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레벨이 갑이다
64화
‘저기구나.’
게임처럼 지도가 있으면 얼마나 편할까마는, 뉴 월드는 NPC들이 가진 지도 외에는 아직 제공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일부 유저들은 직접 지도를 그리기도 했는데, 상당히 조악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산직이나 특수 직업 중 지도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있어 하나둘 풀리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는 값이 비싸고 대도시 위주로 구성되어 있어 이서우는 구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도가 없어도 펫이 어디에 있는지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이서우가 도착한 곳은 마을에서 4시 방향으로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이었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백호야.”
“주인님, 오셨군요.”
백호는 높은 나무 위에 있었는데,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서우가 오자 얼른 그의 어깨에 올라탔다.
“상황은?”
“직접 보세요.”
백호가 가리키는 방향에 꽤 많은 수의 인원이 모여 있었다.
마을을 공격하기 위해 모여 있는 것은 분명한데,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인원이 너무 적었다.
“저게 다야?”
“뒤쪽을 보세요.”
“숫자가 줄어들고 있네.”
“네.”
뒤쪽부터 조금씩 인원이 줄어들고 있었다.
주변을 철저히 살피며 지하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비밀 통로라도 있는 건가.”
“땅굴을 판 것 같아요.”
“땅굴을?”
“네.”
“설마, 땅굴 파서 마을을 공격한다는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5킬로미터나 되는 거리에 땅굴을 팠다고?”
이서우는 이들이 오래전부터 공격을 준비한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단시간에 그 먼 거리를 판단 말인가.
“땅굴 파기에 특화된 녀석이 있어요. 1시간이면 1킬로미터를 팔 수 있어요. 그것도 가로세로 3미터나 되는 넓이를요. 1마리가 그 정도이니 수십 마리를 동원하면 순식간이죠.”
“헉, 그런 놈이 있다고?”
“네. 땅속에서 주로 생활하는 녀석이어서 잘 드러나지 않아 모르고 있을 뿐이에요. 저도 펠렌 님과 다닐 때 몇 번 본 게 전부일 정도니까요.”
“그럼 일단 저놈들부터 처리하고 땅속으로 따라 들어가 하나씩 처치하면서 마을까지 이동하면 되겠네.”
“그게, 좀 곤란한 문제가 있어요.”
“곤란한 문제?”
“네. 그래서 오시기 전에 제가 주인님께 말씀드린 거예요.”
“이번 전투가 힘들 수도 있다고 한 말 말이지?”
“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리 표정이 안 좋아?”
실제 백호의 얼굴은 거의 똑같았지만, 동반자 관계여서 그런지 이서우는 쉽게 그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백호는 땅굴로 사라지고 있는 사람들을 잠시 바라보더니 시선을 북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이런 곳이 몇 개나 더 있어요.”
“뭐?”
“여기서부터 위쪽으로 3킬로미터 간격으로 총 열 곳이나 돼요.”
“열 곳이나 된다고?”
“네.”
이서우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대여섯 곳 정도면 그리 큰 피해 없이 막아 낼 수는 있을 것 같았지만, 열 곳은 혼자서는 무리였다.
“한 군데 쳐들어가면 다들 알게 되겠네.”
“네. 절반 정도는 어떻게 처리한대도 나머지가 문제예요. 제가 볼 땐 각 땅굴마다 1만 명 이상은 되어 보였어요.”
“5만 명 정도는 마을까지 갈 수도 있다는 뜻이네.”
“주인님이 한창 싸울 때 그 정도 인원이 마을로 간다면 삽시간에 초토화가 될 거예요.”
“그렇겠지. 모험가들은 다들 마을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전투를 하고 있으니까.”
촌각을 다투는 상황임에도 이서우는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확실한 방법 없이 적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거리까지 3킬로미터로 꽤 멀어서, 진짜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네.”
“……네.”
처음 그들을 발견했을 때 백호는 기분이 좋았다. 주인인 이서우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멀리서 또 같은 냄새가 나니 당황했다.
냄새의 근원지가 열 곳이나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고. 맨 위쪽의 상황은 어때?”
“가장 먼저 입장을 시작한 곳에서 주인님을 기다린 거예요.”
입장 대기 중인 곳보다 입장이 시작된 곳을 우선순위에 둔 것이 만족스러운지 이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이동을 시작한 곳부터 처리해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이제야 들어가는 걸 보니 싸움이 고조되는 순간을 노렸나 보네.”
