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레벨이 갑이다
89화
-오빠!
접속을 하자마자 조현아에게서 귓말이 왔다.
-어, 접속해 있었네.
-네. 언제 오시나 했어요. 약속한 날이 하루밖에 남지 않은 건 알고 계시죠?
-알지. 참,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혹시 지금 다른 힐러들과 같이 있어?
-네. 언니들이랑 같이 있어요.
-여기 성 근처인데 다 같이 이쪽으로 좀 올래?
-네, 오빠!
조현아는 반갑게 대답하며 그가 지정해 준 장소로 왔다.
그녀와 함께 이민아와 권안나가 보였다.
이서우가 뚫어지게 쳐다보자 권안나는 살짝 시선을 회피하더니 코를 만지작거렸다.
관찰력이 좋아진 덕분인지, 그는 그 찰나의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파고라에 앉은 셋의 시선이 이서우에게로 향했다.
이서우는 시간을 질질 끌 생각이 없었다.
일단 상대방이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해서 반응을 살필 계획이었다.
“누군가 나에 대해 발설을 했던데.”
“네? 오빠에 대해서요?”
“어. 내가 전장의 지배자라는 것을 알고 말했더라고. 비싼 돈 받고.”
“서, 설마요. 누가 그런 말을 하겠어요? 비밀을 누설하면 모든 걸 잃는데…….”
“현실에서 했더라고. 안 그래요, 권안나 씨?”
“네?”
“다 듣고 왔습니다. 그냥 이실직고하세요.”
“흥! 유명 방송인이라고 해서 믿었는데, 생긴 것만 반반한 년이었네.”
이서우는 셋 중 누가 범인인지 몰랐지만 관찰력 덕분에 유력한 용의자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권안나를 공략한 것인데 그녀는 의외로 쉽게 걸려들고 말았다.
두 힐러는 그녀의 변화에 놀랐다.
평소에는 얌전한 척하더니 갑자기 입에서 욕이 나오니 당황스러운 것이다.
“쯧쯧쯧, 자기가 약속을 개떡같이 여기니 남들도 그런 줄 알았나 보네. 그 사람은 너에 대해 일언반구도 안했어. 떠본 거지.”
“그런…….”
권안나는 이서우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넌 앞으로 퀘스트에서 배제야.”
“흥! 네가 뭔데 퀘스트를 하라 마라야? 난 어떤 일이 있어도 그 퀘스트는 할 거야. 그러니…… 꺄악!”
독기를 품은 눈빛으로 핏대를 세우며 말하던 권안나는 갑자기 모든 방어구와 무기가 사라져 버리자 비명을 질렀다.
조현아와 이민아도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꼴좋네. 자업자득이다. 앞으로 착하게 살아라.”
“마, 말도 안 돼.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가자.”
“응? 응, 오빠.”
“개자식. 가만 안 두겠어. 모든 사람들에게 폭로해 버릴 거야!”
“마음대로 해. 하지만 과연 누가 널 믿을까? 아마 나같이 허접하게 입고 다니는 놈이 전장의 지배자라고 하면 다들 너보고 미친년이라고 할걸.”
“하지만…….”
“네가 생각해도 내 말이 맞는 것 같지? 마음대로 해. 너 같은 쪼렙의 말을 누가 들어 줄지 모르겠네. 아, 인벤토리도 싹 비었을라나? 초보자 마을도 못 가겠네. 현질 해서 열심히 키워.”
권안나는 모든 것을 잃고 1레벨로 돌아갔다.
만약 모든 것을 가진 상태였다면 그녀의 말을 믿어 줬을지도 모르지만, 1레벨밖에 안 되는 사람이 전장의 지배자를 직접 봤고, 안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이서우는 승리의 미소를 짓고는 그곳을 벗어났다.
‘아차, 친추.’
이서우는 친구 목록을 열었다.
이미 이설아의 신청이 와 있었다.
‘고미? 무슨 뜻이지?’
본명은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아이디가 특이했다.
이서우는 귓말을 보냈다.
-어디세요?
-어머, 서우 씨. 저 지금 이동하고 있어요. 곧 도착할 거예요.
-벌써요?
-네. 아주 특급 마차를 탔거든요.
-그리 급히 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근데 어디로 갈까요?
-도시 안은 너무 복잡하니 백작 성으로 가는 곳으로 오세요. 오다 보면 유저들이 없는 곳이 있을 거예요.
-아, 대귀족의 성 근처여서 안 들여보내 주나 보네요.
-네. 허락된 사람만 가능해요. 성의 정면으로 오시면 돼요.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네. 그렇지 않아도 이제 막 마을에 도착했어요.
이서우는 대체 무슨 마차기에 이렇게 빨리 오나 싶었다.
이설아가 탄 마차는 초호화, 초특급 마차였다.
가장 빠르고 화려한, 마차로 순식간에 마을과 마을을 오갈 수 있다.
“오빠, 어디 가는 거예요?”
