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레벨이 갑이다
102화
이서우의 대검에서 푸른빛의 구슬이 쏘아졌다.
크기는 커다란 수박 정도였는데, 몬스터들 사이에 떨어지자 엄청난 폭발음을 만들어 냈다.
심지어는 드드드드드 하는 소리가 나며 지진이 난 것처럼 땅까지 흔들렸다.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이 즉사했다.
갑작스러운 일에 돌연변이 오크들은 혼비백산했다.
그 틈에 이설아는 빠르게 앞으로 가서 포로들은 챙겼다.
동시에 백호가 흩어지는 돌연변이 오크들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공포로 얼룩진 몬스터를 잡는 것은 냉수를 마시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그사이 이설아는 수천의 노예들을 데리고 빠졌다.
안전한 곳으로 갔다고 판단한 이설아는 다시 이서우와 합류했다.
전투는 쉼 없이 이어졌다.
개체 수가 워낙 많아 레벨 업 소식도 두 번이나 들을 수 있었다.
대충 몬스터를 정리했지만 언제 다른 몬스터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다.
행여 돌연변이 오우거나 미노타우로스, 와이번, 재수가 없어 드레이크라도 나타나면 큰 낭패였다.
이서우가 몸을 빼자 살아남은 몬스터들은 그를 쫓지 않았다.
얼마나 강한지 이미 경험을 한 터라 섣불리 나서지 못한 것이다.
덕분에 이서우는 안전하게 포로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들을 어떻게 데려가느냐는 것이다.
포로들은 이동속도가 느려 많은 몬스터가 따라오면 낭패였다.
결국 이서우는 포로들의 안전만 확인한 채 힐러들을 두고 홀로 전투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이서우의 예상처럼 엄청난 몬스터가 모여 있었다.
정면 승부는 불리하다 느낀 이서우는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며 숫자를 줄여 갔다.
170레벨이 되니 업이 잘되지 않았다.
이서우는 새벽까지 몬스터들을 쉬지 못하게 계속 괴롭혔고, 숫자는 점점 줄어들어 결국 마지막 1마리까지 깔끔하게 처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몬스터를 처치했는데도 1레벨 상승으로 만족해야 했다.
‘다행히 큰 소란에도 다른 놈들이 오지는 않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지.’
이서우는 일단 포로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다.
당장 그 많은 인원이 쉴 곳은 많지 않았지만 다행히 사이먼 자작이 있는 곳에서 30킬로미터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와서 비교적 안전했다.
하지만 포로로 있던 그들은 어딜 가나 불안감을 완전히 떨칠 수 없었다.
오랜 세월 노예로 지냈으니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다음 날 이른 시간, 이서우는 다시 포로들과 마주했다.
인간과 엘프, 드워프의 대표가 이서우에게 왔다.
“어제 뵈었지만 엘프 대표로 온 피욘입니다. 다시 한 번 구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인간 대표 막심입니다.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드워프 대표 살라만이라고 하네. 구해 줘서 정말 고맙네.”
“이서우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잘 받았습니다.”
이서우는 그들의 진심을 받아들였다.
그의 대답에 굳어 있던 그들의 얼굴이 살짝 펴졌지만, 여전히 근심이 보였다.
수많은 몬스터를 처치하고 나타난 이서우가 그들로서는 두려운 것이리라.
“저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단지, 몇 가지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을 뿐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전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대표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서우의 말이 진짜인지 분석 중인 것 같았다.
하나, 그들이 지금 당장 그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하니 그저 믿을 수밖에.
“궁금한 게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당신들이 있던 곳은 무얼 하는 곳인지요?”
이서우의 질문에 세 대표는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차차툼바의 신전을 건설 중인 곳입니다.”
“차차툼바의 신전요?”
“네, 그렇습니다. 한데, 저도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엘프 대표에게 듣긴 했지만 당최 믿기지가 않아서요.”
“말씀하십시오.”
“정말 고통의 벽, 혹은 절망의 벽이라고도 불리는 곳을 넘어오셨습니까?”
“네, 맞습니다.”
이서우의 대답에 각 종족의 대표들이 눈을 크게 떴다.
