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레벨이 갑이다
87화
집을 나선 이서우는 발품을 팔아 35평 이상의 집들을 살펴보았다.
되도록 텃밭이 있는 주택을 찾아다녔다.
서울 변두리 지역은 10억으로도 괜찮은 집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외곽이라도 최근에 지어진 프리미엄 주택은 20억 가까이 줘야 했다.
중심가로 들어가면 조금 더 가격이 올라갔다. 20대 중반 평수가 20억부터 시작이었다.
집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스템에, 보안까지 철저히 갖춰져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이서우는 가격은 신경 쓰지 않았다. 부모님은 자신을 위해 집도 팔고, 빚까지 내서 살려 냈으니 말이다.
괜찮은 물건들을 보며 이서우는 미소를 지었다.
꼼꼼하게 확인하고는 전화를 걸었다.
“네, 어머니. 오늘 일찍 들어오시는 거 아시죠? 이왕이면 저녁 시간에 맞춰서 들어오세요. 오랜만에 같이 식사해요. 네, 그럼 기다릴게요.”
이서우는 흔쾌히 일찍 들어오겠다는 어머니의 대답에 기분 좋게 전화를 끊었다.
“오늘따라 웬일이시지? 이럴 게 아니라 마트부터 가야겠네.”
이서우는 서둘러 마트로 가서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회를 사서 집으로 향했다.
밥을 안치고 소주 몇 병과 초장까지 완벽하게 준비를 했다.
뜸까지 들어 슬슬 허기가 질 때쯤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다녀오셨어요.”
“밥 냄새네. 설마 서우, 네가 했니?”
“네. 오늘은 두 분 좋아하시는 회로 준비했어요.”
“어머, 이게 무슨 일이라니.”
“일단 손부터 씻고 오세요. 같이 식사해요.”
“그래, 그러자꾸나. 당신부터 씻고 오세요.”
“그러리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도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동안 이서우는 밥을 퍼서 식탁에 놓고, 반찬도 꺼냈다.
“소주까지. 완벽하구나.”
무뚝뚝한 아버지의 말이었다.
워낙 술을 좋아하는데, 아들이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에는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들도 건강을 되찾고 있어서 소주가 반가웠다.
집에 오랜만에 웃음소리가 떠나갈 듯 가득 찼다.
그동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하던 집이었는데, 사람 사는 소리가 났다.
갓 지은 밥 냄새와 각종 반찬, 그리고 소주 냄새와 함께 사람의 향기가 뒤섞여 온 집 안을 채웠다.
식사가 끝나고 후다닥 정리를 끝낸 이서우는 마무리로 커피를 탔다.
“오늘 우리 서우 덕분에 호강하는구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니?”
“좋은 일이 있죠. 차부터 한 잔 하세요.”
“좋은 일은 빨리 들어야지. 무슨 일인데?”
이서우는 찻잔을 내려놓고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인터넷 뱅크에 접속했다.
“제가 뉴 월드를 하면서 벌어들인 돈이에요.”
“서, 서우야, 이게…….”
“커흠.”
이서우의 어머니는 스마트폰에 적힌 숫자를 보고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고, 아버지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헛기침만 했다.
“이, 이게 0자가 몇 개냐.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십억, 헉. 배, 백억?”
“네. 백억이 조금 넘는 돈이에요.”
빚은 갚고 남은 돈과 골드를 조금씩 팔았던 돈, 그리고 이벤트로 얻은 아이템을 팔았던 돈을 합치니 1백억이 넘었다.
“이걸 정말 게임을 해서 벌었단 말이냐?”
“네, 아버지.”
과묵한 아버지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서우는 덤덤하게 말했다.
“정당하게 벌어들인 거겠지?”
“그럼요. 제가 누구 아들인데요.”
“호호호, 당신도, 참. 우리 서우가 얼마나 정직한데 그래요.”
한정옥 여사는 기분이 좋은지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만 이갑수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걸 내민 것은 우리에게 쓰라는 것이더냐?”
“네.”
“됐다. 이건 네가 알아서 하거라.”
“역시, 그럴 줄 알고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보여 준 것이냐.”
“이렇게 큰돈이 생겼는데 당연히 보여 드려야죠. 나중에 아시고 또 무슨 잔소리를 하시게요.”
“잘 아는구나.”
“한데, 저도 할 말은 있어요. 저 때문에 집도 날리셨는데, 계속 여기서 사시게 할 수는 없어요. 제가 불효막심한 자식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으시죠?”
“이 녀석이…….”
