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레벨이 갑이다
169화
“소연 누나가 알면 엄청 열 받아 하겠네.”
“그러게. 해커로부터 회사를 구해 줬다고 알고 있을 텐데, 해킹을 하기 위해 그런 거라는 걸 알면 크게 자책할 걸?”
“뭐,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니까. 그리고 해커 사진 찍어뒀으니 찾는 건 문제 없어.”
“그새 사진을 찍은 거야? 역시 우리 오빠 대단해!”
“기술의 발달 덕분이지 뭐.”
“해커 문제는 그렇다 치고, 전신은 어쩌지? 이런 짓을 하면서까지 오빠의 정체를 알려고 한 걸 보면 분명 뭔가 꾸미는 일이 있을 텐데.”
“상관없어. 이렇게 더러운 수작까지 부릴 줄은 몰랐지만 내 정체를 알았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까.”
이서우도, 이설아도 설마 전신이 이런 중범죄까지 저지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기껏 해 봐야 사람을 써서 정보를 파헤치거나 위협을 하는 정도라고 여겼다. 물론 그것도 범죄지만 심한 폭력을 행사한 게 아니면 그다지 죄질이 높지 않다.
하지만 해킹은 엄청난 중범죄였다.
기술이 발달하고 모든 것이 자동화되면서 해킹으로 인한 피해가 심각해졌다.
최근 들어서는 완전 자율 주행 자동차가 모든 도시의 도로에서 달리고 있어 해킹으로 인한 위험이 더 커졌기에 무기징역까지 살 수 있는 중범죄로 취급했다.
초범이든 재범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렇기에 전신의 이번 행동이 두 사람은 전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점점 자멸의 길을 향해 가고 있는데, 본인은 그걸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아.”
“그러면 더 큰일이잖아.”
경찰들은 범인을 잡기 위해 범인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범죄자라면 정상적인 사고로는 행동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전신의 행동이 딱 그랬다.
“이런 짓을 저질렀으니 분명 녀석으로부터 연락이 오겠지. 일단 회사로 들어가자.”
“응.”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의 얼굴을 알고 있어 소란스러워질 것을 대비해 얼른 K사로 갔다.
들어가면서 김소연에게 해커와 있었던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전해주었고, 사진도 함께 전송했다.
K사로 들어간 이서우는 김소연과 박 대표를 불렀다.
휴게실에서 기다리자 두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누나, 조치는 취했어?”
“응. 설마 그 해커가 전신에게 매수된 사람이었다니.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썼어야 했어.”
“아냐. 우리도 몰랐는걸.”
“뭔가 찝찝했는데, 그게 설마 전신 때문이었을 줄이야. 나도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으니 책임이라면 나한테 있지.”
이서우는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자신의 실수라고 자책했다.
해킹 시도가 있었다고 했을 때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는 찰나에 해커가 이서우와 만나게 해 달라는 조건을 붙였다는 말을 듣고 더 의심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서우는 더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박 대표가 한 마디 던졌다.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저 또한 전신이 이런 짓을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요.”
“맞아. 오빠 잘못도, 언니 잘못도 아냐. 나쁜 건 전신이지.”
그때 이설아의 전화가 울렸다.
“전신이야!”
“받아 봐.”
이설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스피커 폰 모드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름다운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설아 양?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나 보죠?”
-이거 왜 이러실까? 전 모르는 일입니다.
“흥! 방금 해커가 모든 게 당신 짓이라는 걸 자백했어요!”
-그런가요? 전 모르는 일인데 말이죠. 아, 저도 그 해커에게 좀 들은 게 있는데, 무슨 얘기인지 한번 들어 보실래요?
“말하세요!”
이설아는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서우 씨와 설아 씨가 연인이라고 하더라고요. 2차 대결에서 패배하지 않으면 그걸 공개한다고 하던데 말이죠.
“지금 협박하시는 건가요?”
-오해십니다. 전 그저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오빠보고 지금 2차 대결에서 일부러 패하라는 말인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한 말이 아닙니다. 전 그저 순수한 의도로 누군가의 말을 전한 것뿐입니다. 이 사실을 두 분도 아셔야 된다는 생각에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 전화까지 했는데 몰아붙이시다뇨. 이거 섭섭합니다.