“힐러가 1명 빠졌으니 채워 넣어야지.”
“어머, 힐러도 미리 구해 두신 거예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어차피 내 정체를 알고 있어서 같이 하자고 했지.”
“그렇구나. 근데 대체 누구에게 정보를 팔았을까요?”
“그런 사람이 있어. 마침 저기 오네.”
전속력으로 달린 것인지 바람처럼 달려왔다.
힐러의 방어구 중에서 가장 몸을 많이 숨기는 로브 계열을 착용했는데도 그녀의 미모는 죽지 않았다.
그녀를 본 조현아와 이민아는 외모에 한 번 놀랐고, 아이템에 두 번 놀랐다.
“안녕하세요. 서우 씨에게 들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이번에 합류하게 될 고미라고 해요.”
“네? 네, 방금 들었어요. 조현아라고 해요.”
“이민아예요.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혼자서만 게임을 해서 부족한 게 많거든요.”
“아, 그래서 아이템을 전부 최강으로 구입하셨구나. 많이 힘드셨겠어요.”
“흑흑. 역시, 힐러의 마음은 힐러가 알아주네요.”
힐러가 솔로 플레이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설아는 파티를 할 수가 없었다.
방어구를 착용하면 외모가 많이 가려지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다. 혹시라도 자신을 알아본다면 낭패여서 파티는 꺼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더욱 화려한 최강의 아이템으로 도배를 했다.
모두 유일 아이템에 초월까지 한 최강 아이템들이었다.
“서우 씨, 파티 주세요.”
“오빠는 파티 안 해요.”
“네? 왜요? 파티 하면 추가 보너스 경험치 있잖아요.”
“그냥 혼자가 편합니다.”
“그러지 말고 파티 해요. 어차피 경험치 분배를 서우 씨에게 조금 더 하면 혼자 하실 때랑 똑같이 얻으실 수 있어요.”
“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조현아가 손뼉을 마주치며 즐거워했다.
이서우도 딱 한 번 파티 사냥을 해서 잊고 있었다, 경험치 분배가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이래서 사람은 알아야 한다.
이서우는 셋에게 모두 파티를 걸었다.
분배를 설정했다.
“전 아이템 필요 없으니 서우 씨가 다 가지셔도 돼요. 어차피 아이템은 다 맞췄거든요. 전 정말 파티 사냥이 하고 싶었답니다.”
“하긴, 서우 오빠가 거의 다 사냥을 할 테니 저도 아이템은 양보할게요. 경험치만 해도 엄청난데, 아이템까지 가져가기는 미안해서…….”
“그럼 저도 서우 님에게 드릴게요. 저도 레벨이 우선이거든요.”
“그러면 제가 너무 이익인 것 같은데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레벨 업이 아이템보다 훨씬 가치가 높죠.”
“고미 님 말이 맞아요, 오빠. 폭풍 레벨 업을 할 수 있다면 누구나 다 아이템은 양보할 거예요.”
거듭된 거절에 이서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이템은 제가 갖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네!”
분배 정리가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민감한 문제가 잘 마무리되자 조현아는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 전 스무 살이에요. 저보다 언니인 것 같은데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래도 될까?”
“그럼요.”
“여자 나이는 비밀이지만 현아가 말했으니 안 밝힐 수가 없네. 난 24살이야.”
“우와, 그럼 민아 언니보다 한 살이 많으시네요. 엄청 어려 보이시는데, 큰언니시라니.”
“겨우 스물네 살에 큰언니라니, 뭔가 늙어 버린 것 같네.”
“아니에요. 우리 중에 제일 어려 보여요.”
“칭찬 고마워. 근데, 서우 씨는 27살이셨죠? 행동은 30대 같으신데 의외로 젊으시네요.”
“헉! 오빠, 27살이에요? 조금 더 들어 보이는데.”
이서우는 인상을 팍 썼다.
“호호호, 전 오히려 듬직하고 좋은걸요.”
“하긴, 그런 면은 있죠.”
이설아가 오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이민아 역시 대화에 잘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표정은 밝았다.
“참, 저한테도 말 놓으셔도 돼요, 언니.”
“그럴까?”
“네. 편하게 하세요.”
“응, 그럴게.”
호칭 정리가 끝나자 여자들은 더 수다스러워졌다.
이설아는 붙임성이 좋아 금세 두 사람과 친해졌다.
‘저것도 능력이네. 어떻게 저렇게 빨리 흡수가 되지? 그나저나 진짜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말이 일리가 있구나. 권안나가 있을 때는 조용하더니 코드가 안 맞았나 보네.’
화기애애한 모습이 보기는 좋았지만, 너무 시끄러웠다.
하지만 이서우는 그들의 대화를 막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현아가 오빠, 오빠, 하면서 달라붙지 않아서 좋았다.
‘드디어 내일이구나. 과연 어떤 분들이실까?’
