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레벨이 갑이다
168화
뉴 월드에 접속하자 이서우와 이설아는 잠시 어색한 얼굴로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커플 접속 베드를 이용할 때 항상 같이 누워 있어 이상할 것이 없는데도 이설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긴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이상해.’
이설아는 자신도 모르게 양손으로 볼을 만졌다.
“험, 험. 접속했으니 정보부터 얻으러 갈까?”
“응? 아, 맞다. 정보 길드부터 가보기로 했었지.”
이서우가 슬며시 침대에서 내려오자 이설아도 얼른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침실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가니 집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주인님, 외출하시는 겁니까?”
“그래요. 며칠 걸릴 수도 있으니 관리를 잘 부탁해요.”
“주인님, 하대를 하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전 이게 편하네요.”
“네. 알겠습니다.”
“참, 관리비용이 드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세요.”
“네, 주인님.”
이서우는 집사에게 관리비로 1만 골드를 미리 지급해 주었다.
하인들의 월급뿐 아니라 저택을 운영하는데 들어가는 돈이 꽤 많았다.
저택을 나온 두 사람은 속도를 높였다.
도시가 보이는 곳에서 다시 이동속도를 늦춘 뒤 태연하게 들어갔다.
-우리가 있는 곳이나 여기나 별반 다르지 않네?
-거의 똑같아. 하이 레벨 지역으로 빠져나간 인원이 꽤 있지만 퀘스트 때문에 머물러 있는 인원도 있으니 사람은 많아.
-랜덤으로 인원수를 맞추고 퀘스트를 주면서 숫자를 관리한 거구나.
-그렇겠지. 너무 한쪽으로 쏠리면 안 되니까.
-그런 거 보면 중국과 인도 건은 너무했어.
최근 뉴 월드에서 공식적으로 중국과 인도 진출에 대한 공지를 했다.
시기는 1월 14일 금요일.
공지에는 원래 춘절을 지내고 2월로 오픈 시기를 잡으려 했지만, 더 이상 기다리게 하는 것은 사용자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라 판단하고 시일을 당겼다고 했다.
시일이 당겨지자 중국과 인도에서 뉴 월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환호했다.
게다가 오픈에 맞춰 이벤트까지 준비되고 있다니 다들 엄청 기대하고 있었다.
특히 1월 1일부터 사전 캐릭터 생성 이벤트를 실시한다고 하니 인터넷 공간에서는 벌써부터 난리가 났다.
하지만 사람들을 사로잡은 내용은 따로 있었다.
-오픈 후 게임이 진행되면 알겠지만 3파전이 될지, 아니면 엘사둔과 카이젠이 동맹을 할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정말 모르게 됐어.
-그것 때문에 소연 언니는 또 바쁜가 보더라.
-그렇겠지. 중국과 인도가 하이 레벨 지역에서 시작한다면 엘사둔도 긴장을 해야 할 테니까.
-맞아. 인원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지나면 불리해질지도 몰라.
-그렇지. 하지만 다행스러운 건 하이 레벨에 대한 언급은 없다는 거야.
-그러게. 오빠가 많이 걱정했잖아.
-걱정했지. 비록 남들보다 몇 달이나 빨리 하이 레벨로 시작했지만 중국과 인도에서 수억의 인구가 하이 레벨이 되어버리면 금세 쫓아올 테니까.
-어쩌면 하이 레벨은 히든 클래스인지도 몰라. 그러니 언급이 없는 거고.
-그럴 확률이 높겠지. 몇 배나 많은 인원이 게임을 할 텐데 전부 하이 레벨 유저면 낭패니까.
이서우는 중국과 인도가 하이 레벨로 시작할까 봐 상당히 걱정을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와 관련된 내용은 공지 어디에도 없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다.
허름한 곳을 지나 지난번에 갔던 곳을 그대로 밟아 갔다.
하지만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서우는 다리에 마나를 담아 철문을 부숴 버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시커먼 어둠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원래 이렇게 썰렁해?”
“이렇지는 않았는데. 철수를 한 건가? 일단 안쪽까지 살펴보자.”
“응.”
이서우는 이설아의 팔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암흑의 공간을 뚫고 들어갔지만 차가운 벽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완전히 철수했나 보네.”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이라 자주 옮겨 다니나 봐.”