이설아는 너무 화가 나서 음소거 모드로 전환했다.
“이런 개쓰레기 같은 새끼!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말을 하지?”
직설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김소연이 노발대발하며 소리를 쳤다.
전신이 눈앞에 있었으면 멱살을 잡고 따귀라도 때릴 폼이었다.
“스피커 모드로 해 줘.”
“응, 오빠. 스피커 모드로 전환해.”
이설아가 가볍게 명령하자 스마트 기기는 바로 스피커 모드로 전환이 되었다.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처음이라고 해야 하나.”
-이서우 군. 편한 대로 해.
“뭐, 그래. 어차피 서로 예의 같은 걸 따질 처지는 아니니 편하게 이야기 하지. 근데, 안 쪽팔려?”
-쪽팔린다라……. 관점에 따라 다르겠군. 내가 볼 때는 캐릭터 뒤에 숨어서 온갖 잘난 척은 혼자 다하는 네가 더 쪽팔리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래? 그러면 넌 왜 가면 뒤에 숨어 있지?”
-너도 이제 그 이유를 알잖아. 내가 너무 잘나서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기가 좀 꺼려지더라고.
전신의 말에 하도 어이가 없어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서우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자. 근데, 정정당당하게 이기는 길을 포기하고 져 달라고? 그리 잘난 놈이 그런 행동을 해?”
-어어, 유도신문은 안 되지. 내가 한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한 말이야. 지난번 방송에서 그 영상을 뿌리는 바람에 자신의 우상인 전신이 아주 곤란한 상황을 겪어서 화가 단단히 났나 보더라고. 어쨌든 무척이나 가슴 아파 하더라. 하긴, 나도 그 사람 입장이 이해가 돼.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서 얻은 자리를 빼앗겼으니 말이야. 그 사람은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내 모든 게 홀랑 빼앗길 처지가 됐으니 화가 안 나겠어? 너도 남자라서 잘 알 거야. 누군가 내 것을 빼앗아 갔을 때의 그 느낌. 아아, 그거 기분 진짜 더럽거든.
이서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
‘추하다, 추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바뀌지?’
이서우는 전신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1등이 좋다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이서우도 1등이 좋다. 지금까지는 언제나 중간 이하의 인생이었으니 남들보다 더 앞서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지금의 전신처럼 이런 식으로 1등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도 내 말을 이해하는 구나? 내 것을 빼앗긴 그 분노를!
“이해? 지랄염병을 해라. 네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잠시 할 말을 잃은 거다. 대체 어떻게 하면 너처럼 사이코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지?”
-이거 왜 이러실까? 내가 한 말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리고 식물인간으로 살면서 폐인이나 다름없던 놈이 운이 좋아서 지금의 위치에 있는 주제에 뭐? 지랄염병? 사이코? 잘 들어 둬. 그 사람의 말대로 넌 2차전뿐 아니라 3차전에서도 져야 해.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설아와 네가 같이 동거한다는 자료를 퍼트릴 거야. 너도 알지? 설아가 지금까지 얼마나 청순 이미지로 돈을 벌어 왔는지. 그렇게 요조숙녀인 척 하던 설아가 남자와 동거를 한다라. 참 좋은 뉴스거리지 않아? 하하하하하. 난 분명히 전달했다.
“약속을 지키면 네놈이 그 자료를 파기한다는 걸 내가 어떻게 믿지?”
-못 믿어도 넌 어쩔 수 없어. 내 말을 따르는 수밖에. 방송인은 인기로 먹고 사는데, 네가 내 말을 안 들으면 그 인기라는 게 한낱 물거품이었다는 걸 잘 알게 될 거야. 크하하하하.
세상이 떠나가라 웃어 대던 전신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전화가 끊겼지만 아무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고요한 분위기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이설아였다.
“오빠, 차라리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자.”
“괜찮겠어?”
“응. 어차피 이젠 방송국 사람도 아니니 연애한다고 말해도 아무 상관없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기가 많이 떨어질 거야.”
