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레벨이 갑이다
79화
거대한 성벽 앞에 압도되어 발걸음이 절로 멎었다.
높이가 50미터 이상이었고, 좌우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마나를 이용해 시력을 높여도 마찬가지였다.
“엄청나네요.”
“이 벽을 만드는 데 수십 년이 걸렸네.”
“그분들은 결계가 절대로 약해지지 않을 거라 믿었지만, 제국에서는 아니었나 보네요.”
“인간은 원래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지 않나. 안심을 하려면 안전장치가 필요했던 거지. 우리도 그 일환이고.”
이서우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20미터 정도 높이였는데, 계속 쌓다 보니 어느새 저리되었네. 하지만 최근에 벌어진 일들을 보며 다들 높이 올리길 잘했다고 말하고 있지.”
“저기 보이는 저 높은 나무들도 이 성벽을 가리기 위해서 심었겠군요.”
“성벽을 숨기려면 어쩔 수 없었지. 나무를 옮겨 심는 것도 엄청 힘들었다네. 빨리 자라는 녀석들이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엄청난 중노동이 되었을 거네.”
“그렇겠네요.”
“하지만 성벽도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않네.”
“차라리 저곳에 병력을 더 많이 보내서 조금씩 땅을 차지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건 엘사둔 제국이 바라는 거라네. 병력이 줄어들면 놈들은 귀신같이 알아차릴 거야. 호시탐탐 우리 제국을 노리고 있으니까.”
“땅덩어리는 카이젠 제국이 훨씬 넓은 걸로 아는데요?”
“그렇지. 땅은 넓지. 사람도 많고. 하지만 전쟁은 꼭 쪽수로만 하는 건 아니네.”
“그렇긴 하죠.”
현대를 살아가는 이서우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단지 이곳은 첨단 장비들이 없기에 인원이 많은 쪽이 유리할 거라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가세.”
“네.”
사이먼 자작과 나란히 선두에 서서 성문을 향해 다가갔다.
“문은 오직 이곳밖에 없네.”
“이곳을 지키는 인원은 여기가 전부입니까?”
“그렇지는 않다네. 성벽 위에 감시초소가 곳곳에 있네. 성벽 안쪽에도 감시탑이 있고. 대략 1천 명 정도가 여기에 매여 있다고 보면 되네.”
“몬스터가 사방에서 쳐들어오면 곤란하겠군요.”
“최악의 상황이 되는 거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결계가 약한 곳은 아직까지는 한 곳밖에 되지 않네.”
“더 늘어나기 전에 그분들이 오셔야겠네요.”
“그래야지. 전체가 약해지면서 부분적으로 구멍이 생기고 있으니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하네.”
사이먼 자작이 접근하자 문지기가 예를 갖추었다.
문은 다수가 기계장치를 이용해야만 열 수 있을 만큼 컸다.
높이는 20미터가량 되었고, 넓이도 10미터 정도였다.
득득득득득득득.
기계장치 소리가 나자 문이 서서히 열렸다.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해 딱 한 사람 정도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에서 멈췄다.
“서두르세.”
“네.”
몸에 배었는지 50명의 인원이 빠르게 문을 빠져나갔다.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올 때 몬스터가 따라붙으면 저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네.”
“벽을 타고 올라가야겠군요.”
“그것도 쉽지 않을 게야.”
“특수한 장치라도 되어 있나요?”
“발을 디디면 쭉 미끄러지네. 몬스터들이 타고 올라오지 못하도록 해 둔 것이지. 마법진과 더불어 특수 약품들이 처리가 되어 있네.”
“공을 참 많이 들였네요.”
“그럴 수밖에. 여기가 뚫리면 제국이 위험하니까.”
대체 저 안개 너머에 뭐가 있기에 이렇게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이곳을 지키려 할까.
‘이제 곧 알 수 있을 테지.’
이서우는 짙은 안개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나로 몸을 보호하게. 저 안개에 오래 노출되면 좋지 않아.”
“그래서 다들 마나를 조금이라도 다룰 수 있는 기사들을 데려온 것이군요.”
“마나를 다룰 수 없는 사람은 절대로 저곳을 넘지 못한다네.”
사이먼 자작을 제외하고는 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없다. 소드 마스터는 자작뿐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도 마나를 사용할 수만 있으면 안개 구역을 벗어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이먼 자작은 기사들을 대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하네.”
