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레벨이 갑이다
57화
“헉!”
베손은 자신 있게 말을 하고는 검을 가볍게 든 채 공격이 오기를 기다렸다.
한데, 갑자기 이서우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게 아닌가.
화들짝 놀란 베손은 급히 검을 움직였다.
“소드 배리어sword barrier!”
짧은 기합성과 함께 베손의 정면 공간이 아지랑이처럼 살짝 일그러졌다.
소드 마스터들의 전유물인 기술로, 검에 마나를 실어 일정 범위를 공격함과 동시에 방어하는 기술이었다.
방어에 조금 더 치중되어 있어 소드 배리어로 불렸다.
베손은 겸손하게 소드 마스터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는 표현을 썼지만, 이곳에 와서 검술에 전념하며 최근 그 경지에 올랐다.
과거 그가 따르던 백작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더 이상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다.
과거에도 딱히 권력에 대한 욕심은 없었지만, 주군으로 섬겼던 백작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었다.
불의의 사고를 겪으면서 베손은 그 모두가 쓸모없는 일이라는 회의감이 밀려왔다.
‘그때의 사건이 오히려 지금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게 해 준 것일지도.’
소드 배리어를 펼치며 베손은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상대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서우의 대검이 배리어에 부딪치는 순간, 베손은 자신이 얼마나 큰 착각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깡! 퍼석.
배리어가 무참히 깨어졌다.
“이런!”
놀란 베손은 급히 지면을 밟으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서우가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물러서는 베손만큼 빠른 속도로 다가가 대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첫 공격보다 마나를 더 담았다.
잠재력이 생기면서 느낀 것은, 공격과 방어에 기존보다 더 많은 마나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챙!
피할 길이 보이지 않자 베손은 결국 검을 들어 이서우의 대검을 막았다.
하지만 이서우의 힘이 너무 강해 마치 태산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이서우도 최근에서 무기에 마나를 씌워 더 강력한 공격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베손과 같은 입장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서우가 더 강력한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펠렌의 후예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일반적인 검사였다면 2차 전직만 한 상태에서는 절대 베손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팽팽한 싸움도 되지 않았으리라.
점점 더 이서우의 압박이 심해지자 베손은 버티지 못하고 피하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만 생각한 것이지 직접 몸을 빼려니 쉽지 않았다.
그때, 이서우가 손목을 살짝 뒤로 젖혔다.
그러자 일순간 베손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아주 찰나였지만, 이서우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퍽!
발등으로 베손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그가 피할 거라 여겼는데,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허허허, 굉장하군. 이거, 선공을 내주는 게 아니었어.”
“그럼…….”
“아니지. 대결은 이제 시작이야.”
“이런.”
“자, 그럼 이번에는 내가 먼저 가네!”
베손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머금고는 이서우에게 덤벼들었다.
* * *
“헉헉헉. 자네, 정말 대단하네.”
“별말씀을요. 베손 님이야말로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 아닐세. 내가…… 졌네.”
베손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패배를 인정했다.
그에 반해 이서우는 어깨가 들썩이는 정도여서, 누가 더 강자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퀘스트 ‘베손과의 대련에서 승리하라’를 완료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300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베손과의 친밀도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이서우가 꽤 큰 차로 이긴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서우도 절반이 넘는 마나를 사용하고서야 비로소 확실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후로도 다시 절반의 마나를 쓰고서야 패배 선언을 받아 냈다.
30레벨 이상 차이가 나는 몬스터도 수백 마리를 죽을 수 있을 만큼의 마나를 쓰고서야 이겼으니 쉬운 승리는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런 평가는 이서우 개인적인 생각이고,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이서우가 압도적으로 이긴 것으로 여겼으리라.
“자네 같은 강자가 우리 마을에 왔다니 참 좋구먼.”
“저도 재미있는 한판이었습니다.”
“그러면 자주 들르게.”
“저야 불러만 주신다면 언제든 좋습니다.”
“역시 싸우는 스타일처럼 성격도 시원시원하구먼. 마음에 들어.”
특수 퀘스트를 줄 물주가 하는 말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할 말이 있으니 일단 따라오게.”
“네.”
집무실이 아니라 평소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 서재로 갔다.
개인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만큼 이서우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아담한 탁자에 앉은 이서우는 베손이 직접 타 온 차를 받아 들었다.
“너무 그리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되네.”
“저절로 몸이 반응하네요.”
“허허허, 그래서 자네가 강한 것이었군.”
“그게 그렇게 되는군요.”
몸에 밴 습관과 강한 것이 무슨 연관이 있나 싶다가도, 그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젊은 나이에 정말 대단하네. 난 그때 마나를 깨닫지도 못했는데.”
“저도 최근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얻은 경지치고는 빨리 익숙해진 것 같구먼.”
“모험가들은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하긴, 모험가들은 참으로 이상한 존재지. 벌써 나를 뛰어넘는 강자들이 꽤 있다고 들었으니.”
베손은 30년 이상을 검에만 매진해 겨우 얻은 경지였다.
NPC마다 능력이 달라 10년, 빠르면 3년도 안 돼서 소드 마스터가 되지만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한데 모험가들은 훨씬 빠른 시간에 자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한데,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는데…….”
“아, 원래 대결을 하고 나면 복기 과정을 거치네.”
