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레벨이 갑이다
91화
여신이 강림이라도 한 듯한 아름다운 외모에 화려한 로브를 입고 있는 8서클의 마법사 몰디나와 화려한 장식이 달린 순백의 원피스를 입은 아리아가 조세프 백작에게 다가갔다.
“조세프 백작, 오랜만이지? 잘 지냈어?”
“네, 아리아 님. 꽤 오랜만에 뵙네요. 시간이 흘러 저는 점점 늙어 가는데, 아리아 님은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호호호, 그래?”
“그럼요. 정말 아름다우세요.”
“야, 쟤만 보이고 나는 안 보여?”
“그럴 리가요. 몰디나 님도 잘 지내셨죠? 여전히 빛이 나시네요.”
“빛나긴 개뿔. 아우라 마법을 썼으니 그렇지.”
“아, 그런가요?”
몰디나에게 후광이 비치는 것은 마법 때문이다.
외출을 할 때는 은근히 아우라 마법을 유지시켜 두는데, 이 때문에 사람들이 그녀를 신성시하게 된다.
원래 후광이 비치는 아리아와 차별받는 것이 싫어서 그녀가 개발한 마법이었다.
두 사람의 나이는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지만 외모는 여전히 20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살얼음판과도 같은 권력의 중심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다 보니 말과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외모도 여전하시지만 성격도 변함이 없으시네.’
조세프 백작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두 사람이 반가우면서도 측은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카이젠 제국에서 가장 강한 두 사람이다.
절대 강자들은 외롭다.
누구도 접근하려 하지 않고, 언제나 비위를 맞추기에 여념이 없다.
몰디나와 아리아는 그런 행동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뭘 해도 둘이 함께해서 좋은 점도 있지만, 단점도 분명히 있었다.
가장 큰 단점은 성격이 점점 괴팍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아리아는 신성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성격이 많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기준에서는 괴짜에 속했다.
몰디나는 괴짜를 뛰어넘는 수준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아리아가 있기 때문에 몰디나는 이성을 잘 붙잡고 있었다.
“결계를 보강할 동안 호위를 맡을 녀석들은 뽑아 놨어?”
“네. 그렇지 않아도 오라고 했습니다.”
“쓸 만한 녀석들이겠지?”
“네. 사이먼 자작에게 듣기로는 소드 마스터 중에서도 최상급이라고 합니다.”
“호오, 그래?”
“네.”
“이런 촌구석에 그런 인재가 있다니. 좋겠어, 조세프.”
“허허허, 그렇지 않아도 덕 좀 보고 있습니다.”
조세프 백작은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황궁에서나 볼 수 있는 실력자와 친분이 있으니 든든했다.
그때, 몰디나와 조세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리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뭐지?”
“왜? 뭔데?”
“아니, 뭔가 익숙한 기운이 느껴져서.”
“익숙한 기운? 이런 곳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질 이유가 없잖…… 어라, 이건…….”
-몰디나, 확실해. 이건 그의 애검의 향기야.
-나도 느꼈어. 매년 그놈 찾는다고 개고생했는데, 설마 살아 있었어? 하지만 이건 뭔가 좀 다른데…….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
-잠깐 기다려. 어차피 이곳으로 오고 있잖아. 괜히 자극하지 말고 기운도 좀 죽이고.
-이미 늦었어. 바로 코앞이야.
대화를 나누는 중에 익숙한 기운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왔다.
몰디나와 아리아는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화려하고 커다란 문이 열렸다.
* * *
이서우는 문이 열리고 새하얀 빛이 느껴지자 마나를 눈으로 보내 보호했다.
한데, 그 빛이 점점 강렬해지더니 온몸을 휘감는 게 아닌가.
전투를 하러 가는 것이 아니기에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서 다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마나를 끌어 올려 빛무리를 떨쳐 내려는데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이서우는 비눗방울에 갇혀서 둥실 떠가는 것처럼 허공을 유영했다.