“그러게. 어떡한다.”
이서우는 이들을 믿고 다른 방법은 알아보지 않아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계속 머물 수는 없어 일단 밖으로 나왔다.
“어라, 이것 보게.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왔네.”
“그러게. 손님이 너무 없어서 자리를 옮겨야 하나, 했는데 끝물에 꽤 괜찮은 연놈들이 걸려들 줄이야. 어이, 거기 넌 살 수 있는 기회를 줄 테니 거기 예쁜 아가씨 놔두고 꺼져.”
피식.
이서우는 7명의 건달들이 멀리서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것을 보며 같잖아서 피식 웃고 말았다.
“어쭈, 웃어? 현실이었으면 살려 달라고 무릎 꿇고 싹싹 빌었을 놈이 게임이라고 어깨에 힘주네. 꼴에 남자라고 잘난 체 좀 해 보시겠다?”
“주둥이로 싸우나 보지?”
“뭐? 이 새끼가 진짜 죽고 싶나. 일단 저 주둥이부터 손 좀 봐야겠네. 얘들아, 가서 끌고 와!”
“네, 형님!”
가장 앞쪽에 있는 건달의 말에 6명의 사내들이 단검을 꺼내 들고는 이서우를 덮쳤다.
동작이 굼뜬 것이 딱 봐도 동네 양아치 수준이었다.
이서우는 가만히 서서 살며시 양손을 가슴 앞까지 올렸다.
그러고는 딱밤을 때릴 때처럼 엄지로 중지를 잡아 원을 만들었다.
이서우의 행동이 건달들을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건달들이 마치 폭주기관차처럼 이서우에게 돌진했다.
앞서 달려가던 건달 두 명이 거리를 좁히며 주먹을 뻗었다.
이서우는 건달을 보며 다시 한 번 피식 웃고는 주먹을 살짝 피해 손가락을 두 번 튕겼다.
딱! 딱!
건달 두 명이 마치 보이지 않는 유리벽에 부딪친 것처럼 벌러덩 넘어졌다.
그러고는 이서우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뒤이어 달려오는 건달들 사이를 누비며 딱밤을 날렸다.
딱! 딱! 딱! 딱!
경쾌한 소리가 들리며 남은 4명의 건달마저 순식간에 쓰러졌다.
덜덜덜덜.
딱밤으로 사람이 죽다니.
건달 두목은 평생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무시무시한(?) 순간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그저 돈 많고 평범해 보여서 시비를 건 것인데, 판단을 잘못해도 한참이나 잘못했다.
“이리 와.”
“죄, 죄송합니다, 나리. 히익!”
건달 두목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는 얼른 도망가려 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반대쪽에 있던 이서우가 그의 앞에 있었다.
“히끅.”
“어딜 도망가려고.”
“주, 죽을죄를 졌습니다. 부디 목숨만은…….”
“묻는 말에 대답하면 살려는 주지.”
“마, 말씀만 하십시오!”
“이곳에 오래 살았나?”
“네? 그게, 오래 살기는 했는데…….”
건달 두목은 예상치 못한 질문을 하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두목의 입에서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이서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건달 두목 같은 부류는 강하게 찍어 눌러야만 복종을 한다.
괜히 사람대접을 하면 오히려 우습게 보기 때문에 이서우는 철저히 힘의 논리로 그를 대했다.
“내가 그리 어려운 질문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오, 오래 히끅, 살았습니다.”
“그래? 그럼 여기에 뭐가 있었는지 잘 알겠네.”
“네? 네, 알고 있습니다. 히끅!”
자꾸만 딸꾹질을 하자 이서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건달 두목이 얼른 입을 막았다.
이서우가 손가락을 튕겼다.
이제는 죽었구나 싶어 너무 놀란 사내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제 딸꾹질은 멈춘 것 같군.”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큰 공포를 맞본 건달 두목은 언제 그랬냐는 듯 딸꾹질을 멈추었다.
그제야 건달 두목은 손가락으로 튕기는 시늉을 한 것이 자신의 딸꾹질을 멈추게 하기 위해 한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고 안도했다.
“이제 말해 봐. 이곳에 있던 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그, 그게…….”
“설마 대답을 안 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 그게 아니라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고 싶은데, 혹시 싫어하시면 어떡하나 염려가 되어서…….”