괜히 어색해 이서우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이곳을 살아가는 존재들은 차차툼바에 대해 다들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차차툼바는 그저 하수인에 지나지 않지만 워낙 악질로 유명해서 모를 수가 없지요.”
이서우는 인간 대표가 치를 떠는 것을 보며 차차툼바가 대체 얼마나 악행을 저질렀는지 궁금해졌다.
“자세한 설명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절망의 벽을 넘어오셨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겠군요. 간단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곳에는 수백수천의 관리자가 있고 그 위에 수십의 통치자, 또 그 위에 총 7명의 지배자가 있으며, 그들은 3명의 절대자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존재는 그들 위에 있는 1명의 신입니다.”
“신이라고요?”
“정말 신인지 혹은 신의 가면을 쓴 자인지는, 아무도 본 이가 없으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하지만 차차툼바를 섬기는 자들이 그렇게 말을 하니 우리도 그런 줄 아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정보는 그들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뜻이군요.”
“……네.”
인간 대표는 힘없이 대답했다.
확신할 수 없는 정보는 그만큼 위험했다.
“그 문제는 제가 따로 알아보면 됩니다. 이 지역에 대해 그림으로 알려 주시겠습니까?”
이서우의 말에 이번에도 인간 대표가 나섰다.
그는 세로 1미터, 가로 80센티미터 정도 되는 직사각형의 그림을 그렸다.
이어 가운데 커다란 원을 그리고 삼등분했다.
그리고 나머지 공간은 그보다 조금 더 작은 크기로 7등분을 하고, 결계가 있는 근처의 한 지점을 콕 찍으며 말했다.
“이 지역이 바로 차차툼바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여기가 절망의 벽이고, 우리가 있는 곳은 이쯤 되겠네요. 편의상 쉽게 그린 것이지 실제로 이런 형태는 아닙니다.”
“네. 쉽게 이해가 가네요. 가운데 큰 세 곳이 아까 말씀하신 3명의 절대자, 주변 일곱 곳이 7인의 지배자가 가진 땅덩이겠군요.”
“네, 맞습니다.”
“그러면 끝에서 끝까지의 거리는 어느 정도 되나요?”
“평범한 인간의 걸음이라면 쉬지 않고 2년을 걸어가야 할 겁니다. 가로로도 1년 8개월 정도는 가야 하고요.”
“쉬지 않고 말입니까?”
“네. 차차툼바가 다스리는 곳만 해도 끝에서 끝까지 가려면 한 달 이상은 걸립니다.”
“엄청난 크기군요.”
“제가 말씀드린 건 장애물이 없는 평평한 땅이라는 조건이 붙었을 때입니다.”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하나도 없이 오직 평지만 걷는다는 가정을 하고도 그 정도라니.
이서우는 이곳이 생각보다 넓다는 것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냥할 곳이 많다는 점에서는 좋겠지만, 넓어도 너무 넓었다.
“차차툼바나 다른 관리자들이 머무는 곳이 어딘지 알고 계십니까?”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 그렇죠?”
“차차툼바가 다스리는 종속자들만 해도 100명이 넘고, 종속자들에게 속한 전투노예들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종속자들의 성을 모두 뚫어야 하니 웬만한 병력으로는 어림도 없지요.”
이서우는 앞으로의 여정이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예감에 묘한 흥분이 되었다.
‘그래, 하이 레벨 몬스터가 있는 곳인데 쉬운 게 오히려 말이 안 되지.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한 놈씩 쓰러뜨려 주마.’
인간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이서우는 일명 도장 깨기를 떠올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가 가진 생각을 말했다면, 힐러들을 제외한 모두가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서우는 해낼 자신이 있었다.
“여러분들을 핍박했던 놈들이 몬스터였는데, 그건 왜 그런 겁니까?”
“모든 관리자가 그런 식으로 이곳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세뇌를 시켜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것이지요. 의사소통도 할 수 있도록 해서 원하는 것은 뭐든 얻으려 합니다. 아시다시피 몬스터는 번식력이 매우 뛰어나니까요. 특이한 건, 평범한 몬스터들도 그들에게 세뇌를 받으면 아주 특출난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힘도 엄청나게 강해지고, 심지어는 마법까지 쓰는 경우도 있죠.”