목적 없이 떠도는 것이 아니라 정면을 향해 똑바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서우는 타인에 의해 자신의 행동이 결정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얼른 대검을 뽑아 마나를 있는 대로 때려 부으며 구속하고 있는 막을 갈랐다.
손에 걸리는 감각이 없었다. 여전히 몸도 허공에 뜬 채였다.
검이 안 된다면 육체를 모조리 동원할 수밖에.
이서우는 대검과 함께 온몸을 회전시켰다.
그제야 반응이 왔다.
강력한 공격과 더불어 마나가 주변으로 퍼져 나가며 막을 압박했다.
그리고 잠시 후, 마나를 더 투입하자 드디어 투명 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꽤 하네.”
“그러게. 영 맹탕은 아니네.”
“갑자기 무슨 짓입니까!”
“너, 어떻게 그놈 무기를 가지고 있는 거지?”
몰디나가 매섭게 이서우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서우는 대검을 힐끗 보더니 잠시 주변을 살폈다.
“여기서 할 말은 아닌 듯합니다만.”
“우리 주위로는 소리가 나가지 않아. 편하게 말해.”
“그런가요?”
“그래. 하지만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가만두지 않아.”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당신들이 그분과 연관이 있다는 걸 아니까요. 전 펠렌 님의 후예입니다.”
“미친! 뭐? 그놈의 후예라고?”
“그럴 수가…….”
평소 어떤 일에도 전혀 놀라지 않는 그들이었다.
황제가 불러도 내키지 않으면 무시한다.
제국을 돕겠다고 했기에 명분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돕지만, 전쟁의 순간이 아니라면 거절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만큼 무슨 일이 벌어져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그들이지만, 이번만큼은 크게 놀랐다.
조세프 백작은 그들이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녀들의 반응만 봐도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증명해 드리죠. 백호야.”
“네, 주인님. 부르셨어요?”
새하얀 털을 가진 백호가 소환되어 나오자 몰디나와 아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서우의 말에 반신반의했는데, 펠렌이 아끼던 백호를 보니 확실해졌다.
“어라, 너희들이 여긴 웬일이야?”
“그러는 흰둥이 넌?”
“나? 나야 새로운 주인님을 맞았으니 명령에 따라야지. 생긴 건 그대론데, 나이를 먹으니 노망이 났어? 그것도 모르게.”
“확실히 싸가지없는 흰둥이가 맞구나.”
“내가 이래 봬도 너희들보다 나이가 많다. 눈 깔아라.”
“개차반 성격을 보니 확실하네.”
“그러게. 진짜 그이의 후예라니.”
“그이는 개뿔. 그놈이지.”
몰디나는 자신을 버리고 사라진 펠렌에게 사랑과 동시에 미움의 감정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오랜 세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채 매년 찾아 헤매야 했으니 화가 나지 않는 게 어쩌면 더 이상할지도 몰랐다.
물론 아리아에겐 여전히 펠렌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었다.
“궁금증이 풀렸나요?”
“아니.”
“백호까지 보셨는데도 의문이 남았다는 말씀인가요?”
“어.”
짧게 끊어 말하는 몰디나의 목소리에선 여전히 온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그놈’이라고 칭하는 걸 보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할지도. 그나마 정상적인 사람이 1명은 있으니 다행인 건가.’
이서우는 두 여자에 대한 분석을 빠르게 마치고 되물었다.
“뭐죠?”
“너, 왜 그리 약해?”
“…….”
이서우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문 앞에서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이서우를 바라보고 있는 힐러들이 그녀의 말을 들었다면 자괴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셋이 덤벼도 이서우에게는 상대도 되지 않았으니까.
“이제 막 그의 뒤를 잇게 된 것 같은데, 너무 구박하지 마.”
“그런가?”
“그래. 딱 봐도 비실비실하잖아.”
아리아가 끼어들어 이서우의 편을 들어 주었다.
