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레벨이 갑이다
105화
“오늘 메뉴 선정은 설아 씨에게 양보할게요.”
“그럼 오늘은 갈비 먹으러 가요.”
“갈비 좋아하시나 봐요?”
“갈비도 좋아하는데, 전 사실 그 집 냉면을 엄청 좋아해요.”
“아직 날이 춥지 않으니 나쁘지는 않겠네요.”
“전 겨울에도 먹는걸요. 여기 냉면을 먹고 나면 다른 집 건 못 먹어요.”
“그래요? 그럼 오늘 제대로 된 물냉면 한번 먹어 볼까요?”
“네.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어 이설아가 미소 짓는 것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표정이었다.
지금까지 앞만 바라보며 달린 이설아다.
상처뿐인 10대 후반을 경험하고 세상을 포기하려 했다.
현실을 도피하려고 상당 시간을 가상현실에서 보냈다.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6개월쯤 지나고, 그녀는 증강 현실과 가상현실 게임을 만나게 되었다.
뉴 월드처럼 완성도가 높은 게임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그 게임에 빠져들었다.
실력이 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때 제안을 받은 것이 바로 게임 진행자였다.
방송사에서는 그녀의 실력보다 외모에 더 후한 점수를 주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기회를 잡은 것에 만족하고 최선을 다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실력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정말 죽기 살기로 노력했다.
이 일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세뇌를 시키다시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패스했지만 대학도 나오지 않았고 남들 다 있는 흔한 자격증도 없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은 게임 방송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잊지 않았다.
정말 이 일이 좋고 즐거워서,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아서 선택했다는 것을.
그렇게 그녀는 미친 듯이 노력해서 5년 만에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뉴 월드를 만나면서 운이 좋아 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 모든 것이 그녀의 노력이 있었기에 잡을 수 있는 행운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관성적으로 이 일을 하는 게 아닌지 자문하곤 했다.
그때 전장의 지배자를 만났다.
잊었던 두근거림이 다시 한 번 찾아왔다.
이서우와 함께 게임을 하면서 깨달았다, 지금이야말로 진정으로 즐기고 있음을.
그렇다고 지금까지 해 온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둘 다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지만 즐거운 걸 어쩌란 말인가.
이설아는 미소를 지으며 갈비집 앞에 도착했다.
“향수라……. 이름 좋네요.”
“네. 갈비집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의외로 잘 어울린다는 느낌도 들어요.”
“들어가죠.”
“네.”
신발을 잘 넣어 두고 방으로 갔다.
외식을 하면 습관처럼 방으로 안내해 달라고 하는 이설아였다.
그녀의 환경을 이해하기 때문에 이서우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갈비 3인분하고, 물냉면 2개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방문이 닫히자 식당은 어느새 두 사람만의 공간이 되었다.
“생방송은 언젠가요?”
“원래라면 일주일에 한 번이에요. 피크 시간인 주말에 하죠. 하지만 최근에는 워낙 이슈가 되는 일이 많아서 그때는 방송사와 제가 필요하다고 서로 동의를 하면 바로 들어가요.”
“다른 방송이 잡혀 있어도 그렇게 하나요?”
“네. 요즘은 뉴 월드가 대세니까요.”
“하긴, 저도 다른 게임 방송은 못 본 것 같네요.”
“방송이 있기는 해요. 일주일에 한 번. 하지만 비중이 많이 낮은 편이죠. 그래도 아직 옛 향수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시청률이 완전히 저조한 편은 아니에요.”
“전 젊은데도 부모님이 그리워하던 그 분위기가 좋아서 카페고 음식점이고 그런 곳만 찾아다니니, 의외로 시청률이 나올 수도 있겠네요.”
“네. 하지만 뉴 월드의 인기가 갈수록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어서 쉽지는 않을 거예요.”
갈비와 쌈 채소, 백김치 등 간단한 음식들이 나왔다.
이서우는 불판에 큼직한 갈비를 두 덩어리 얹었다.
“여긴 비장탄이라고, 숯 중에서 최고급을 쓴다더군요.”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갈비는 불판에 오래 있으면 금방 타기 때문에 자주 뒤집어 줘야 한다.
지글지글, 소리를 내는 갈비를 뒤집으며 익히는 데 여념이 없었다.
“칼집이 나 있어서 좋네요.”
“네. 조미료도 쓰지 않는 집이고, 고개를 잴 때 산분해 간장처럼 안 좋은 것도 쓰지 않아요.”
“이왕 먹을 거라면 제대로 챙겨 먹는 게 좋기는 하죠.”