“그래? 그럼 진즉 이야기를 했어야지. 앞장서.”
“네. 나리.”
건달 두목은 얼른 허리를 숙이고는 앞장섰다.
이서우와 이설아는 차분히 그의 뒤를 따랐다.
도시가 워낙 커서 한참을 걸어가고서야 건달 두목이 멈췄다.
“저기야?”
“네.”
“그새 돈 좀 모았나 보네.”
“사업 확장을 해서 아주 잘나가고 있습니다.”
“사업? 무슨 사업?”
“주류부터 여자까지 다양하게 하고 있습니다.”
“여자로 사업을 한다고?”
“네.”
“여자로 무슨 사업을 한다는 거지? 쉽게 설명해 봐.”
“그게 처녀들을 잡아다가 귀족들의 성노예로 쓰는 것을 말합니다.”
“확실해?”
“네. 제가 얻은 정보로는 확실합니다.”
이서우는 건달 두목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정보를 얻기 위해 온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다른 사업을 한다니.
‘예전에는 숨어서 정보를 팔더니 이제는 다른 사업을 하는 것처럼 꾸며서 정보 길드라는 걸 드러내지 않으려는 건가. 뭐, 들어가서 확인해 보면 되겠지.’
이서우는 판단을 잠시 미뤄 두었다.
“대.”
“네?”
“머리 대라고.”
“…….”
이서우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자 건달 사내는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떨었다.
“안 대?”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는 줄 테니 대!”
건달 두목은 죽고 싶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이서우의 말대로 머리를 이서우의 손가락 앞으로 갖다 대었다.
딱!
시원한 소리가 나며 건달 두목이 벌러덩 넘어졌다.
“힘없는 사람 괴롭히지 말고 일해서 먹고 살아. 알겠어?”
“…….”
“가자.”
“응, 오빠.”
이서우의 마지막 말을 다 듣지도 못한 채 건달 두목은 기절했다.
두 사람은 차분히 건물 앞으로 갔다.
5층 건물 한 채와 양쪽으로 그보다 작은 3층 건물 2개가 눈에 들어왔다.
건물 앞으로 다가가자 덩치 큰 사내들이 막아섰다.
“이곳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돌아가라.”
“과거 거래를 튼 적이 있는데, 이렇게 생긴 자가 안에 있나?”
“누군데 감히 우리 마스터님을…….”
동영상을 찍을 수 없는 곳이어서 이서우는 몽타주 프로그램으로 정보 길드 마스터의 얼굴을 그려 두었다.
마스터를 만나는 사람들은 워낙 높은 위치에 있어서 이서우가 손님일 확률이 높았지만, 그들은 이서우가 건달 두목을 공격하는 것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좋은 의도로 이곳에 왔다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 데다가 이서우의 표정이 심각해서 문지기 사내들은 이서우가 결코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 칼,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텐데? 난 거래를 하러 온 것이다. 그러니 잘 선택해.”
“기, 기다려라.”
이서우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느낀 문지기 사내들은 서로 눈짓을 하더니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다시 나와 이서우에게 고개를 숙였다.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들어가시죠.”
사내의 위치가 꽤 높았는지 문지기 사내들의 태도는 공손했다.
사내의 태도에 이서우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이설아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몸을 밀착시킨 것이 마치 신혼부부 같아 보였다.
가운데 건물의 깊숙한 곳으로 가자 지금까지보다 더 화려하게 꾸며진 방이 있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러지.”
이서우가 가까이 가자 자연스럽게 문이 열렸다.
“오랜만이오.”
“그렇군. 오랜만이오.”
이서우는 정보 길드 마스터의 눈을 바라보고는 방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시오. 그동안 사업이 좀 잘된 것뿐이니.”
“화려하게도 꾸며 놓았군. 뭐, 그건 상관없겠지. 난 정보만 얻으면 되니.”
“정보라. 이번에는 무슨 정보를 얻고 싶어서 먼 길을 온 것이오?”
“최근 골렘이 나타났다는 건 알고 있을 것이오.”
“물론이오. 그걸 모르면 정보 상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오. 도주한 골렘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오?”
“그건 차차 알게 될 일이니 그리 급하지 않소. 내가 원하는 건 그걸 만든 사람이오.”
“흠.”