“네. 그런 것 같아요.”
아무리 땅굴을 전문적으로 파는 몬스터라도 여러 마리가 동시에 땅을 판다면 유저들이 모를 리가 없다.
특히 이서우처럼 감각이 예민한 유저들을 피해 가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그때 문득 전광석화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가만. 혹시 땅굴이 마을까지 다 뚫린 건 맞아?”
“네? 그건…….”
막힘없이 말을 하던 백호는 예상치 못한 이서우의 질문에 말을 흐렸다.
이곳에서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것은 알았지만 마을로 뚫고 나온 것은 확인하지 못했다.
“제가 지금이라도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한 군데만 알아보면 돼. 서둘러 줘.”
“네, 주인님!”
백호는 얼른 이서우의 어깨에서 내려와 날듯이 나뭇가지를 밟으며 마을로 달렸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나머지 절반은 이제야 파기 시작했을 거야. 1시간에 1킬로미터라면 아직 시간은 있어.’
조용할 때 요란한 소리를 내면 쉽게 발각되지만, 다들 전투로 정신이 팔렸을 때라면 비교적 들키지 않고 땅을 팔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적들은 몬스터가 어느 정도 가까이에 왔을 때 땅굴을 파기 시작했을 거라는 결론이 나온다.
즉, 땅굴을 파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확실한 행동을 취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했다.
잠시 후, 백호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주인님!
-확인했어?
-네, 주인님. 이쪽은 아직이에요.
-역시! 어디쯤을 뚫고 있는지도 확인했고?
-네. 마을에서 대략 3킬로미터 지점을 지나치고 있어요.
-곧 한창 싸움이 벌어지는 지역을 지나가겠네.
-네. 몬스터들이 많이 밀고 들어와서 마을과 2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한창 싸우고 있으니 곧 지나오겠죠.
-다른 곳의 상태는 확인 못 했지?
-네. 일단은 이곳부터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럼 넌 거기서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변동 사항이 있으면 내게 바로 알려 줘.
-네, 주인님. 그렇게 할게요.
이서우가 공격을 시작하면 소식이 바로 전체에 전달될 것이다.
그러면 분명 작업 속도도 빨라질 테니 언제 어디가 먼저 뚫릴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점을 감안하고 이서우는 백호를 머물도록 했다.
‘혼란한 틈을 타서 빈집을 노리겠다? 어림없지. 뒤통수는 네놈들이 맞게 될 거야.’
이서우는 대검을 뽑아 들고는 나뭇가지를 발판 삼아 사뿐히 허공으로 날았다.
땅에 착지하자마자 무서운 기세로 달려갔다.
주변을 경계하며 땅속으로 진입하는 사람들을 엄호하고 있던 자들이 이서우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엄중한 경계 속에 움직이던 자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무기를 뽑았을 때는 이미 이서우의 공격이 시작된 뒤였다.
진화된 펠렌의 대검은 이서우의 성장에 맞춰 더 예리해지고 더 강력해졌다.
자이언트 오우거 킹을 상대할 때보다 더 가벼우면서도 강한 힘이 손으로 전해지자 이서우는 경쾌하게 대검을 휘둘러 갔다.
“아아악! 내 팔!”
“아아아아악! 내 다리!”
“컥.”
“크윽.”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와 신음 소리가 들렸다.
100레벨 초반의 인간형 몬스터들은 이서우의 공격을 단 일격도 받아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화려한, 그러나 냉기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냉정한 이서우의 대검이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 업이다!
이제 이서우는 117레벨이 되었다.
능력으로만 본다면 이미 170에 육박한다.
150레벨 이상의 유일 아이템은 추가 옵션으로 붙는 스텟만 최대 99다.
전설 최저가 100인 걸 감안하면, 스텟으로는 거의 한 등급 위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기본 공격력의 차이가 커서 비교 대상은 아니지만, 그만큼 150레벨 이후의 아이템 성능은 엄청났다.
이서우가 하이 레벨이 아니었다면 아이템 차이를 극복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서우는 강력한 태풍처럼 적들을 부숴 버리며 땅굴 입구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전진했다.
“막아! 놈을 막아라!”
이곳을 통솔하는 유저가 소리쳐 보지만 그 누구도 이서우의 발걸음을 늦추지 못했다.
이서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본 우두머리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들어가자.”
“하지만 두목님……!”
“놈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입구를 막아야 할 거 아냐! 빨리 들어와!”
“네? 네!”