“인기가 뭐 대수라고. 그것보다 난 오빠가 더 걱정이야. 나야 이미 사람들의 관심에 익숙하지만 오빠는 아니잖아. 처음에는 지나친 관심이 엄청 부담스럽거든.”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난 오히려 네 입지가 좁아질까 봐 그게 걱정이야.”
“뭐, 내 입지가 좁아져서 동영상이 인기 없게 되면 오빠가 책임져야지 뭐.”
“평생 먹고 살 수 있게야 해 주지. 그게 뭐 힘들다고.”
“쯧쯧쯧, 저렇게 둔해서야. 설아는 지금 그 책임 말고 다른 책임을 말하는 거잖아.”
“다른 책임? 무슨…… 아!”
김소연이 갑자기 끼어들자 이서우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하지만 곧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다.
이서우는 혹시라도 누가 ‘책임’에 대한 구체적인 말을 꺼낼까 봐 얼른 화제를 돌렸다.
“누나, 대표님, 일단 돌아가세요. 그리고 내일 기자회견과 생방송 준비해 주시고요.”
“생방송? 너 설마…….”
“네. 차라리 그놈이 이상한 소리로 떠들어 대기 전에 설아 말대로 우리가 먼저 치고 나가야죠. 그나저나 여기 영상 시스템까지 전부 다 정상으로 돌아온 거 맞죠?”
“응. 원상 복구됐어. 안 그랬으면 이곳에서 이야기도 안 했을 거야. 정말 그 계집애만 생각하면 혈압이 올라. 나쁜 계집애!”
김소연은 진심으로 분노했다.
박대표도 묵묵히 듣고 있지만 화난 티가 역력했다.
“일단 두 사람의 의견은 존중할게요. 하지만 초반에는 온갖 비난을 각오해야 할 거예요.”
“저희는 괜찮지만 괜히 저희 때문에 K사가 피해 보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아닙니다. 논란은 늘 그렇듯 금세 가라앉을 겁니다. 두 분이 좋은 모습만 계속 보여 준다면 말이죠.”
“그건 자신 있죠.”
“그러면 아무 걱정 말고 당당하게 어깨를 펴세요.”
“물론이죠!”
이서우는 활짝 웃는 미소로 자신감을 담아 대답했다.
두 사람이 돌아가고, 이서우와 이설아가 마주보며 앉았다.
“걱정돼?”
“오빠나 나나 어차피 각오한 바니까 큰 걱정이 없는데, K사가 걱정이야.”
“전신이 무슨 방법을 쓰든 우리도, K사도 큰 피해는 없을 거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응. 알았어.”
이서우는 그녀의 곁으로 가서 어깨를 토닥이며 가볍게 안아 주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고는 각자의 방으로 갔다.
* * *
평소처럼 새벽 5시부터 눈을 뜬 이서우는 샤워를 하며 전신과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남은 두 대회, 아주 잘근잘근 밟아 주마.’
모두가 전신에게 굴복하지 않기를 원하니 이서우는 철저히 전신을 응징할 생각이었다.
이서우는 익숙한 걸음으로 무에타이 훈련장으로 갔고, 평소보다 훨씬 격렬하게 수련을 했다.
사범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진지한 이서우의 태도에 호응을 해 주었다.
‘정말 아까운 인재란 말이야. 3년 정도만 잘 훈련해서 대회에 나가면 엄청난 스타가 될 텐데.’
정말 눈부신 발전이었다. 사범은 지금까지 이서우처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보지 못했다.
늦게 시작했는데도 유연한 근육이 기술과 힘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것을 보며 속으로 감탄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몰랐다.
자만할까 봐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아서 그렇지 상당한 재능이었다.
아침 훈련을 마치고 다시 샤워를 한 뒤 이설아에게로 갔다.
“오빠, 잘 잤어?”
“나야 푹 잤지. 설아는?”
“나도 별다른 걱정 없이 잘 잤어.”
“그래. 그놈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할 필요 없어.”
“응!”
“자, 그럼 그 놈 엿먹여주러 갈까?”
“좋지!”
이서우와 이설아는 환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