이서우의 말에 마스터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 고대 무기 중 하나인 골렘이 등장하면서 엘사둔도 카이젠도 한창 시끄러웠다.
하지만 더 시끄러운 것은 그들을 단 한 사람이 무찔렀다는 것이었다.
정보 길드 마스터가 그 주인공이 누군지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그가 왜 골렘 제작자를 찾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힘든가 보오?”
“솔직히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오. 오직 황제와 대공만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면 내가 괜한 헛걸음을 한 것이오?”
“그런 섭섭한 말씀을. 그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단서는 있소. 골렘이 나타났을 때부터 그에 대해 조사를 했으니 말이오.”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소만?”
“솔직히 나야 돈만 많이 벌면 그뿐이오. 두 제국이 치고받고 싸우든 내 알바 아니라는 뜻이지. 하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쭉 지내 왔는데, 엘사둔에 불리한 일을 하는 게 썩 내키지는 않구려.”
“이전 정보도 엘사둔에 불리한 것이었소만? 괜히 가격을 올리기 위해 머리 굴리지 말고 아는 걸 말하시오.”
“말을 안 하면 난 어떻게 되는 것이오?”
“그건 상상에 맡기겠소.”
“험, 험. 알았소이다. 말하면 될 거 아니오.”
정보 길드 마스터는 헛기침을 하며 얼른 가격을 말했다.
“이번 정보의 가격은 30만이오.”
“그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것도 아닌데, 30만을 달라?”
“듣고 나면 왜 그 가격이 매겨졌는지 알 거요.”
“그럼 지금 15만, 그 자를 찾게 되면 15만을 주지.”
“알겠소이다.”
이서우는 적당히 타협을 하고 그에게 정보를 얻었다.
범위를 꽤 축소시킬 수 있는 정보여서 그의 말처럼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그 길로 이서우와 이설아는 먼 길을 떠났다. 가는 데만도 3일이 걸려 호텔에서 접속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정보 길드 마스터가 준 정보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오빠, 거기에 정말 있을까?”
“없으면 가서 따지면 돼. 근데 아마 있을 거야.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게 쉽지 않을 테지만.”
“근데 좀 의외였어. 그런 곳에 있을 줄이야.”
“많이 의외지. NPC는 보통 그런 곳에 잘 안 있으니까. 어쨌든 오늘은 푹 쉬자.”
“응.”
이서우는 언제나처럼 저녁 운동을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빠지지 않고 두 달을 하니 벌써 근육이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다.
보통은 6개월은 해야 되는데, 이서우의 발전 속도는 놀라웠다.
* * *
해커와의 약속이 있어 오늘은 뉴 월드에 접속하지 않았다. 퀘스트를 빨리 해결해야 하지만 해커 문제도 얼른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근데 전신이 잠잠하네?”
“아마 오빠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고 돈을 또 엄청 써 대고 있을걸?”
“가진 거라고는 동영상밖에 없을 텐데?”
“대결 때는 멀리서 영상을 담을 수 있었고, 오빠의 얼굴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 전신도 몽타주를 제대로 못 그렸겠지만 그때는 아니잖아. 가까이에서 찍은 영상도 있어서 아마 다음 주면 오빠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하긴,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이니. 뭐, 그 문제는 그때 가서 생각하고, 일단은 해커 문제부터 풀자.”
“응.”
오랜만에 오전부터 나온 두 사람은 쇼핑도 즐기고 다른 연인들처럼 손을 잡고 거리를 활보하기도 했다.
얼굴을 숨겨야 해서 답답했지만 데이트를 하는 것만으로도 이설아는 행복했다.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저녁이 되어 골든 타워로 갔다.
이름을 말하자 직원이 자리로 안내했다.
룸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특수 유리로 막혀 있어 밖에서는 안이 안 보이지만 안에서는 도시가 훤히 보였다.
잠시 후, 해커가 모습을 드러냈다.
20대 중반의 여자였는데, 블랙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두 사람은 상류층 파티에서나 입을 법한 옷을 입고 나온 해커를 보며 의아했다.
물론 이서우와 이설아도 세미 정장을 입기는 했다. 워낙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기본 매너였다.
“당신이군요. 우리를 곤란하게 만든 사람이.”
“당신이군요. 모두를 궁금증으로 몰아넣은 사람이.”
