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레벨이 갑이다
100화
약속 장소에 가니 이설아가 와 있었다.
어제와 비슷한 복장에, 오늘은 마스크까지 착용한 모습이었다.
이미 한번 봐서 알아본 것이지 처음이었다면 몰라봤을 것이다.
“일찍 나오셨네요.”
“저야 작정을 해서 그런 거고, 서우 씨야말로 일찍 나오셨네요.”
“약속을 어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이설아는 그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사실 약속을 안 지키는 것을 싫어했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웬만해서는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한데, 여기는 좀 고급스러운 곳 같은데요?”
“네. 솔직히 어제 일반형에서 하니 조금 불편하더라고요.”
“하긴, 저도 꽤 많이 불편하긴 했어요.”
이서우도 집에서 고급형을 쓰다가 일반형을 오래 이용하니 많이 불편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니 자신을 위해 몇만 원 정도 더 쓴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일단 들어가요.”
“네.”
아침 시간이었는데도 자리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붙은 곳은 최고급형 베드가 있는 커플 방뿐이었다.
“어쩌죠?”
“자리가 없으니 거기라도 써야죠. 인기가 많은 곳 같으니 아예 저녁때 것까지 미리 계산을 해 놓죠.”
“네. 그게 좋겠어요.”
식사를 하고 왔는데 자리가 없으면 낭패였다.
고급스러운 곳이어서 그런지 정액제가 없었다.
그러나 어제 접속 종료 전에 본 것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이서우는 12시간을 미리 끊기로 했다.
이설아도 짧은 시간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동의했다.
계산을 미리 끝내고 커플 방으로 들어갔다.
외부와 차단된 아담한 방에 접속 베드가 놓여 있어, 들어가자마자 두 사람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식으로 되어 있는지는 몰랐네요. 어쩌죠?”
“어차피 구분이 되어 있으니 그냥 해요.”
“네.”
특수 주문된 일체형 접속 베드였는데, 칸막이가 없이 나란히 눕도록 제작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누우니 마치 킹사이즈 침대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접속 베드가 침대처럼 수평으로 설치된 곳이어서 분위기가 묘했다.
그나마 가운데 살짝 구분이 되어 있었지만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 조금만 움직여도 서로의 팔이 닿는 거리였다.
어색했지만 이미 계산은 했고, 다른 데 갈 만한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숨어 있던 플라스틱 커버가 올라오며 캡슐형 모드가 되자 이설아의 얼굴에 홍조가 피었다.
누워 있어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설아는 많이 어색해하고 있었다.
접속을 하자 그제야 이서우와 나란히 누워 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엄청 편하네. 이래서 다들 좋은 걸 쓰는구나.’
이서우도 여자가 바로 곁에 누워 있으니 신경 쓰였지만 게임에 접속하니 금세 잊을 수 있었다.
접속 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얼른 이사를 가서 접속 베드를 바꿔야겠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주변에 몬스터는 없네요.
-네. 조용하네요.
접속하자마자 주변부터 살핀 이서우는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경계를 살짝 풀었다.
-참, 서우 씨, 목걸이 진행 상황 확인해 보셨어요?
-이제 막 접속했는걸요.
-현실에서도 가격이 뜨고 있잖아요.
-아, 다른 걸 좀 한다고 미처 보지 못했네요. 특별한 거라도 있나요?
-지금 방송사들뿐 아니라 인터넷도 난리예요. 또다시 전장의 지배자의 물건이 나왔다고요. 시간 나실 때 한번 확인해 보세요.
-어차피 결과는 아는 거니 굳이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죠.
-하긴, 제가 서우 씨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몰라도 알고 나니 시간이 없을 것 같긴 해요. 이렇게 바쁜 분일 줄은 몰랐으니까요.
이설아도 바쁜 것으로 치면 누구 못지않지만, 이서우와 함께 플레이를 하면서 그야말로 정말 바쁜 사람이구나 싶었다.
‘아직 시간은 조금 더 있는데, 팔려도 가서 바로 찾을 수가 없네.’
바로 찾을 수는 없지만 얼마에 팔렸는지 우편으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패치가 되고 나서 더욱더 유저가 이용하기에 편리하게 바뀌었다.
-언니, 오빠, 저 왔어요.
-저도 막 왔어요.