“네. 가격도 비싼 편이 아니라서 더 좋아요. 고기가 당길 때면 종종 오곤 하죠. 전 사람들이 맛집이라고 하는 곳은 잘 안 가거든요. 그런 곳에 가서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이제는 아예 안 가게 되더라고요.”
“저도 거기에는 동의해요. 제가 괜찮아 보인다 싶은 곳을 찾아가서 직접 평가를 하는 편이죠.”
“호호호, 맛집 찾아 동네방네 다니는 것도 재밌겠네요.”
고기가 익어 가는 것처럼 두 사람의 대화도 무르익어 갔다.
갈비가 거의 익어 가위로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있을 때, 기다리던 물냉면이 왔다.
살얼음이 시원하게 그릇을 채우고 있었고, 가운데 잘 말린 면발이 있었다.
면발 위에는 양념장과 얇게 썬 무와 오이, 반으로 깔끔하게 잘린 삶은 계란이 잘 놓여 있었다.
“어머, 서우 씨도 양념장만 넣고 드세요?”
“네. 전 그냥 식초나 겨자 소스 같은 건 안 넣어요.”
“저도 그래요. 괜히 양념을 추가하면 깔끔하지 않더라고요.”
“와, 국물이 끝내주는데요?”
“네. 여기서 직접 육수를 내거든요. 어떻게 만드는지, 자꾸 마시게 되더라고요.”
“진짜 한번 마시니 계속 입이 가네요.”
“그러다가 물냉면이 아니라 비빔냉면이 되겠는데요.”
“생각보다 입에 잘 맞네요.”
“호호호, 많이 드세요. 육수는 더 달라고 하면 되니까요.”
“네.”
이서우는 냉면을 먹으면서 고기를 뒤집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서우는 익은 고기 한 점을 냉면에 얹어 면발과 함께 입으로 가져갔다.
“어머, 서우 씨 진짜 저랑 취향이 너무 똑같으신데요?”
“어라, 그러네요.”
서로 보면서 따라 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거울을 보듯 이설아도 고기 한 점을 면발과 함께 먹고 있었다.
즐거운 대화까지 곁들여지니 식사 시간 내내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고기와 냉면까지 든든하게 먹은 두 사람은 카페로 갔다.
“차는 제가 계산할게요.”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대접하면서 한쪽이 부담되지 않도록 했다.
사실, 이제 이서우도 몇만 원이 부담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쪽만 일방적으로 계산하는 것을 두 사람 다 좋아하지 않았다.
“휴우,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었네요. 서우 씨 덕분에 보약 먹었네요.”
“보약요?”
“네. 즐겁게 식사하는 건 보약보다 좋거든요.”
“그렇게 따지면 저도 보약 제대로 먹은 게 되는군요.”
“호호호, 그게 그렇게 되나요?”
이설아는 식당에서부터 마스크를 뺐다.
선글라스는 여전히 쓰고 있어 표정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웃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참, 서우 씨, 그거 아세요?”
“네?”
“서우 씨 펫 있잖아요.”
“네.”
“서우 씨 펫 때문에 조련사가 인기 직업이 됐어요.”
“조련사가요?”
“네. 테이밍 마스터가 되어서 다들 귀여운 몬스터를 조련하겠다고 난리예요.”
“그래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대검 인기도 더 올라간 거 아세요?”
“그런가요?”
“네. 다들 서우 씨만큼 멋져 보이려고 난리예요. 대검의 가격이 최근 소폭이지만 오른 것도 그 때문이고요.”
“설아 씨 덕분에 이런저런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좋네요.”
“에이,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라뇨. 뉴 월드에서 정보가 얼마나 귀한데.”
이설아는 이서우와 만날 때마다 사소한 것이라도 정보를 주려고 애썼다.
그녀는 별거 아니라고 했지만 하이 레벨 지역을 같이 사냥하는 동안에 얻은 정보를 다 모으면 그 양이 엄청날 것이다.
이서우가 따로 찾아야 했다면 시간 낭비가 컸을 테니 결코 별거 아닌 정보가 아니었다.
“근데 생각해 보면 재밌네요.”
“뭐가요?”
“서우 씨가 대검 관련 직업인 줄 다들 착각하고 있는데, 약초꾼이라는 걸 알면…….”
“하하하, 그러네요.”
“아마 그 사실이 밝혀지면, 섣불리 판단하고 대검에 투자한 자신이 부끄러워 잠들기 전에 이불 킥 좀 할걸요.”
“그 장면을 떠올리니 재미있네요.”
이서우도 동의하는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확실히 전신보다 서우 씨의 인기가 더 올라갔어요.”
“전 조용히 게임하는 게 좋아요.”
“낭중지추라는 말이 있더군요. 피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서우 씨의 존재는 드러나게 될 거예요.”