목소리는 거의 이설아에 버금갈 정도로 맑고 깨끗했다. 외모 또한 이설아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서우는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무 그렇게 쏘아보시면 제가 난처한데요?”
“일단 앉으시죠.”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였지만 해커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설아 씨군요. 반가워요. 두 분 사업파트너시라고요?”
“네. 그런데요?”
“방송 잘 보고 있어요. 호흡이 잘 맞으신 것 같아 전 두 분이 연인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 이야기나 하러 나온 건 아닐 테고, 뭣 때문에 우리를 부른 거죠?”
“정확하게는 서우 씨죠.”
이서우는 해커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무서운 얼굴하지 마세요. 잊었나요? 제가 해커라는 거. 서우 씨에 대한 건 사진 하나만 있어도 알 수 있어요.”
“주문부터 하죠.”
“어머, 제가 임의로 주문을 했는데 어쩌죠?”
“상관없습니다. 빨리 나올 테니 오히려 더 좋군요.”
말하기가 무섭게 코스 요리들이 하나씩 나왔다.
스프와 에피타이저부터 메인 요리까지 냉랭한 분위기에서 대화 한 마디 없이 오직 식사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다. 해커가 와인을 가볍게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와인 풍미가 대단하네요. 신경을 많이 썼겠는데요?”
“이제 디저트만 남았는데,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네요. 설마 식사만 하려고 부른 건가요?”
“네. 저는 그래요.”
“저는? 무슨 의미죠?”
“서우 씨, 세상은 말이에요. 참으로 재미난 곳이에요.”
이서우는 갑자기 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었다.
잠시 기다리니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서우 씨처럼 5년 동안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깨어나는 사람도 있고, 저처럼 컴퓨터나 기계에 미쳐서 걸으면서부터 기계만 만진 사람도 있고, 전신처럼 돈에 취해서 미친 듯이 날 뛰는 사람도 있고 말이죠.”
“지금 전신이라고 했습니까?”
이서우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제 말 아직 다 끝나지 않았어요. 저는 솔직히 전신이 처음 이번 의뢰를 했을 때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한데, 서우 씨를 보니 참 흥미가 동하네요. 어떻게 5년 동안 식물인간이었던 사람이 반년도 되지 않아 이렇게 건강하다 못해 탄탄한 근육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었죠?”
해커가 작은 기계 하나를 탁자에 놓았다. 그러자 이서우가 상체를 탈의한 채 운동하는 장면이 나왔다.
“게다가 뉴 월드에서도 엄청난 일들을 하셨더라고요. 남들보다 3개월이나 늦게 시작했는데 말이죠.”
“…….”
“당신, 설마…….”
“벌써 눈치채시다니 대단하네요. 맞아요. 이 모든 게 다 전신의 계략이에요. 전신이 저 외에는 막을 수 없는 해커를 고용한 뒤 K사를 공격하라고 의뢰를 했죠. 그 다음 과정은 두 분도 이미 아실 거예요. 당분간은 세상에 나서고 싶지 않았는데, 액수가 워낙 커서 거절하기가 힘들었어요. 어쨌든 전 문이 열린 집에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됐죠. K사에 들어간 이상 해킹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전장의 지배자가 누군지 알게 되었죠. 그리고 이렇게 직접 봤고요.”
이서우와 이설아는 해커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단지 전장의 지배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다니.
이서우는 당장이라도 해커의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정보를 더 알아내기 위해 차분히 말을 이었다.
“돈의 노예에 된 걸 자랑스럽게 말하는군.”
“어차피 서우 씨나 설아 씨도 돈의 노예 아닌가요? 그나저나 그것보다 전신이 어떻게 행동할지가 두 분에게는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제가 볼 땐 전신도 두 분이 연인 사이라는 걸 알았을 것 같아서 말이죠.”
“우리가 함께한 영상까지 다 전송했군요!”
“빙고!”
“당신…….”
“제가 했다는 증거는 절대 찾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전 오늘 이후로 이 나라를 떠날 거거든요. 탄탄한 근육을 가진 서우 씨와 더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무척이나 아쉽네요. 그럼 전 이만.”
이서우는 해커를 붙잡고 싶었지만 언제 나타났는지 건장한 덩치 사내 넷이 그녀의 곁에 바짝 붙어 경호하는 바람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해커는 유유히 G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