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레벨이 갑이다
116화
“이곳이네.”
“뭔가 느껴져?”
“다크 엘프에 당했다던 엘프 기억나지?”
“응.”
“그때 느꼈던 기운이 여기서도 똑같이 느껴져.”
“난 별다른 느낌이 안 드는데.”
“내가 가진 특수 스킬 때문에 그래.”
이서우는 관찰력이 통찰력으로 바뀌면서 주변 사물을 느끼는 감각이 더욱더 탁월해졌다.
관찰력이 있을 때라면 느끼지 못할 것들도 지금은 잡아낼 수 있었다.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하루밖에 안 지났다고 하니 찾을 수 있을 거야. 잠시만…….”
이서우는 마나를 조금 더 사용해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20미터 정도 북서쪽에서 희미하지만 어둠의 기운이 느껴졌다.
“여기야.”
“정말 신기해. 어떻게 척척 찾아내지?”
“너도 약초꾼 되면 알 수 있어.”
“약초꾼 되면 오빠처럼 강해지는 거야?”
“한번 시도해 봐.”
“피, 됐네요.”
이서우가 장난치고 있다는 걸 안 이설아는 내심 기대했다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누가 직업 뭔지 물어봤는데 둘 다 약초꾼이라고 하면 참 웃기겠다.”
“특히 레이드 참여하면 대박이겠는데?”
“호호호, 그렇지?”
뉴 월드에서는 가장 강력한 몬스터를 잡기 위해 레이드를 모집하는데, 이서우와 이설아가 참여한다.
그때 주최 측에서 “당신들 직업이 뭐요?”라고 묻는데, 둘 다 동시에 “약초꾼요.”라고 하는 상상을 이설아는 하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재밌는지 한참을 웃고서야 멈추었다.
개그 코드가 참 희한하다며 이설아를 동물원 원숭이 보듯 구경하던 이서우는 다시 어둠의 기운에 집중했다.
“흔적이 꽤 길게 이어지네.”
“그러게. 벌써 반나절은 쫓아온 것 같은데.”
“일단 도비드와 키난의 지역은 아닌 것 같아.”
“하긴, 우두머리가 없어져서 그 두 지역은 혼란스럽겠지?”
“그렇겠지. 하지만 구조를 보니 서로 호시탐탐 노리는 것을 보면, 정비는 금세 될 것 같아.”
“그러면 그 인근 지역에 있는 종속자 중에 하나가 일을 저지른 걸까?”
“그럴 가능성이 높지. 원래 끗발 있는 것들은 뒤에서 구경만 하잖아. 지배자는 당연히 이런 일에 나서지 않을 테고, 통치자도 변두리에 관심을 쏟을 여력은 없을 거야.”
권력과 힘을 가진 자들은 항상 중앙 무대에 오르기를 바란다. 이곳이라고 다르지는 않다.
이서우는 통치자 이상이 변두리인 이곳에 관심을 기울였을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곁에 두고 유통기한이 다 돼 가는 음식을 찾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점점 익숙해지니 속도를 조금 더 높일게.”
“응, 오빠.”
갈수록 기운이 점점 희미해지니 놓칠 법도 했지만 이서우는 오히려 더욱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그냥 달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어서 이설아도 무리 없이 쫓을 수 있었다.
그렇게 수십 킬로미터를 다시 갔을 때에야 비로소 이서우는 멈추었다.
그야말로 휴식 없는 강행군이었다.
이서우는 높은 나무 꼭대기로 올라갔다.
워낙 튼튼한 나무들이어서 이설아가 무게를 더했어도 끄떡없었다.
“저쪽에서 평소보다 조금 더 강한 기운이 느껴져.”
“그럼 다 온 거야?”
“직접 확인해 봐야지.”
“근데, 인가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비밀 장소일지도 모르지. 다크 엘프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이설아는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산세로 둘러싸인 지형이어서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이서우의 표정이 변하는 걸로 봐서는 뭔가 있구나 싶었다.
다시 내려온 이서우는 조심스럽게 흔적을 따라갔다.
이서우는 피욘이 준 정수를 꺼냈다.
마나를 주입하자 구슬이 밝게 빛났다.
“뭔가 좀 느껴져?”
“아주 희미하지만 피욘과 비슷한 힘이 느껴지는 것 같아.”
“드디어 다 온 건가.”
“일단 흔적을 따라가 보자.”
“응.”
이설아는 하루 종일 뛰기만 해서인지 지루하던 참이었다.