“알아요, 뉴 월드를 하다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거.”
“네. 거기다 요즘 새로운 지역에서 사냥하면서 레벨도 쭉쭉 오르잖아요. 이제는 일반 지역에서 사냥하면 전 지역 몬스터가 다 달라붙어도 서우 씨를 어쩌지 못할걸요.”
“말씀을 듣고 보니 몰이사냥이 좀 당기는데요?”
“어우, 이벤트 때 그렇게 몰이사냥을 하셔 놓고 지겹지도 않으세요?”
“몬스터를 처치했다는 메시지가 요란하게 들릴 때의 그 기분을 못 느껴 보셔서 그래요. 처음에는 머리가 울려서 짜증이 나지만 익숙해지면 정말 천상의 소리가 따로 없어요.”
“힐러가 범위 공격이 되는 직업으로 전직할 수 있도록 빌어야겠네요.”
“제가 볼 땐 그건 불가능하지 싶은데요.”
“또 모르죠. 한 5차 전직쯤 되면 가능할지도.”
“희망 사항이시죠?”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호호호.”
두 사람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아 온 사람들처럼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그러네요. 어서 가시죠.”
“네.”
마무리를 하고 접속 방으로 갔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서 대기 번호까지 뽑고 있었다.
“와, 미리 계산을 해 두길 잘했네요.”
“그러게요. 아직 오후 시간인데 사람들이 엄청 많네요.”
“요즘 대학생들이 오전으로 수업 다 밀어 넣고 뉴 월드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지극정성이네요.”
“서우 씨도 아시다시피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리고 대학생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최근 가장 인기 있는 직장이 어딘지 아세요?”
당연히 돈 많이 주고 일 편한 직장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뻔한 답이라면 묻지 않았을 것이다.
이서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가 말했다.
“칼퇴에 점심시간 2시간 주는 곳이래요.”
“설마, 점심시간에도 접속하는 거예요?”
“그렇다니까요. 이제 뉴 월드는 평범한 게임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생활이 되어 버렸어요.”
이서우는 뉴 월드를 단순히 돈 벌 수단으로만 생각했는데, 하나의 문화가 되어 있다는 것을 그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커플 룸으로 가서 자리에 누웠다.
2시간 내내 쉬지 않고 대화를 하다가 나란히 누웠을 뿐인데,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역시나 아직은 바짝 붙어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의식을 하지 않으면 되는데, 접속 전까지는 저절로 의식이 되었다.
이서우는 얼른 접속하려고 눈짓을 했다.
곧 익숙한 배경이 보였다.
“아직 현아는 안 왔나 보네요.”
“그러게요.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
“아직 이른 새벽이니 조금 더 기다려 봐요.”
“네. 그럼 전 정비하고 올게요.”
“저도 몇 가지 준비를 좀 해야겠네요.”
이서우와 이설아는 각자 정비를 위해 헤어졌다.
거래 중개소로 가던 이서우는 하이 레벨 지역에 대해 생각했다.
‘종속자가 그 정도 수준이라면 관리자나 통치자는 엄청나다는 건데. 3차 전직을 해도 빡빡할지도 몰라. 종속자도 민아 씨가 아니었으면 이기지 못했을 거야. 이렇게 되면 사람들을 더 빨리 끌어들여야 한다는 건데…….’
유저들이 하이 레벨 지역에 퍼지면 종속자나 관리자를 처치하는 게 더 수월해지기에 이서우는 계획을 더 앞당길 방법을 모색했다.
3차 전직의 필요성이 더욱 부각되는 전투였고, 유저들을 하루빨리 끌어들여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한판이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쉽게 끌어들일 수 있을까.’
우선 백작의 허락을 얻어야 하겠지만, 관리자에 대해 이야기하면 분명 백작도 허락할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빠른 시간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냐는 것이다.
그냥 무턱대고 괜찮은 곳이 있다는 식은 소용이 없었다.
‘흠, 방송을 이용해 봐야 하나.’
정말 싫었지만 방송 출연까지 생각하는 이서우였다.
하지만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싫어 여전히 꺼려졌다.
‘그래, 얼굴을 내밀지 않으면 되잖아. 방송을 꼭 현실에서만 하라는 법은 없지.’
이설아가 게임 내에서 했던 방송을 떠올리자 이서우는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그와 관련해서는 이설아와 대화를 해 봐야겠다고 정리했다.
그러곤 거래 중개소에서 팔 물건은 팔고, 필요한 재료들을 왕창 샀다.
‘아차, 목걸이!’
이서우는 얼른 경매장으로 갔다.
우편으로 경매 진행 과정이 세세하게 나와 있겠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가격이었다.
‘헉!’
이서우는 확인하자마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