“네.”
사이먼 자작이 발을 떼자 이서우도 그와 나란히 서서 걸었다.
기사들은 모두 검을 뽑아 들었다.
“자네도 무기를 미리 빼 두게.”
“아직은 괜찮습니다.”
“하긴, 자네라면 어떤 순간이 와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겠지.”
사이먼은 이서우의 움직임을 떠올리고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를 걱정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안위부터 신경 써야 하는 처지다.
나무들 사이에 짙은 안개가 잔뜩 끼었는데, 회색 빛깔이어서인지 더욱 시야가 가려졌다.
눈으로는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서우는 모든 감각을 열어 뒀기에 비교적 주변 사물을 똑똑히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10분쯤 가자, 안개 지역이 서서히 끝이 났다.
시야가 밝아지니 주변이 잘 보였는데, 평범한 숲과 다르지 않았다.
다르다면 새나 곤충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 정도랄까.
“조용하네요.”
“나무들 외에는 살 수 없는 곳이지. 나무도 특정 종류만 있고.”
“결계까지는 얼마나 남았나요?”
“왔던 것만큼만 가면 되네.”
“성벽과 정말 가깝네요.”
“그래서 더 위험하지. 그나마 멀리 세운 것이긴 한데,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느껴지는구먼.”
“몬스터 대규모 침공 때문인가요?”
“아니라고 못 하겠네. 그 전까지는 솔직히 안심하고 있었네. 하지만 수천만 마리나 되는 몬스터들이 곳곳에서 마을과 도시를 부수기 위해 뭉치는 것을 보고 우려스러워졌지. 황제께서도 그래서 그분들을 보내는 것이고.”
황제 이야기가 나오니 이서우는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한데, 아무리 황제님이라도 신관을 마음대로 부릴 수는 없지 않나요?”
“정확히 말하면 신관은 아니네. 단지 신의 힘을 빌려 쓰는 분일 뿐이지.”
“그게 가능한가요?”
“신관들도 그 부분을 의아해하더군. 한데 그분이 산증인이니 누가 뭐라고 하겠나. 그리고 아리아 님이 우리 제국에 남아 계신 것은 펠렌 님과도 연관이 되어 있네.”
“펠렌 님과요?”
“그분과 약속을 하셨다고 하더군. 무슨 약속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카이젠 제국을 지키는 문제와 관련이 있지 않나 추측들을 하고 있지.”
“그렇군요.”
대화를 하면서도 신경은 혹시 모를 몬스터들의 공격에 맞춰져 있었다.
“저기 뭔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네요. 혹시, 결계인가요?”
“그렇다네. 대단하구먼. 결계를 느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말이야.”
“제가 좀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한 겁니다.”
“나도 배우고 싶은 기술이군.”
이서우는 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가르친다고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니 뭐라 대꾸할 말이 딱히 없었다.
“이런, 전투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놈들이 결계를 빠져나오려 하고 있습니다.”
“젠장, 결계를 넘기도 전에 쳐들어오다니. 다들 대형을 유지하라!”
사이먼의 외침에 기사들은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결계와 가까워졌기에 U 자 모형으로 섰다.
“결계와 몬스터들의 거리는 어느 정도인가.”
“대충 100미터 정도 됩니다.”
“서두르세!”
결계를 이미 빠져나왔다면 대응이 달라졌겠지만, 나오기 전이라면 결계 주위를 틀어막는 게 급선무였다.
다행히 그들이 도착했을 때까지도 몬스터들은 넘어오지 않았다.
“구멍이 이렇게나 큽니까?”
“많이 넓어진 거지. 이쪽이 약해지니 놈들도 이곳만 공략해서 그런 것이네.”
너비가 족히 20미터는 될 것 같은 공간을 막아섰다.
그들이 자리를 잡자 몬스터들이 결계를 뚫고 나왔다.
텅! 텅! 텅!
“무식한 놈들. 저런 식으로 자살조를 투입해 결계를 약화시키고 후발대가 넘어온다네. 준비하게!”
“네.”
머드 맨들이 결계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결계가 약해진 틈을 타서 머드 맨들이 들어왔다.
이서우는 대검을 꺼내 가장 먼저 들어오는 머드 맨을 베었다.
“……!”
분명히 베었는데, 물컹거리는 느낌만 들었다.