“그러면 차차툼바를 비롯한 관리자나 그 윗급인 통치자, 지배자들은 인간입니까?”
“그게 의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인간이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관리자를 따르는 종속자나 그 밑의 전투노예들은 대부분이 인간이고, 그들이 차지하는 영토에서도 인간의 비율이 높습니다.”
“직접 확인을 해 봐야겠군요.”
“은인께서 이곳에 관심을 가져 주는 건 정말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만, 적은 인원으로 이곳을 다니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충고는 잘 새겨듣겠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절 멈추지는 못할 것입니다.”
시작은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맺음말은 단호했다.
이서우의 의지를 읽은 각 종족의 대표들도 더 이상 그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다.
“은인님.”
“말씀하세요.”
“실례가 안 된다면 은인께서 언제 이곳을 떠나실지 알 수 있을까요?”
“왜 그러시죠?”
“솔직히 이제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배신자로 낙인이 찍힌 이상 종속자가 운영하는 마을에도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종속자의 전투노예들이 있는 소규모 마을에도 아예 발을 들일 수 없고요.”
“다른 안전한 곳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정기적으로 결과 보고를 해야 하는데, 보고가 없으면 바로 놈들이 우리를 찾을 것입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았나요?”
“길어야 이틀입니다.”
“흠.”
실컷 구해 놓고 이제 와 이들을 버려두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각에 잠겨 있던 이서우는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제가 제안을 하나 하고 싶군요.”
“제안이라고요?”
인간 대표가 반색하며 되물었다.
오갈 데도 없는 마당이니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이 제시하는 것이라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저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터를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절망의 벽이라고 부르는 곳과 가깝습니다. 그곳은 몬스터들이 별로 없는 것 같으니 안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절망의 벽 근처라고 하셨습니까?”
“그곳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절망스럽지 않습니다. 그건 제가 확실히 보증할 수 있겠네요. 저도 그곳을 넘어왔으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평생을 자리하고 있던 불신을 떨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서우의 힘을 직접 보고, 그와 함께 온 힐러들의 표정을 직접 봤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시각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서우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선택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몫이다.
“선택은 직접 하시는 겁니다. 저희도 시간이 없는 관계로, 오늘 정오까지는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우리끼리 의논을 하고 다시 찾겠습니다.”
드디어 긴 대화가 끝이 났다.
이서우는 궁금한 것들을 대충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가자 힐러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서우 씨, 괜찮으시겠어요?”
“괜찮냐니요?”
“사이먼 자작 말이에요.”
“아, 그라면 오히려 좋아할 겁니다.”
“이방인들인데 과연 좋아할까요?”
“어차피 의지할 곳이 없는 자들입니다. 마을을 더욱 신속히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니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닙니까. 조세프 백작은 일꾼을 얻어서 좋고, 저들은 보금자리를 얻어서 좋고 말입니다.”
“그렇긴 한데, 혹시나 분쟁이라도 벌어지지 않을까 염려가 되네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저들도 각자가 가진 힘이 있는 것 같지만 사이먼 자작을 능가하는 이는 단 1명도 없습니다.”
“하긴, 그랬다면 노예로 붙잡히지도 않았겠지요.”
“그렇죠.”
“그럼 저들이 따라가기로 결정을 내리면 바로 돌아가겠네요?”
“네. 저도 볼일이 좀 있고, 길을 나서기에는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요.”
이서우의 말에 힐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대한 추측과 인간 대표가 말한 정보들을 토대로 여러 가능성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열띤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다시 세 종족의 대표가 이서우를 찾았다.
“은인님, 저희들은 만장일치로 은인님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 주셔야 합니다.”
“말씀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겠지만, 여러분들도 지금 가는 곳을 관리하는 분의 말을 잘 따라 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지요.”
“네. 그럼 1시간 뒤에 이동할 테니 준비해 주십시오.”
“네, 은인님.”
이서우의 승낙이 떨어지자 각 대표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1시간 뒤 이서우를 필두로 3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대거 이동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곳이 절망의 벽에서 가까워 몬스터들이 잘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돌아가는 길은 순탄했다.
하지만 사이먼 자작이 있는 곳에서 반나절 거리까지 왔을 때…….
지이잉, 지잉!
이서우의 주머니에서 격렬한 진동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