시간이 거의 다 되자 조현아와 이민아가 접속했다.
-요즘 접속 방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조금 늦었네요.
-딱 맞춰 왔는데 뭘. 그나저나 민아, 접속 방에서 게임해?
-네. 그게 편하더라고요.
-하긴, 접속 방이 게임하는 맛이 나긴 하지.
-저도 이참에 접속 방이나 갈까요?
-현아는 집에서 하는 거야?
-네. 밤늦게까지 하기에는 집이 편해서요. 게다가 전 통금 시간까지 있어서 집이 편해요.
-스무 살인데 통금?
-네. 저도 미치겠다니까요.
며칠 같이 게임을 하면서 조현아가 대학교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대충 짐작했지만 통금 시간까지 있을 줄이야.
어떤 삶을 사는지 궁금했지만 누구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사생활을 굳이 캐묻지 않는 분위기여서 이서우도 이들과 함께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일단, 시작해 봅시다.
개인적인 대화를 이어 나갈 틈이 없었다.
이서우는 어제 갔던 곳으로 천천히 접근했다.
-날도 어두워지고 있는데, 저들은 쉴 생각이 없는 것 같네요.
-대체 뭘 만들기에 저렇게 미친 듯이 작업을 하는 걸까요?
-일단 제가 일꾼 중 1명을 데려와 볼게요.
-괜찮으시겠어요? 그러다가 발각이라도 당하면…….
-괜찮아요. 저 혼자 몸을 빼는 건 문제없어요.
-하긴. 그럼 저흰 여기서 기다릴게요.
-네.
이서우는 시력을 높였다.
마나를 이용하니 수 킬로미터 밖에 있는 것도 똑똑히 보였다.
탁 트인 곳인 데다가 매의 경지를 훨씬 넘어, 감시가 비교적 소홀한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서우는 어디를 공략해야 될지 결정을 내리고 그곳으로 은밀히 움직였다.
‘뭘 구상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엄청나겠네.’
거대한 돌이 곳곳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주 민둥산이 되겠어.’
그마나 이서우가 보았던 언덕은 이곳과 거리가 상당히 멀어 온전한 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미 주변의 산은 나무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은 주변에 나무들이 남아 있는 곳이 있어 그곳으로 몸을 숨기며 접근했다.
이서우는 멀리 돌을 나르는 길목을 바라보았다.
‘여기도 마땅치 않네. 차라리 돌을 채취하는 곳으로 가 보자.’
이서우는 길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끊기지 않고 자른 사과 껍질을 들어 올렸을 때처럼 길이 나선형으로 나 있었다.
감시하는 몬스터들을 피해 빠르게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산이 이미 반 정도는 깎여 나가서 올라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 사람으로 하면 되겠네.’
이서우는 돌을 자르는 사람 중 1명을 선택했다.
중요한 역할로 보였지만, 수십 명이나 되니 한 사람쯤 사라져도 괜찮겠다 싶었다.
이서우는 마나를 극한으로 끌어 올려 이동에 퍼부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어 다행히 들키지는 않았다.
노역에 지쳤는지 기절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크뢀? 크라알!”
바람이 갑자기 강해진 것을 느낀 몬스터가 이상히 여겨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자 인부들을 다시 다그쳤다.
‘짜식, 둔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감은 좀 있네.’
이서우는 괜히 일꾼들을 윽박지르는 몬스터를 보며 피식 웃고는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긴장한 채 이서우를 기다리고 있던 힐러들은 그가 무사히 돌아오자 그제야 안도했다.
-일단 이야기를 해야 하니 접속 종료했던 곳으로 갑시다.
-네.
이서우를 선두로 조용히 그곳에서 벗어났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이서우는 기절한 사람을 내려놓았다.
“어머, 서우 씨, 이 사람 귀가 뾰족해요.”
“특이하네요. 일단 깨워 볼게요.”
이서우가 그를 내려놓자 긴 머리가 휘날리며 뾰족한 귀가 보였다.
이서우는 마나를 주입해 그의 의식을 깨웠다.
“#)%…….”
사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려 하자 이서우가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가 멀리까지 퍼져 나갈지 모르니 조용히 하세요.”
“서우 씨, 이 사람 언어가 다른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죠?”
“네.”
이서우는 최대한 몸짓으로 적이 아니라고 말했다.