이갑수는 할 말을 잃었다. 그의 가장 큰 약점이 명분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행동으로 자칫 귀한 아들이 불효막심한 자식이 될지도 몰랐다.
“좋다. 그러면 집만 다오. 클 필요는 없다.”
“그렇지 않아도 두 분이서 사시기에 편한 집을 알아보고 있어요.”
“벌써 다 생각을 해 뒀구나.”
“제가 누구 아들인데요.”
“호호호, 당신 오늘 서우에게 된통 당하는 날인가 봐요.”
“거참, 쓸데없는 소릴…….”
이갑수가 면박을 줬지만 한정옥 여사는 오히려 더 큰 소리를 내서 웃었다.
“한데, 왜 우리 둘이냐?”
“전 이제 다 컸으니 따로 나가서 살아야죠. 언제까지 부모님 품에 있을 수는 없잖아요. 두 분이 함께 사시면서 이제는 여행도 좀 다니시고 하세요.”
“아직 장가도 안 갔는데 같이 사는 게 어때서.”
“아니에요, 어머니. 생각해 봤는데, 독립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건 네 뜻대로 해라. 우리는 그저 텃밭이나 가꾸면서 보내도 된다.”
“네.”
이갑수가 미소를 지었고, 이서우도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서우는 밤늦게까지 아버지와 술을 마시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 * *
초미니스커트에 상의는 흰색 브래지어가 다 비치는 검은색 시스루를 입은 여자가 커다란 저택 앞에 섰다.
“집 한번 크네. 하긴, 그러니 20억을 그리 쉽게 내주는 거겠지. 괜히 딴말하면 가격을 확 올려 버려야지.”
띵동. 띵동.
치잉.
안에서 카메라로 확인을 했는지 커다란 문이 곧장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방송에서 보던 이설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사람이 없는 거 확실하죠?”
“네.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거래도 없던 걸로 한다고 하셔서 오빠는 내보냈어요.”
“좋아요. 들어가요.”
“네, 그러죠.”
요즘은 가을이 없을 정도로 여름이 길어졌다지만 여자의 패션은 너무 파격적이었다.
이설아가 수수하게 입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설아는 프로답게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리 화려하지 않은 거실의 모습이 드러났다.
“집은 큰데, 안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네요.”
“심플한 걸 좋아해서요.”
“그렇군요.”
“마실 거라도 내올 테니 일단 저기 좀 앉으세요.”
“혹시 캐러멜 마키아토 되나요?”
“네? 아, 네. 가능해요.”
“아이스로 부탁해요.”
“네.”
커피 마니아여서 기계를 갖추고 있었다.
버튼 하나면 모든 게 다 되니 설아가 귀찮을 건 없었지만 순간 카페 종업원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토와 아이스커피를 가지고 거실로 갔다.
“그쪽은 저를 아는데, 전 그쪽에 대해 아는 게 없네요.”
“거래를 하는데 통성명이 필요한가요?”
“정보의 신뢰도가 높아지겠죠.”
“권안나라고 해요.”
이설아는 상대의 이름을 머릿속에 잘 새겼다.
“전장의 지배자의 정체를 알아내셨다고요?”
“네. 설아 씨가 그 사람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네. 제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알고 싶어서요. 증거가 있나요?”
“증거는 확실해요. 그 전에 먼저 10억을 주셔야겠어요.”
“흠…….”
이설아는 대뜸 절반의 돈을 내놓으라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정보가 확실하다면 주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이런 식으로 돈부터 찾는 거래는 그동안 그 끝이 좋지 않았다.
“좋아요. 하지만 에스크로를 이용해야겠네요. 저도 안전장치가 필요하거든요. 대신 20억을 전부 보내겠어요.”
“어차피 설아 씨가 수락을 해야 받는 돈이겠군요.”
권안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토를 마셨다.
“제가 거짓말로 안나 씨를 속일 이유가 없죠. 제 인기가 걸려 있는데.”
“그러면 영상으로 녹화라도 해서 저에게 주시죠.”
“좋아요. 하지만 안나 씨도 저 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전장의 지배자와 관련된 정보를 주지 않는다고 약속하세요. 20억이나 투자했는데, 손해 볼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좋아요. 저도 뒤통수 칠 생각은 없으니 아예 원본 자료를 다 드리죠. 단, 설아 씨도 제 이름을 발설해서는 안 돼요. 그것까지 영상에 담아 주세요.”
“그러죠.”
두 사람은 서로의 약속이 담긴 영상을 교환했다.
“조작 방지 적용이 되어 있어서 편집을 하려고 하면 영상은 다 지워지니 주의하세요. 그리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 영상이 민사소송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 두세요.”