두목의 명령에 수십의 산적들이 입구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안쪽에서 통로를 막아 버렸다.
공기가 통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마을까지 가는 동안에는 버틸 수 있다는 게 두목의 판단이었다.
가볍게 막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계속 흙과 바위로 막았다.
지하 수십 미터를 내려가야 길이 정상적으로 나오니 절대 이곳까지는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메우기는 쉬워도 다시 파기는 어려우니까.
-레벨이 올랐습니다.
무려 800마리를 잡았다.
마나를 거의 바닥까지 쓴 결과였지만, 엄청나게 빠른 레벨 업이었다.
유저들과 섞여 있었다면 결코 지금처럼 다량의 경험치는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속도라면 마음껏 마나를 써도 레벨 업 효과로 무한히 채울 수 있겠네.’
이벤트 전이라면 2배나 많은 몬스터를 처치해야 하니 마나를 펑펑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벤트 효과가 없었다면 2천 마리 가까이 몬스터를 잡아야 했을 텐데, 아무리 마나 효율이 좋아지고 있어도 그건 불가능이었다.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이서우는 주변 몬스터를 완전히 정리하고 서둘러 입구로 갔다.
“무식한 놈.”
아직 반대쪽도 뚫리지 않았을 텐데, 공기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입구를 틀어막아 버리다니.
“곧 뚫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겠지. 하지만 그러려면 아직 2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된다는 말씀.”
이서우는 미소를 짓고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싸움이 길어졌다면 오히려 이서우에게 불리했을 텐데, 입구를 완전히 막아 준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3킬로미터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다른 땅굴에서도 이미 이서우가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았는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입장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숫자가 남아 있었다.
이서우는 망설이지 않고 적들 사이에 뛰어들어 판을 엎어 버렸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고, 실행하지도 않을 행동으로 적들을 휘저었다.
다들 ‘혼자서 수천 명이나 되는 곳에 뛰어들다니, 미친놈 아냐?’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워낙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어 불안했다.
반면, 이서우는 또 입구를 틀어막을까 봐 아예 입구 쪽으로 가서 막지 못하도록 할까 하기도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줘야 시간을 더 벌 수 있었다.
아무리 그가 강해지고 있어도 혼자서 수천 명을 상대하려면 몇 시간이 걸릴지 몰랐다.
도망가도록 한 뒤 세 번째 땅굴로 가는 게 지금으로서는 이서우에게 더 이득이었다.
역시 이서우의 의도대로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다른 적들은 입구로 빠르게 사라졌다.
앞의 땅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두목도 입구를 막아 버렸다.
또 한 번 레벨이 올랐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좋은 소식이 있었다.
-밸런스 숙련도가 5레벨이 되었습니다.
-마나 효율이 보다 상승합니다.
-마나를 장비에 더 선명하게 덧씌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시, 마나를 팍팍 쓰면서 한 번에 집중적으로 사냥을 해야 빨리 오르네.’
경험치 2배 이벤트가 있어 마나를 아끼지 않고 팍팍 사용하니 밸런스 숙련도가 쑥쑥 올라갔다.
기쁨도 잠시, 이서우는 지체할 시간이 없어 서둘러 북쪽으로 이동했다.
밸런스 숙련도가 오르면서 이동속도는 한층 빨라졌다.
하지만 첫 번째 산적들 중 유저가 끼어 있어 이미 모두에게 퍼졌는지, 상당수의 산적들이 모습을 감추고 3분의 1 정도만 남아 있었다.
이미 이동을 시작한 상태에서 이서우의 등장을 알린 터라 빠르게 피할 수 있었다.
결국 이서우는 다섯 번째 땅굴에서 멈춰야 했다.
“더럽게 빠르네.”
1만 명의 인원이 이동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도 30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에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2시간 정도 남았나.”
작업 속도가 얼마나 빠르냐에 달린 일이지만, 이서우의 존재로 그들도 다급해졌을 테니 서두르고 있을 것이다.
‘이제 어떡한다.’
땅굴을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최악의 상황은 모든 곳이 동시에 출구를 뚫고 나올 때다.
하지만 이서우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았을 테니 서로 작업 속도를 맞춰 가면서까지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 그러면 되겠구나.”
고민을 길게 할 시간이 없어 놈들이 나오기 전까지 몬스터들이나 처치하고 있을까 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백호야,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제가요?
-그래.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구마를 먹다 목이 막힌 사람처럼 답답해하던 이서우는 청량감마저 느껴지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