이제는 퀘스트를 진행하든 사냥을 하든 다른 걸 하고 싶었다.
산 하나를 넘어가자 기운은 더욱 또렷해졌다.
“거리가 더 가까워졌어. 곧 너도 느낄 수 있을 거야.”
산을 조금 내려가자 이설아의 표정이 변했다.
“오빠, 나도 느껴져.”
“조심해. 물의 엘프들이 인질로 잡혀 있을지 모르니.”
“혹시 모르니 힐을 준비할게.”
“그래.”
이설아도 200레벨을 찍고 3차 전직을 했다.
사냥을 하면서 이서우보다 훨씬 레벨이 빨리 올라 가능했다.
힐러 중에서는 이제 이설아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3차 전직 힐러가 되면서 강력한 스킬들이 생겨났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부활이었다.
부활 대상은 파티원만 가능하고, 살아나도 하루 종일 50퍼센트의 능력밖에 못 쓰지만 접속 제한 페널티를 받지 않는다는 게 매력이었다.
또한 모든 상태 이상을 회복할 수 있는 스킬도 있었다.
이와 함께 가장 큰 변화는 공격력 스킬이 꽤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그동안은 사실 홀로 사냥하기 힘들 정도였지만, 3차 전직 이후에는 충분히 가능해졌다.
힐러의 능력이 상승하니 이서우도 조금 더 편해졌다.
마음대로 몰이사냥을 해도 부담이 없었고, 혹시라도 독에 중독될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낯선 곳이다.
혹시 모를 위험 때문에 이서우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설아야, 멈춰!”
“……!”
단호하고 강한 목소리에 이설아는 놀란 눈으로 이서우를 바라보았다.
“나오시지?”
“그래도 아주 멍청이는 아닌가 보네.”
이서우가 살기를 띠며 한곳을 응시하자 시커먼 피부에 뾰족한 귀를 가진 존재가 나타났다.
“네가 다크 엘프인가 보군. 한데, 다른 놈들은 안 나올 생각인가 봐? 설마, 기습이라도 하려고?”
“호오, 이거 진짜 놀랍군. 인간 주제에 꼭꼭 숨은 우리 일족의 기운을 느끼다니.”
사내의 말에 주변에서 10여 명의 다크 엘프가 추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인질로 잡고 있는 엘프들은 지하에 있나.”
“그렇다면 어쩔 거지?”
“어쩌긴. 가서 구해 와야지.”
“네가? 하하하, 이거 지금까지 들었던 그 어떤 농담보다 웃기는군. 감히 인간 따위가 그게 가능할 거라 여기는 건가.”
“난 어렵지 않게 될 것 같은데 말이야.”
“뭐, 그건 조금 있으면 밝혀지겠지. 그 전에 몇 가지 묻지. 네놈이 도비드와 키난을 처치했나?”
“다크 엘프 주제에 종속자들의 이름을 함부로 말해도 되나 봐?”
“그따위 놈들은 진정한 종속자가 아니다! 쓰레기 지역을 관리하는 허접한 놈들이었으니.”
종속자에 대해 거침없이 하는 말에 이서우는 피욘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노예들은 주인의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물론 지금 나타난 다크 엘프들은 도비드와 키난을 주인으로 섬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반응은 과했다.
“관리자는 아닌 듯하고, 너도 허접한 종속자의 졸개인 것 같은데?”
“감히 인간 따위가 고귀하신 분의 이름을 들먹이다니. 죽고 싶은 게로구나.”
“발끈하는 걸 보니 종속자의 졸개가 맞군. 고작 종속자의 노예 주제에 더럽게 큰소리치네.”
말로 잘 구슬려서 정보를 캐내려 했지만 종속자라는 말만 나와도 발끈하는 모습에 포기했다.
오히려 빨리 제압한 뒤 힘으로 원하는 것을 얻는 게 더 빠를 거라 여겨졌다.
-더 이상 얻을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으니 바로 공격할게. 조심해.
-응. 뒤는 나에게 맡기고 마음껏 휘저어 버려!
이설아의 응원을 받은 이서우는 가볍게 미소로 응답하고는 대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다크 엘프가 가소로운 듯 웃었다.
“다크 필드!”
“다크 필드!”
사내의 말에 다른 엘프들도 똑같이 외쳤다.
-다크 필드가 발동되었습니다.
-어둠의 기운이 반경 500미터 안을 뒤덮습니다.
-어둠의 힘이 100퍼센트 증가합니다.