사내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_$#@*_)%*.”
“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아, 잠시만요.”
사내는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뭐라뭐라 떠들었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이내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서우는 마나를 주입해 사내의 목을 압박하고 있는 강철을 끊어 버렸다.
“[email protected]*%_*_%!”
강철이 끊어지자 흐릿하던 사내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뭐라 중얼거리더니 눈을 떴다.
“들리나요?”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군요?”
“아닙니다. 통역 마법을 사용한 겁니다.”
“통역 마법이라……. 마법사신가요?”
“저는 물의 엘프 종족의 전사 피욘입니다.”
“물의 엘프 종족이라고요?”
“네.”
이서우를 비롯해 힐러들도 엘프라는 말에 크게 놀랐다.
판타지 세계관을 가진 뉴 월드여서 언젠가는 엘프나 드워프, 정령, 드래곤 등이 나올 것이라 짐작은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워낙 힘든 노역을 해 와서인지 피욘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한데, 이곳에서 대체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이곳 사람이 아니군요.”
“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왔습니다.”
“설마, 고통의 벽을 넘어서 오신 분들이십니까?”
“고통의 벽이라고요?”
“네. 멀리 떨어진 곳, 어딘가에 지옥과도 같은 땅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곳에 사는 존재들이 이곳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결계를 쳐 두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높은 벽까지 쳐 놓았다고 합니다. 들어 보지 못하셨습니까?”
“서우 씨, 설마 성벽과 결계를 말하는 걸까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피욘 님께서 말씀하신 곳은 절대로 지옥과 같은 곳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그럴 리가…….”
이서우의 말에 피욘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을 그렇게 믿고 있었다.
저 결계 너머에는 끔찍한 세상이 있다고, 그곳으로부터의 침략을 막기 위해 결계와 벽을 세워 뒀다고.
“저와 제 동료의 모습을 잘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끔찍해 보이십니까?”
“…….”
피욘은 대답할 수 없었다.
첫눈에 봐도 그들은 귀한 곳에서 자란 사람들처럼 보였으니까.
피욘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면 지금까지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게 틀렸단 말인가.
“저는 오히려 이곳이야말로 끔찍한 곳 같습니다. 어떻게 쉬지도 않고 저 무거운 돌들을 나르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차차툼바 님이 편하게 머무실 수 있도록 위대한 집을 짓고 있는 중입니다.”
이서우가 오히려 이곳이야말로 지옥 같다는 말을 하자 피욘의 눈빛이 변했다.
그의 변화를 알아챘지만, 이서우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가기 위해 물었다.
“차차툼바라고요?”
“네. 그분을 모르십니까?”
“처음 들어 본 이름입니다.”
“그분은 이곳을 지배하시는 분이고, 우리의 보호자가 되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살 공간을 주시고, 먹을 음식을 주시고 계시죠.”
“노예 같은 삶을 살도록 했는데도 그를 칭찬하고 계시는군요.”
“그분은 잘못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가 미련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분은 현세에 다시없을 인자하고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피욘은 마치 광신도가 된 것처럼 차차툼바를 찬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데요?
-그러게요. 사이비 종교 집단 같은 느낌이 드네요.
-이런 식으로 세뇌를 시켜 사람을 부릴 정도라면 다른 일꾼들도 마찬가질 겁니다. 아마, 자기들은 노예라고 생각하지 않겠죠.
-그런……. 너무 끔찍해요.
-서우 님, 저들이 너무 불쌍해요.
피욘의 모습을 보며 각자가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했다.
이서우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하다가 파티 창으로 말했다.
-일단 이곳을 싹 정리하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꼭 이들을 구해 줘요.
평소와 달리 이민아가 적극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이설아와 조현아까지 합세했다.
‘역시 서우 님은 다른 사람과 달리 어려운 사람들을 기꺼이 도우시는구나.’
‘역시 오빠는 멋지다니까.’
‘강하지만 약자를 위하는 그 마음. 정말 멋지네요, 서우 씨.’
‘최대한 저들을 안전하게 구하면서 몬스터를 처치하자. 사람들도 구하고, 레벨도 올리고. 그야말로 일석이조지.’
이서우는 최대한 효율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머리를 굴린 것이지만, 힐러들은 선망과 존경을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