 월드는 지하를 좋아하는구나, 라며 잡생각을 하는데 금세 계단이 끝나 버렸다.
문을 억지로 열어젖히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찾아도 반지가 보이지 않자 이서우는 비밀 장소를 떠올렸는데, 역시나 그의 예상이 맞았다.
안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벽이 온통 검은색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다.
가운데에는 흔히 박물관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투명한 유리 박스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아름다운 보석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소유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안 될 줄은 알았지만 견물생심이라고, 혹시나 싶어 손을 뻗어 보았지만 역시나였다.
유리 상자에는 원하는 것이 없어 서랍들도 싹 다 열어 보았다.
“웬 책이지?”
화려한 방과는 어울리지 않는 낡은 가죽들이 보였다.
뭔가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었는데, 이서우는 의아해하며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자동 읽기를 실행하시겠습니까?
“그래.”
이서우는 간단히 대답하고는 기다렸다.
드디어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 인간들에게 수모를 당했던 날을 떠올리며 최대한 많은 인원을 모아라.
그날이 오면 내가 명령하겠다.
커다란 글씨로 가죽을 채운 내용이 끝나자 이서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날이라니. 뭐, 내가 싹 처리를 했으니 상관은 없나. 근데, 이 명령을 내린 게 누구지?”
뱀파이어 킹에게 명령을 내릴 정도면 그보다 훨씬 강한 존재인데, 이서우가 아는 바로는 뱀파이어 로드밖에 없었다.
“설마, 로드가 개입됐나?”
120레벨의 레이드 몬스터가 왜?
연결점이 딱히 보이지 않았다.
정보가 너무 부족해 결국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이기로 하고 이서우는 기록물을 내려놓았다.
“이건 지도 같은데?”
이서우는 그림이 그려진 가죽을 보았다.
이미 한번 유사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고대 아르곤 산맥의 주인이 남긴 지도’를 획득하셨습니다.
“어라, 이건 습득이 가능하네? 설마, 유저에게서 뺏은 건가.”
이서우는 지도를 유심히 살폈다.
산맥을 넘어가는 지점을 나타내는 것 같았는데, 대충 어딘지 알 것 같았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이서우는 지도를 얼른 집어넣고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렸다.
“찾았다!”
수많은 서랍 중 한 곳에서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서우는 조심스럽게 반지를 넣고는 비밀 장소를 빠져나왔다.
뱀파이어 성을 벗어나려는데, 희미하지만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뭐지?”
이서우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이동했다.
* * *
“살려 주세요!”
“야, 그만 떠들어. 여기 누가 온다고 자꾸 소리를 치고 난리야, 난리가!”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손가락만 빨고 있어?”
“하루 온종일 지치지도 않냐?”
“가만있는 게 더 지겹다. 이제는 재료도 다 떨어져서 제작도 못 하고. 뱀파이어 킹을 잡으러 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지금 날 탓하는 거냐?”
“두 사람 다 그만해. 유치하게 왜 그래.”
하루 종일 감옥에 갇혀 있다 보니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대화가 싸움으로 번지기 일쑤였다.
특히 가는 길에 뱀파이어 킹이나 잡고 가자고 제안한 송철규는 지도 이야기만 나오면 발끈했다.
최근 뱀파이어 관련 물건이 비싸게 팔린 것을 보고 그런 것인데, 그게 발목을 잡을 줄이야.
송철규도 처음에는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계속 그 이야기가 나오니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럴 때마다 유수영이 제지를 해서 싸움은 길게 가지 않았다.
“그냥 자살이나 하자니까.”
“차라리 버티면서 저절로 빠져나가길 기다리는 게 더 나아.”
“기다리는 게 짜증 나니까 그렇지.”
송철규는 답답했는지 자살하자고 투덜거렸지만 유수영이 반대했다.
“살려 주세요!”
“어휴, 못 말려. 수근아, 네가 소리칠 때마다 NPC들이 깜짝깜짝 놀란다.”
“내가 원래 목청이 좀 크잖아.”
유저와 NPC가 갇혀 있는 감옥이 달라 서로 부딪칠 일은 없지만, 정수근이 악을 쓰면 다들 화들짝 놀랐다.
그렇지 않아도 언제 뱀파이어가 와서 자신들을 해칠까 하는 생각에 무서운데, 밤낮 없이 소리를 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루 온종일 들었으니 이제 적응이 될 만한데도 NPC들은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났다.
“근데 수영이 너, 괜찮아?”
“뭐가?”
“이번에 이벤트 단단히 벼르고 있었잖아.”
“최대한 레벨이나 올릴까 했는데 어쩔 수 없지, 뭐. 이럴 때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 주면 얼마나 좋아.”
“백마 탄 왕자 같은 소리 하네. 누가 너 같은 왈가닥을 데려가냐?”
“야, 송철규! 너 앞으로 힐 안 준다?”