한데,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그것이 이서우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겨우 몇 달 사이에 이 정도 성과는 꽤 자랑할 수준이라고 여깁니다만?”
“헐. 몇 달? 그놈은 며칠 만에 강해지던데.”
“…….”
펠렌이 비약적으로 강해진 시기에 그녀들을 만났으니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서우의 성취가 탐탁지 않게 여겨질 수밖에.
그때, 백호가 나섰다.
“야, 너희들 옛 주인님께서 맡기신 거 있잖아. 주인님 실력이 불만이면 그거 빨리 내놔. 그래야 강해지시지.”
“그놈이 맡긴 거? 아, 그거. 근데 그걸 왜 쟤한테 줘?”
“맞아. 비실비실해서 능력도 안 되는데.”
몰디나의 말에 아리아까지 합세했다.
“주인님의 뒤를 이을 사람이 나오면 넘기게 되어 있다는 걸 모를 줄 알고? 안 넘기면 후회할 텐데?”
“우리도 조건을 걸 수 있으니 그따위 협박은 사절이야. 아니면 한판 뜨든가.”
“그때 옛 주인님께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옛 주인님께서 남기신 물건들만 다 착용하면 너희 따위는 상대도 안 되는 거 알지?”
“어림없는 소리! 우리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어련하실까. 어쨌든 지금 주인님의 현 상태에 맞게 조건을 걸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조그만 놈이 사사건건 시비네. 아주 잘 알고 있으니 걱정 마.”
몰디나는 백호의 말에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티격태격하는 그들을 보며 이서우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펠렌이 남긴 물건을 받을 기회가 있다는 거네. 내 수준에 맞는 조건을 저들이 걸 수 있다는 거고. 그러면 별문제는 안 되겠어.’
이서우는 긍정적으로 내다봤지만, 두 여인은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소리 내어 웃었다.
“호호호, 자신이 있나 보네.”
“물론이죠.”
“그래? 그럼 좋아. 어디 큰소리친 만큼 잘하나 보자고.”
몰디나의 시험을 통과하라
몰디나는 오랜 세월 펠렌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원망의 마음만 더욱 커져 갔다.
그러던 중 펠렌의 후예인 당신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펠렌의 물건을 보관하고 있지만 자격이 되지 않는 자에게는 주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미움은 크지만 약속은 약속.
그녀는 당신이 그 물건을 받을 정도의 실력이 되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 한다.
난이도 : B++
완료 조건 : 한 달 안에 200레벨을 만들어라. 경험치 밀어주기로는 인정이 되지 않는다.
성공 시 보상 : 펠렌이 남긴 물건.
실패 시 : 4차 전직에 다시 도전할 수 있다.
‘헉, 이번에 실패하면 4차 전직 이후에나 다시 도전 가능하다고? 이런 미친.’
이서우는 200레벨을 한 달 만에 찍어야 한다는 말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150레벨 이전에는 레벨 업이 빨랐지만, 지금은 쉽지 않았다.
수백억 경험치를 얻어야 겨우 1레벨을 올릴 수 있으니 사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나마 하이 레벨 몬스터가 존재하는 지역을 발견해서 다행이지만, 몰이사냥을 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퀘스트를 더 받는다면 모르지만 전초기지를 만드는 게 하루 이틀 만에 되는 것도 아니고…….’
37레벨이 남았다.
사냥으로 레벨을 올린다?
하이 레벨 존으로 가서 하루 종일 해서 겨우 1레벨이 올랐다.
레벨이 오를수록 요구 경험치가 많아지니 시간상으로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4차 전직 이후를 바라보자니 너무 늦었다.
풀 접속을 해도 1년 만에 된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번 기회에 무조건 성공해야 남들보다 앞서 나갈 수 있었다.
“왜? 자신 없어?”
“아뇨. 한 달이면 됩니까?”
“그래. 네 덕분에 오랜만에 여기서 한 달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겠네.”
“좋습니다. 그 조건 받아들이죠.”
묵직한 이서우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시간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이서우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