이서우는 한껏 기대를 했다. 드디어 펠렌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이번 기회만 잘 살리면 3차 전직도 문제없었다.
그가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펠렌의 대검이 얼마나 진화하느냐, 하는 것과 펠렌의 다른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왕이면 목걸이면 좋겠는데. 여성분들이시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목걸이를 얻으면 이벤트로 받은 것을 팔아 버리면 된다.
가치가 떨어질 때쯤이면 어차피 팔 테지만, 더 많은 이득을 낼 수 있을 때 파는 게 좋다.
“난 잠시 중개소에 다녀올 테니 이야기하고 있어.”
“네, 오빠. 다녀오세요.”
“다녀오세요, 서우 씨.”
“네.”
이서우가 거래 중개소로 가는데, 조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언니! ‘다녀오세요.’라고 하니까 신혼부부가 된 거 같지 않아요?”
“그러네. 딱 그 느낌인데?”
“아, 결혼을 하면 이렇게 행복할 수 있을까요?”
“스무 살밖에 안 된 애가 벌써 결혼이니. 연애 좀 더 해 보고 결정해. 연애는 진짜 많이 해 봐야 한다.”
“어머, 언니는 연애 많이 해 보셨어요?”
“아니.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
“치, 근데 그런 말을 하세요?”
조현아도 연애라고는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결혼에 대한 환상이 더 큰 것일지도 몰랐다.
그때 조용히 있던 이민아가 말했다.
“고미 언니 말이 맞아. 결혼은 연애 많이 해 보고 생각해.”
“어머, 뭔가 경험자의 포스가 느껴지네요. 민아 언니, 연애 해 봤어요?”
“그럼. 몇 번 해 봤지. 근데, 진짜 남자는 잘 만나야 해. 처음에는 뭐든 다 해 줄 것처럼 하지만 갈수록 질려 하거든. 1년만 지나도 사랑한다는 말도 잘 안 하는걸.”
“정말요? 1년밖에 안 됐는데도 그래요?”
“1년도 길어. 6개월도 안 됐는데 질려 하는 사람도 있었는걸.”
“그건 좀 아니다. 난 평생 알콩달콩 사랑하면서 결혼할 거예요.”
“호호호, 우리 막내가 꿈도 크네.”
“원래 꿈이라도 커야 하잖아요. 언니들은 안 그래요?”
“나도 당연히 그렇지. 하지만 그런 배려 있고, 이해심 많은 남자를 만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야.”
“고미 언니 말이 맞아. 진짜 좋은 성격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한결같은 사람을 만나는 건 힘들어. 있어도 내 남자가 될 확률은 더 낮고.”
“전 세계에 40억이 넘는 남자가 있는데요?”
“여자도 40억이란다, 현아야.”
“그건 그러네요.”
“그나저나 현아는 진짜 결혼에 대한 환상이 크구나.”
“저 어릴 때 꿈이 현모양처였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어릴 때 잘 모르고 꿈이 현모양처라고 하는 사람이 꽤 있다.
성인이 되면 보통 잊기 마련인데, 조현아는 아직도 현모양처가 되고 싶은 모양이다.
‘20대 초반은 다들 연예인 이야기에 빠져 있던데 결혼에 대해 저렇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다니, 좀 특이하네.’
이서우는 잠시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가 서둘러 거래 중개소로 향했다.
가면서 생산 기술 레벨을 확인했다.
‘약초액 제조는 중급으로 넘어왔네. 어디 보자…….’
중급 약초액은 얼마나 수치가 높아지는지 확인했다.
‘오, 300씩 오르네. 다 바르면 3,300이구나. 고급이면 더 엄청나겠는데?’
이서우는 약초액 재료를 확인했다. 다행히 있는 것들이어서 제조를 걸었다.
중급으로 넘어가면서 자동 제조가 중단되어 다시 걸어 줘야 했다.
‘물약 제조는 중급 10레벨이고, 곧 상급이 되겠네.’
부지런히 만들면 조만간 상급으로 오를 수 있는 레벨이었다.
이서우는 중개소에 가서 잡템들은 팔고, 필요한 재료들을 왕창 샀다.
자동 제조가 가능하니 미리미리 채워 두기로 한 것이다.
볼일을 마치니 아이템이 팔려 있었다.
하이 레벨 지역에서 획득한 아이템들은 강화가 되어서 드롭이 되기에 비싼 값에 팔 수 있었다.
‘참, 방어구는 어쩐다…….’
성으로 가려는데 걸리는 게 있었다.
처음에는 무조건 방어구를 바꾸려 했다.
하지만 권안나를 내치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녀가 떠들어 댄다고 해서 겁날 건 없지만, 귀찮아질 수 있어, 좋은 장비는 배제했다.
‘그래, 그냥 희귀로 맞추자.’
이서우는 거래 중개소로 들어가 희귀 등급 아이템을 구매하고 곧장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이서우는 기대에 찬 얼굴을 하고는 백작성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