“뻑 하면 힐 안 준대. 어차피 여기서 나가지도 못하는데 힐 따위…….”
쾅!
한창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굉음이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들 바짝 긴장했다.
설마 뱀파이어들의 먹이가 되는 건가.
아니면 뱀파이어화시켜 노예로 부려 먹으려는 건가.
짧은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괜찮으세요?”
“…….”
중저음의 목소리가 지하 감옥에 울렸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설마, 하는 기대감으로 감옥 안으로 들어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지하 감옥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바로 이서우였다.
이서우는 살려 달라는 희미한 목소리를 따라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목소리가 들린다 했는데, 역시나였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꺼내 드리겠습니다.”
이서우는 사람이 많은 NPC들이 갇힌 감옥 문부터 열었다.
그리고 유저 셋이 갇혀 있는 곳으로 갔다.
“잠시만 뒤로 물러나 계세요.”
“네? 아, 네.”
이서우는 감옥 문을 잡더니 힘으로 뜯어 버렸다.
발로 차서 문을 부수는 것도 놀라운데, 이 견고한 걸 손으로 뽑아내다니.
“뱀파이어가 언제 나올지 모르니 일단 밖으로 나가세요!”
이서우가 소리쳤지만 누구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때 유수영이 조심스럽게 이서우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마 자기들끼리 가는 게 무서워서 그럴 거예요. 대부분 포르틴 마을 사람들이니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그랬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포르틴 마을까지 안전하게 호위해 드릴 테니 따라오세요!”
이서우의 말에 그제야 NPC들이 안도하며 이서우의 뒤를 따랐다.
‘차라리 잘됐네. 포르틴 마을에 한번 가 보고 싶었는데.’
포르틴 마을은 다론 마을과 반대편에 있었는데, 중간에 루테인 마을이 끼어 있어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었다.
물론 뜸하다고 해서 인원이 적은 것은 아니고, 두 마을에 비해 적다는 뜻이다.
포르틴 마을의 위치가 사실 조금 애매했다.
보통이라면 다론 마을에서 1차 전직을 끝낸 유저들이 다음 마을로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가까이에 위치해 놓는다.
한데 포르틴 마을은 50~80레벨 유저들이 이용하기 좋은 곳인데도 루테인 마을보다 거리가 더 멀었다.
왜 이렇게 배치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게임을 즐기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수영아, 안 찾아볼 거야?”
“뭘?”
“지도.”
“야, 지금 그게 문제냐? 여기가 이렇게 쑥대밭이 됐는데, 다른 뱀파이어들이 가만히 있겠어? 아마 조금 있으면 우르르 몰려올걸. 난 또 갇히기 싫다.”
듣고 있던 정수근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렇게 험한 꼴을 당하다가 운이 좋아 빠져나왔는데, 또다시 위험을 감수하라니.
“나도 수근이랑 같은 생각이야.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걸 지금 어떻게 찾아? 괜히 그러다가 더러운 꼴 보고 싶지 않아.”
“알았다, 알았어.”
유수영까지 나서자 송철규도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대화를 끝낸 그들은 얼른 밖으로 빠져나가는 NPC들 무리에 끼어들었다.
유수영은 앞서 걷고 있는 이서우의 등을 바라보더니 그에게 다가갔다.
“인사가 늦었네요. 유수영이라고 해요. 구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마침 뱀파이어 킹을 잡을 일이 있어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겁니다. 소리치던 분이 아니었다면 저도 몰랐을 겁니다.”
“거봐, 내가 한 건 했지? 정수근이라고 합니다. 구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잘난 척은. 저분이 아니었으면 나오지도 못했어. 송철규입니다.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셋은 고개까지 깊이 숙이며 예의를 갖춰 고마움을 전했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지만, 이서우도 감사 인사를 받으니 기분은 좋았다.
“마침 잘됐네요. 제가 포르틴 마을로 가는 길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안내 좀 해 주시겠어요?”
“포르틴 마을이 처음이세요?”
“네. 별로 갈 일이 없더라고요.”
“하긴, 빠르게 레벨 업을 하려는 분들은 대부분 잘 안 가는 곳이긴 해요. 하지만 던전도 꽤 있고 퀘스트도 많이 줘서 꽤 괜찮은 곳이에요. 우리가 안내할게요.”
이서우는 포르틴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는 알지만 가 본 적이 없어 길을 잘 모른다.
NPC들이 어디 출신인지 알기에 혹시나 하고 물은 것인데, 다행히 그가 구한 유저들이 알고 있어 안심이었다.
가는 동안 몬스터가 종종 튀어나왔지만 몬스터 레벨이 너무 낮아 이서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니 유수영과 그녀의 친구들이 알아서 몬스터를 처리했다.
인원이 많아 포르틴 마을에 도착하는 데 일주일이 소요되었다.
현실 시간으로 하루를 날렸지만 이서우는 아깝게 여기지 않았다.
NPC와 친해지면 특수 퀘스트를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