-어둠의 힘을 가지지 않은 존재는 전체 능력치의 10퍼센트가 하락합니다.
-다크 필드에서는 질병과 저주의 기운이 더욱 강력해집니다.
-시전자를 처치하지 않으면 다크 필드를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다크 필드가 펼쳐지자 힘이 약화되는 게 느껴졌지만 이서우는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다.
이서우가 힐끗 이설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괜찮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이서우의 모습이 사라졌다.
“뒤다!”
눈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는데, 다크 엘프의 리더는 똑똑히 확인했다.
하지만 그가 소리쳤을 때 이서우는 이미 뒤쪽에 있는 다크 엘프에게 접근한 상태였다.
챙!
다크 엘프는 50센티미터 정도 되는 중간 크기의 쌍검을 교차시켜 이서우의 대검을 막았다.
하지만 강렬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서우의 모습은 또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놈이 생각보다 강하다. 다들 전력을 다해라!”
다크 엘프 리더는 이설아는 그다지 위험인물로 여기지도 않았다.
함께 있어도 존재감이 전혀 없어 오직 이서우만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이서우는 2차 전직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공격력만 해도 3배 이상이 증가했다.
생명력은 100만이 넘어, 거의 정예 몬스터급 수준이었다.
펠렌의 방어구를 착용하면서 허접했던 과거의 방어력은 사라지고 물리 방어력과 마법 방어력이 각각 20만을 훌쩍 넘겼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잠재력이 받쳐 주는 한도 내에서 마나를 극한까지 주입하면 모든 아이템의 능력치가 2배 상승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이서우가 갑자기 2배 이상 빨라지자 다크 엘프 리더는 두 눈을 의심했다.
힘을 어느 정도 숨기는 것은 기본이다.
누구도 처음부터 100퍼센트 전력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은 그렇다.
한데,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 절반 이상이나 힘을 숨긴다는 건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크 엘프 리더는 미처 이서우가 지금처럼 강력한 힘을 보일 거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서걱!
잘못된 추측의 결과는 바로 드러났다.
다크 엘프 하나가 가슴이 쩍 갈라지며 심장이 잘려 나가 버렸다.
그나마 다크 필드로 인해 몸통이 반 토막이 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서슬 퍼런 이서우의 대검이 움직였다.
단지 푸른색의 강렬한 빛만 보일 뿐, 정확하게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누구도 보지 못했다.
푹!
대검은 다크 엘프의 심장 깊숙이 박혀 들었다.
어둠의 기운으로 소생시켜 볼 틈도 없는 즉사였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다크 엘프 리더는 핏대가 설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다크 웨폰을 시전한다!”
사내의 외침에, 당황하던 다크 엘프들이 재빨리 리더에게로 모였다.
이서우는 바닥에 쓰러진 다크 엘프를 힐끗 보고는 목표를 바꾸려는 순간이었는데, 갑자기 모두 리더에게로 피하는 게 아닌가.
‘다크 웨폰? 뭐지?’
의문이 들어 무슨 짓을 하나 잠시 살펴보았는데, 다크 엘프들이 기차놀이를 하는 아이들처럼 리더의 어깨를 잡은 채 뒤로 쭉 섰다.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에 이서우가 땅을 박차고 다가가려는데 갑자기 어둠의 기운이 폭풍우처럼 몰아쳤다.
“설아야, 이쪽으로.”
“응!”
이설아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얼른 이서우의 곁으로 갔다.
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고, 정화와 청명만 수시로 이서우에게 시전했다.
혹시라도 독이나 저주 등이 걸릴 수 있어 미리 대비하는 것이었다.
-다크 스톰이 형성됩니다.
-반경 500미터 안에 있는 생명체는 다크 스톰의 영향을 받습니다.
-다크 필드와 만나 다크 스톰의 능력이 더욱 상승합니다.
-영향권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능력이 30퍼센트 하락합니다.
-어둠의 힘이 200퍼센트 상승합니다.
‘필살기라도 쓰려는 건가.’
이서우는 더 이상 지켜보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마나를 모든 아이템에 잔뜩 담았다.
소모되는 마나는 크지만 이미 50만을 넘긴 마나여서 써도 써도 마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템에 마나를 잔뜩 주입한 채 오랜 시간 유지하는 것은 그로서도 부담이어서 최대한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했다.
이서우가 대검을 움켜쥐고 전진하려 할 때였다.
“다크 웨폰!”
다크 엘프 리더의 목소리와 함께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서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필살기를 준비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기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