“그렇군요.”
그런 순서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지만 베손과 더욱 친밀도를 높이기 위해 복기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네는 마나를 뭐라 생각하나.”
“도구 아닐까요?”
“도구라. 참으로 독특한 대답이구먼.”
“그럼 베손 님은 마나를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나와 같은 기사들은 마나를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힘으로 보고 있네. 실제로도 인간의 한계를 극복해야만 얻을 수 있거든.”
“이상하네요.”
“뭐가 그리 이상하다는 건가.”
“마나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거든요.”
모든 유저들이 마나와 생명력을 가지고 게임을 시작한다.
이서우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베손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NPC들은 마나를 만물의 근원, 공기 중에도 있고 물속에도 있고 세상 어디에든 있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그걸 사용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베손이 그런 말을 한 것이었다.
“그렇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그걸 형상화시키는 건 결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네. 정형화된 움직임을 수십 년 반복하다 보면 마나가 맺히기도 하지. 하지만 진정한 깨달음이 있어야 마나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네.”
“아!”
이서우는 베손의 말에서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일반 유저들도 누구나 마나를 이용해 스킬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정해진 것을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이서우는 그게 아니었다.
스킬이 없지만 그가 하는 행동은 마나를 담고 있었다.
정형화된 기술이 아니라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베손은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말했고, 이서우도 이미 경험하고 있으니 그의 말 한마디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마나가 1,000 증가합니다.
-마나를 조금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허허, 이거 무서운 사람이구먼. 잠깐의 대화로 깨달음을 얻다니.”
“베손 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닐세. 자네가 강해지면 나에게도 좋은 일이지.”
“……?”
남이 강해지는데 왜 좋다는 걸까.
이서우는 잠깐 의구심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굳이 나머지 복기는 하지 않아도 되겠구먼. 조금 더 이야기가 길어질 거라 여겼는데 말이야.”
“전 괜찮습니다.”
“아닐세. 대화를 통해 자네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는데, 그걸 이미 이루지 않았나. 나도 얻은 게 있고 말일세.”
“아, 그러셨군요. 저 자신에게 빠져 있어 미처 보지 못했네요.”
“그게 당연한 반응이네. 나야 자네보다 경험이 조금 더 많아서 그런 것뿐이고.”
이서우는 베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나더 월드 시절 수십 년 동안 전투를 하며 경험을 쌓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100레벨까지다. 그 이상의 경험은 한 적이 없었다.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게 상당한 이점이라는 걸 새삼 깨닫네. 덕분에 앞으로 발전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되었군.’
이서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 좋은 티를 내면 내 검이 또 운다네.”
“전 좋습니다만?”
“하하하하, 이거 내가 제대로 적수를 만났구먼. 보통 내가 대련을 하자고 하면 다 피하는데 말이야.”
“그런가요? 오히려 제가 대련을 신청하고 싶어지는데요.”
이서우는 대련을 하고 짧은 복기를 하는 과정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이런 식으로도 발전을 할 수 있다니.
“다음 기회로 미루세. 오늘은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있네.”
“경청하겠습니다.”
“자네도 모험가이니 알겠지만, 최근 마을에 모험가들이 대폭 늘었네.”
“네, 알고 있습니다.”
“혹시 모험가가 증가한 게 몬스터들이 이상행동을 보이는 것과 연관이 있는 건가?”
“베손 님도 알고 계시는군요.”
“형님의 서신에도 있었고, 그 전에도 이미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네. 단독 행동을 하던 녀석들이 집단을 이루더란 말일세.”
“아고나 마을 주변도 마찬가지였군요.”
“그러네. 더 특이한 것은 몬스터들이 포악해진다는 것일세.”
“포악해진다고요?”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 이서우는 귀를 쫑긋 세웠다.
최근 말썽을 피우지 않았던 거북이가 포악하게 변한 것을 경험한 적은 있지만, 한 번의 사례였다.
하지만 베손은 뭔가 더 알고 있는 눈치였다.
“사람을 먼저 건드리지 않던 초식 몬스터들도 선공을 한다는 보고가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네. 처음에는 새끼를 보호하거나 위기에 처해서 공격을 했을 거라 생각했네. 초식동물도 궁지에 몰리면 죽기 살기로 덤비니까 말일세. 하지만 그게 아니었네.”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도 공격을 했나 보군요.”
“그러네. 그것도 여러 차례 발생했지.”
루테인이나 다론, 포르틴 마을에 있을 때만 해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떠난 지 며칠 지났으니 현재는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베손의 말을 들어 보니 이곳에 조금 더 일찍 변화가 온 것 같았다.
변화가 빠르다는 것은 진행이 더 됐을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었다.
사실 이서우는 이번 변화가 이벤트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안다.
몬스터들을 난폭하게 만들어서 대규모 공격을 펼치도록 미리 손을 쓴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있었다.
왜 마을마다 그 시기를 다르게 했을까.
베손이 아니었다면 몬스터가 변한 시기가 다르다는 사실조차 몰랐겠지만, 그의 말을 들으니 궁금했다.
“내가 진짜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네.”
“네? 더 큰 문제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서우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진짜 문제는 다른 거라니.
이서우는 강한 호기심이 담긴 눈빛으로 베손을 바라보았다.
“내가 진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