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레벨이 갑이다
103화
“주인님을 뵙습니다.”
“그래, 원인을 알아냈다고?”
“네, 주인님. 기억의 흔적을 쫓아 알아냈습니다.”
“말해 보라.”
“절망의 벽에서 온 자들을 죽이려다 되레 당했더군요.”
“하나밖에 없는 눈으로 설칠 때부터 알아봤다. 멍청한 놈 같으니. 이래서 하찮은 짐승 따위에게 맡기면 안 되는 것을.”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차차툼바가 관리하는 지역의 종속자 중 하나인 도비드였다.
턱 주위에 시커먼 수염이 덥수룩한 것이 영락없는 산적의 모습이었다.
눈빛은 매서웠고 눈썹은 진한 일자형이어서, 거친 느낌이 물씬 풍겨났다.
그의 앞에 납작 엎드린 채 긴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자는 도비드의 전투노예 중에서도 가장 강한 치치리였다.
키가 5미터는 넘는데 2미터 정도 되는 도비드 앞에 웅크리고 있으니 어색한 모습이었지만 치치리는 두려운 얼굴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외눈박이를 처치한 녀석들은 어디에 있지?”
“절망의 벽 근처에 터를 닦고 있었습니다.”
“뭣이? 이것들이!”
도비드는 불같이 화를 냈다.
비록 가장 외곽이라지만 엄연히 그의 땅인 곳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분노를 삭였다.
“병력을 보내면 키난 녀석이 눈치채겠지?”
“네. 너무 많은 병력이 빠지면 역공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기회주의자 같은 녀석.”
도비드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같은 주인인 차차툼바를 모시고 있지만 종속자들 사이에서도 경쟁이 심해 함부로 병력을 뺄 수 없었다.
그걸 알기에 도비드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제한적이었다.
도비드가 화를 내자 치치리는 침묵했다.
이럴 때는 조용히 엎드려 기다리는 것이 상책인 것을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이다.
“100명이면 놈도 섣불리 행동을 못 하겠지.”
“네. 그 정도 인원이면 키난도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할 수 있겠느냐?”
“네, 주인님. 100명이면 외눈박이를 처치한 놈들을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번 일에 실패하면 인질로 잡아 둔 너의 가족을 몰살시키겠다.”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100명을 부릴 수 있는 패다. 가라. 가서 나의 영역을 침범한 자들을 응징하라.”
“네, 주인님. 놈들의 목을 모조리 잘라 오겠습니다.”
치치리는 도비드가 던진 패를 조심스럽게 품에 넣으며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1천 명이 넘는 병력으로도 전멸을 면하지 못했는데 치치리는 어떻게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일까.
하나, 치치리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치치리가 나가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전투노예 하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도비드를 찾았다.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을 떠는 것이냐.”
“그, 그것이. 새로 건축 중인 신전의 일꾼노예와 감시자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뭣이!”
보고를 한 전투노예는 도비드의 분노에 덜덜덜 떨었다.
“감히 어떤 놈들이 차차툼바 님의 신전을 파괴했단 말이냐?”
“그것이…….”
푹!
털썩.
“멍청한 놈. 살아 있을 가치가 없는 놈이로구나.”
도비드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싶더니 전투노예 앞에 나타나 심장을 뚫어 버렸다.
2미터 신장의 근육질을 한 도비드의 스피드는 가히 전광석화였다.
“내가 직접 놈들을 응징하리라!”
도비드는 아무도 들어오지 말 것을 명령하고는 은밀히 자신의 거처를 빠져나갔다.
지금 상황에서 더 이상 병력을 뺄 수도 없어 그가 직접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며칠만 키난을 속여도 일을 끝내고 돌아올 자신이 있었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 * *
“서우 씨, 왜 그러세요?”
“아무래도 사이먼 자작님께 변고가 생긴 것 같습니다.”
“네?”
이서우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바로 이설아였다.
그녀는 이서우가 움찔하는 모습을 보이자 얼른 다가가 물었다.
“진동이 아주 강렬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이분들은 저와 동생들이 잘 모시고 갈 테니 먼저 움직이세요.”
“네.”
이서우는 설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재빨리 사이먼이 있는 곳으로 갔다.
워낙 많은 인원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어 반나절이지, 이서우가 전속력을 다하자 목적지까지는 1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아아아아악!”
“살려 줘!”
도착하자마자 비명 소리가 이서우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여기저기 쇳소리가 강렬하게 들렸고, 폭발음도 들렸다.
‘마법을 쓰는 자가 있나?’
이서우는 폭발음에 집중했다.
마나를 극한까지 사용하지 않는 이상은 근접 계열이 폭발을 일으킬 수 없다.
이서우는 폭발이 난 곳으로 달렸다.
가면서 걸리적거리는 몬스터를 베었다.
한데, 그들은 몸이 반 토막으로 잘려 나가도 죽지 않았다.