“마나를 이용해 놈들의 눈을 노려야 하네. 다른 곳은 대미지를 흡수해 버려서 소용이 없네.”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머드 맨에 대해 들었지만 혹시나 싶어 테스트를 해 본 것이었다.
한데, 강력한 마나를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머드 맨을 벨 수 없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이서우는 사이먼 자작의 조언대로 눈을 공략했다.
푹!
키에에에엑!
머드 맨도 자신들의 약점을 알기에 최대한 조심을 했지만 이서우의 빠른 움직임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비명 소리만 요란할 뿐, 기다리던 메시지는 들리지는 않았다.
“맷집도 센가 봅니다?”
“엄청나지. 웬만해서는 잘 죽지도 않네. 이크!”
사이먼은 말을 하는 게 버거운지 더 이상 그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않았다.
이서우는 중요한 것들은 다 알았으니 말없이 차분히 머드 맨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양쪽 눈부터 일단 찔러서 머드 맨의 동작을 느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다른 급소가 있는지 목도 베어 보고, 심장도 찔러 봤다.
사이먼의 말처럼 아무리 찌르고 베어도 소용이 없었다.
‘진짜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들이네.’
수차례 공격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머드 맨은 건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서우가 집요하게 눈을 찌르자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머드 맨을 처치하셨습니다.
-300,000,000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머드 맨의 체액을 획득하셨습니다.
-1골드 2실버를 획득하셨습니다.
‘와, 경험치 대박이네. 골드도 장난 아니고. 대체 이놈들 레벨이 몇이야?’
힘겹게 잡은 것에 비하면 그다지 경험치가 좋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앞으로 레벨이 오를 것을 감안하면 나쁜 수치는 아니었다.
눈만 집중적으로 공격하면 되니 마나 소모도 적어서 안성맞춤이었다.
“이크!”
“조심하게! 놈들의 몸에 있는 끈적끈적한 액체는 강력한 독성을 지니고 있네!”
이서우도 이미 들은 내용이지만 맞지 않을 자신이 있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물을 뿌리듯 원거리에서 던지니 모두 피하지는 못했다.
피시시시시식!
옷에 묻은 머드 맨의 체액이 이서우의 가죽 갑옷을 녹여 버렸다.
“비싸게 주고 산 건데!”
갑옷이 찢어지고 구멍이 난다고 해서 파괴되는 것은 아니지만, 수리하는 데 비용이 꽤 들어간다. 그러니 돈을 잘 쓰지 않는 이서우에게는 아까울 수밖에.
이서우는 무서운 기세로 머드 맨들을 하나씩 처치해 나갔다.
100마리가 넘는 머드 맨을 모두 처치하는 데 30분이나 소요되었다.
50명이 싸웠는데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휴우, 자네 덕분에 피해 없이 빠르게 처치할 수 있었네.”
“평소에는 더 오래 걸리는 겁니까?”
“최소 2시간은 싸워야 하네. 확실히 실력자가 합류하니 시간이 많이 절약되는군.”
사이먼은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전력이라면 조금 더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에서였다.
“설치하라!”
“네, 자작님!”
“뭘 설치하는 건가요?”
“우리가 이곳을 벗어나면 몬스터들이 우리를 피해 결계를 지나갈 수 있기에 알람을 설치하는 것이네.”
“아.”
평소 이서우에겐 딱히 필요가 없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다.
“소리를 확대하는 기계가 있어 성벽에서도 충분히 들린다네. 그러면 미리 대비를 할 수 있어 피해가 적지.”
“그렇군요.”
“자, 가세.”
“네.”
장치를 설치하고 다시 전진했다.
싸우고, 알람을 설치하고를 반복하면서 300미터 정도 들어갔을 때였다.
“여기까지네.”
“여기까지라뇨?”
“우리가 왔던 가장 깊은 곳. 이 이상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네.”
“어쩌실 건가요?”
“자네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일단 꽤 시간이 지났으니 잠시 휴식을 취하고 계속 전진했으면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자네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네.”
사이먼은 이례적으로 1명도 큰 부상을 입지 않아 더 깊이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러기 위해선 이서우의 도움이 절실했는데 다행히 그 역시 흔쾌히 수락해 왔다.
‘안쪽에는 뭐가 있을까?’
평범한 숲과 다름없는 곳이다. 한데 이서우가 마주치는 것들은 새로운 것들뿐이었다.
이서우는 기대감을 한껏 안고 휴식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