“지금 절 협박하시는 건가요?”
“협박이 아니라 20억에 합당한 요구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안나 씨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저도 소송을 각오해야 하는데 왜 그런 협박을 하겠어요.”
“하긴, 오히려 설아 씨에게 족쇄가 될 수 있겠네요. 여튼, 전 돈만 받으면 되니 그런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권안나의 목적은 오직 돈이었다.
지금은 그것 외에 다른 것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서 빨리 20억을 받아서 쓸 궁리부터 했다.
그런 생각 때문에 권안나는 중요한 것을 잊었다. 정보의 출처를 보호해 달라는 약속을 말이다.
굳이 이설아가 먼저 나서서 언급할 필요는 없는 문제여서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이제 증거를 보여 주세요.”
“그러죠. 좀 써도 되죠?”
“네.”
권안나가 스마트폰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탁자에는 이미 홀로그램 시스템이 적용되어 있어 스마트폰과 바로 연동이 되었다.
42인치의 큰 홀로그램 화면이 두 사람의 앞에 떴다.
“저, 저건…….”
이설아는 영상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가 전장의 지배자라는 것을.
동영상을 다 볼 필요도 없었다.
백호도 있었고, 공격 패턴도 너무 많이 봐 와서 이제는 직접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의 경지였다.
“조금 더 보시면 정면으로 얼굴이 나와요. 아시죠? 뉴 월드는 성형이 안 되는 거.”
“네. 알고 있어요.”
뉴 월드를 범죄에 악용하는 문제 때문에 외모는 바꿀 수 없었다.
갑옷을 비롯해 장비들의 종류가 워낙 많아 외형을 바꾸지 않아도 현실의 모습과 게임의 모습을 쉽게 매치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정면 영상이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더 볼 필요 없겠네요. 저분의 아이디를 알려 주세요.”
“이름은 이서우예요. 본명인지 아닌지는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뉴 월드 내에서는 이서우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요.”
“좋아요. 찾아보면 알 수 있겠죠. 확인을 해야 하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러죠.”
정면 사진까지 봤으니 더 이상의 동영상 재생은 의미가 없었다.
이설아는 접속 방으로 들어가 서둘러 뉴 월드에 접속했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귓말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전 이설아라고 해요. N게임넷 진행을 맡고 있어요.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이야기 가능할까요?
-현재 접속 중인 이용자가 아닙니다.
‘전장의 지배자 정도면 거의 풀 접속을 할 텐데……. 일단 메시지를 보내고 다른 것부터 찾아보자.’
이설아는 예의를 갖춰 정성들여 메시지를 작성하고는 다시 한 번 귓말로 상대의 접속 여부를 확인했다.
여전히 접속 중이 아닌 이용자라는 말에, 이설아는 뉴 월드를 빠져나왔다.
“일단 캡처한 영상으로 검색부터 해 보자.”
검색 기능이 워낙 좋아져서 권안나가 찍은 영상으로도 충분히 상대를 검색할 수 있었다.
뉴 월드에 접속해 있었다면 굳이 검색을 해 볼 필요는 없었지만, 권안나를 계속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게다가 동영상이나 사진 검색은 불법도 아니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찾아보았다.
곧 사진들이 나타났다.
“눈빛이나 분위기가 약간 다른 것 같지만 생김새는 확실히 이 사람이 맞아. 응? 이건…….”
사진 몇 장을 꼼꼼하게 확인하며 다시 한 번 비교를 해 보았는데, 확실히 영상 속 인물이 맞았다.
한데, 그가 나온 사진에 남겨진 글을 보며 이설아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이설아는 얼른 검색어를 입력했다.
캡처한 사진과 함께 그녀가 원하는 단어를 입력했다.
특이한 것은 검색 범위를 한정하지 않고 모든 국가로 설정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바로 나왔다.
“저, 정말이었어. 전장의 지배자가 어나더 월드의 베타 테스터였다니…….”
기사뿐 아니라 SNS까지 검색 범위를 넓혔기에 사진이 그대로 노출된 것이었다.
해외는 국내와 달리 여과 없이 노출된 사진이 많기에 혹시나 하고 검색을 했는데, 역시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이설아는 급히 뉴 월드에 다시 접속했다.
지금의 정보만으로도 권안나에게 돈을 지불해도 되지만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려는 것이다.
만약 이번에도 접속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를 보내고 뉴월드에서 편안하게 기다릴 생각이었다.
이설아는 얼른 상대가 메시지를 봤는지부터 확인했다.
“봤어!”
함박미소를 지은 이설아는 정중히 귓말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