트롤 이상의 재생력을 가지고 있어 순식간에 하체가 재생성되었다.
서걱!
재생력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는 목을 잘라 버렸다. 그러자 그때서야 메시지가 들렸다.
‘돌연변이 트롤이었구나. 어쩐지. 이놈도 하이 레벨이어서 그런지 재생력이 장난이 아니네. 경험치가 높아서 좋긴 한데, 경비병들의 피해가 크겠는데.’
적들의 정체를 안 이서우는 배에 힘을 잔뜩 주며 크게 소리쳤다.
“놈들의 급소는 머리입니다! 목을 자르세요!”
온 천지가 떠나갈 듯한 소리에, 쇳소리도 폭발 소리도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하지만 이서우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이서우가 도착한 곳엔 5미터가 넘는 돌연변이 트롤이 있었다.
‘그 힘을 쓸 수 있으면 단숨에 처치할 수 있어.’
이서우는 노예들을 구할 때 사용했던 마나 탄을 써 보려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지면을 박차며 가까이 다가갔다.
“설마 트롤 마법사였나.”
“제때 왔구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곳은 제게 맡기시지요.”
“알겠네. 하지만 조심하게. 놈은 강력한 마법을 사용한다네!”
거대한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 낯설었지만 트롤이 확실했다.
이서우가 나타나자 사이먼은 몸을 뺐다.
트롤 법사는 사이먼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이서우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트롤 법사는 바로 도비드가 보낸 치치리였다.
“네놈이 외눈박이를 죽인 놈이구나.”
“외눈박이? 아, 사이클롭스? 그렇다면 어쩔 거지?”
“어쩌긴 뭘 어쩐단 말이냐, 멍청해서 죽은 것을.”
“복수하러 온 거 아니었어?”
“복수? 하하하. 그딴 멍청한 놈 백이 죽어도 복수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래? 그럼 종속자 나부랭이의 명령을 받고 온 거냐?”
“네놈이 그걸 어떻게…….”
“지금 네가 말해 주고 있잖아. 멍청한 걸로는 사이클롭스보다 네가 더 위인데?”
“이, 이놈이……!”
화르르르!
마나가 지팡이에 집중되더니 거대한 불덩어리가 이서우에게 날아왔다.
이서우는 피할까 하다가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기 위해 대검으로 베어 버렸다.
“어, 어떻게…….”
“헬파이어 같은 거 안 돼? 그거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테스트해 보고 싶었는데.”
이서우는 치치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며 슬슬 도발했다.
적의 도발 작전이라는 걸 알면서도 치치리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마나 미사일!”
다섯 발의 마나 미사일이 이서우의 급소를 노렸다.
순수한 마나가 응집된 것이 아니라 물의 기운에 살짝 덧씌운 정도여서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치치리도 그것을 아는지 연이어 마법을 시전했다.
“적을 구속하라. 속박!”
이서우가 마나 미사일을 피할 것 같자 치치리는 얼른 속박 마법을 썼다.
하지만 이서우는 그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무런 제약 없이 그곳을 벗어났다.
단순히 피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서우는 그에게 접근해 대검을 휘둘렀다.
“마나 실드!”
깡!
퍼석.
대검과 부딪치는 소리가 강렬하게 들리더니 이내 마나 실드가 부서졌다.
놀란 치치리는 블링크를 시전했다.
긴급 회피용이어서 마나 소모도 크고 장애물이 없는 짧은 거리만 이동이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확실한 안전을 보장하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그 안전성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서우는 치치리가 이동한 곳으로 빠르게 접근했다.
거의 치치리가 모습을 드러낸 직후, 이서우가 그에게 다다랐다.
그 모습은 마치 순간 이동을 한 것 같았다.
그때까지도 치치리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블링크의 단점은 공간을 순식간에 이동하는 것이기에 자신이 이동했음을 인지하는 데 찰나의 순간이지만 시간 차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고서클 마법사일수록 이 시간 차는 짧아져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치치리는 그 정도의 수준이 되지 못해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치치리에게 매우 안 좋게 작용했다.
서걱!
“큭!”
지팡이를 들고 있던 치치리의 팔이 잘려 나갔다.
재생력이 강한 트롤답게 금세 팔이 생겨났지만 마법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지팡이를 잡기 위해 치치리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서우가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퍽!
“크윽! 이, 이놈.”
“마법사들은 마법만 봉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군.”
이서우는 치치리의 명치를 발로 차 버렸다.
거대한 덩치가 보잘것없는 이서우의 발에 맞아 비틀거렸다.
죽이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이대로,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가족을, 가족을 살려야 해.”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치치리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치치리가 이서우를 향해 팔을 뻗었다.
마나를 증폭시켜 줄 지팡이도 없는데 왜 저런 행동을 하나, 의아했다.
하지만 곧 그가 무슨 생각으로 팔을 뻗었는지 알 수 있었다.
“죽어라!”
팔이 산산조각 나며 살점들이 이서우를 향해 날아왔다.
“저런 미친!”
마나가 잔뜩 담긴 살점들을 보며 이서우는 얼른 대검을 휘둘렀다.
마나 소드 배리어!
강력한 힘을 담은 살점이지만 이서우의 대검을 뚫을 수는 없었다.
“어, 어떻게 네놈이 마나 소드 배리어를…….”
팔이 재생되는 것이 보였다.
이서우는 또다시 그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블링크를 이용해 살점 공격을 할 것이 염려되어 서둘러 그에게 접근했다.
서걱!
트롤의 약점인 목을 베었다.
툭.
털썩.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의 무릎도 무너졌다.
그때였다.
처치 메시지가 뜰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메시지가 떴다.
치치리의 간절한 부탁
치치리는 가족이 인질로 잡혀 어쩔 수 없이 종속자에게 복종했다.
처음에는 힘을 키워 종속자 도비드의 등에 칼을 꽂을 생각이었지만 갈수록 세뇌가 심해져 결국은 복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당신에게 머리가 잘린 치치리는 세뇌가 풀렸고, 재생 능력이 뛰어나 잠깐 동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정신을 차린 치치리는 당신이야말로 가족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고 간절한 염원을 담아 부탁을 하게 되었다.
난이도 : B++
완료 조건 : 종속자 도비드를 처치하라.
성공 시 보상 : 3레벨 경험치.
실패 시 : 치치리의 저주 발동.
“좋아. 당신의 가족을 구해 주지.”
“고, 맙, 다.”
치치리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쓰러졌다.
-종속자 도비드의 전투노예 치치리를 처치하셨습니다.
-450,000,000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치치리의 지팡이를 획득하셨습니다.
-치치리의 피를 획득하셨습니다.
-치치리의 가죽을 획득하셨습니다.
-90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엄청난 경험치를 얻었지만 경험치는 10퍼센트도 오르지 않았다.
치치리를 처치하고 남은 몬스터들을 하나둘씩 정리했다.
사이먼 자작이 지친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고생했네. 자네 덕분이 최악의 상황은 넘겼네.”
“피해가 큽니까?”
“그렇다네. 놈의 마법에 많이 당했네. 인원은 보강하고 다시 공사를 시작해야 될 것 같네.”
“어차피 잠시 마을에 다녀와야 하니 제가 백작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병사들과 함께 죽은 자들을 수습해서 보낼 테니 자네가 잘 좀 지켜 주게.”
“네. 염려 마십시오.”
희생자들을 백작의 성까지 무사히 호위하라
적의 침입으로 무고한 생명이 죽었다. 사이먼은 영지민들의 희생을 안타까워하며 그들의 시신을 무사히 백작가로 호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난이도 : C
완료 조건 : 시신을 백작가까지 무사히 호위하면 된다.
성공 시 보상 : 5,000골드.
실패 시 : 사이먼 자작과의 친밀도 하락, 조세프 백작과의 친밀도 하락.
이서우는 레벨 업 경험치가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어차피 가는 길이어서 골드 보상으로 만족했다.
“참, 자작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제가 갔던 곳에서 노예로 잡혀 있던 사람들을 구해 왔습니다.”
“현지 사람들을 구했다는 말인가?”
“네. 한데 인간도 있고 엘프와 드워프 종족도 있습니다.”
“유사 인종이라면 특별히 상관은 없네. 어차피 이곳에 자리를 잡아야 하니 오히려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더 좋지. 한데, 인원은 어떻게 되나?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들인가?”
“인원은 3천 명 정도이고 제가 판단할 때는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약간의 능력들도 있고, 오랜 노예 생활을 해서 배신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세뇌입니다.”
“세뇌?”
“네. 조금 전 마법을 썼던 자도 세뇌를 당해서 사람들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또다시 잡혀가서 세뇌를 당하면 배신할 수도 있습니다.”
“세뇌는 어쩔 수 없는 일이네. 그저 잡혀가지 않도록 잘 지키는 수밖에. 한데, 그들의 능력은 어느 정도인가?”
“기사들에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과거의 힘을 되찾으면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지만, 사이먼 자작님을 위협할 정도는 절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건 반가운 소리구먼.”
사이먼 자작은 혹시라도 그들이 다른 마음을 품을 것이 염려되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도 힘이 있어야 가능한 법.
앞으로 더 많은 병력이 충원될 것이기에 사이먼 자작은 염려를 내려놓았다.
“그들이 곧 당도할 테니 같이 정리부터 하시죠.”
“그러세.”
이서우가 사이먼 자작과 함께 첫 마을이 될 이곳을 정리하기 위해 움직이려 할 때였다.
-오빠, 도와주세요! 고미 언니가 위험해요!
-뭐?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갑자기 산적 같은 놈이 나타나서 우리를 공격해요. 아악!
이서우는 갑자기 파티 창으로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라 얼른 사이먼 자작에게 말을 하고는 날듯이 달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