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레벨이 갑이다
170화
“오늘 무슨 일이래?”
“영문도 모르고 온 거야?”
“그럼 김 기자는?”
“나도 뭔 일인지 몰라.”
기사 둘이 수십 명이 모여 있는 기자들 틈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침 일찍 K사의 대표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중대 발표가 있으니 기자회견을 한다고.
K사 본사에서 로비에서 진행된다고 했기에 많은 기자들이 한데 모인 것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설아다!”
“그러네. 설아가 웬일이지?”
보통은 왜 기자회견을 하는지 정보를 미리 얻을 수 있는데, 이번 경우는 누구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 옆에 남자는 누구야?”
“그러게. 누군데 설아랑 함께 나타나는 거지? 그녀 곁에는 항상…….”
찰칵, 찰칵!
한 기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서 셔터 누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게 신호탄이 되었는지 모인 기자들이 너도나도 셔터를 눌렀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설아 곁에 누가 항상 있어 왔는지를.
설아의 곁을 지키고 있는 사내는 바로 이서우였다.
두 사람은 로비에 마련된 테이블 앞에 앉았다.
“오늘 이렇게 많은 기자분들이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한데, 오늘 무슨 이유로 기자회견을 요청하신 겁니까?”
“같이 온 남자는 누군가요?”
이설아가 다음 말을 하기도 전에 여러 기자들의 목소리가 섞여서 들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자들이 하는 말이 있었다. 그녀의 곁에 앉은 사내가 누구냐는 질문이었다.
이설아는 테이블에 놓인 엄지손톱만 한 살색의 원형 마이크를 귀 뒤쪽에 붙였다.
마치 과거 멀미에 효과가 있었던 키미테처럼 말이다.
“다들 잠시만 조용히 해 주세요. 왜 기자회견을 가지게 됐는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기자님들의 질문도 성실히 받을 거고요. 하지만 먼저 제가 이야기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으면 해요. 안 그러면 기자님들의 질문도 받기 힘들 테니까요.”
이설아의 차분한 말에 기자들은 그제야 잠잠해졌다.
“감사합니다. 지금 이 순간 방송으로 저를 보고 계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기자님들은 제 이야기가 끝나고 질문을 하고 싶어 하시겠지요. 제가 오늘 이렇게 나온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예요.”
“사랑하는 사람이란 옆에 계신 남자분입니까?”
“아직 제 얘기가 안 끝났어요.”
이설아의 차분한 말에 질문을 한 기자는 머쓱한지 입을 쏘옥 닫고 말았다.
“저에 대해 많이 궁금한 것 같은데, 제가 직접 말씀드리죠. 전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서우의 말에 기자들은 의아했다.
기자 생활 수십 년을 한 사람도 있었지만 전혀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이어지자 기자들은 입을 떡 벌렸다.
“전 뉴 월드에서 활약하고 있는 전장의 지배잡니다.”
“헐. 대박.”
젊은 기자들 중에 누군가가 탄성을 터트리며 셔터를 눌렀다.
다른 기자들도 이에 질세라 열심히 이서우의 사진을 담았다.
생방송을 시청하고 있는 시청자들도 난리가 났다.
별다른 공지도 없이 나오는 방송이어서 시청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워낙 K사의 사이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 1만 정도가 생방송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둘러 이 사실을 지인들에게 날랐고, 순식간에 시청자가 100만을 찍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설아가 차분히 말하는 동안 엄청난 인원이 몰렸다.
이설아의 말이 이어졌다.
“여러분이 추측하고 계신 바가 맞아요. 저희는 방송 때문에 만나서 서로 좋아하게 되었고, K사와 계약을 하면서 거의 이곳에서 같이 숙식을 하다시피 했습니다.”
이설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서우가 바통을 터치하듯 말을 이어갔다.
“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어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 생활하게 되었지만 서로의 공간이 따로 존재해서 각자의 공간에서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습니다. K사의 대표님께서 방송을 위해 직접 마련해 주신 공간이니 거짓은 없습니다. 박 대표님도 저희를 위해 이 자리에 나와 계시니 나중에 질문 시간에 직접 물어보시면 될 겁니다.”
“여러분도 방송을 보셨겠지만 저와 오빠는 뉴 월드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사랑이 싹트게 되었고, 제가 먼저 고백을 했습니다. 그리고 좋은 관계를 유지한지 두 달이 지났고요. 일단 여기까지 이야기를 드리고 질문 받을 게요. 아무래도 기자님들의 질문에서 저희가 하려고 했던 말이 다 나올 것 같거든요.”
이설아의 말이 끝나자 기자들이 손을 번쩍 들었다.
“김 기자님 질문하세요.”
김 기자는 많지만 이설아가 직접 손바닥을 펴서 가리켰기에 누군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아무도 두 분이 교제를 하고 계시다는 걸 몰랐는데, 왜 자발적으로 그런 발표를 하시는 거죠? 설아 씨는 그 동안 청순한 이미지의 대명사로 불려왔는데 말이죠.”
“첫 질문부터 핵심을 찌르고 들어오시네요. 어차피 오늘은 모든 것을 솔직히 말씀드리려 했으니 질문에 대답해 드릴게요.”
이설아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이서우를 바라보았다. 기자들은 두 사람의 애틋한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눈빛에서 두 사람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충분히 느껴졌다.
이설아가 다시 기자들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입을 뗐다.
“저희는 어제 협박을 받았습니다. 전신과의 2차, 3차전에서 패배하라고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희의 관계를 낱낱이 인터넷에 퍼트리겠다고 하더군요.”
“그럴 수가.”
“누가 그런…….”
기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들도 세기의 대결이라고 불리는 전신과 전장의 지배자의 대결을 잘 알고 있다.
첫 경기에서 전장의 지배자가 이겼지만 그리 큰 차이가 아니라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이설아가 방송을 통해 골렘에 탑승한 전신과 전장의 지배자가 대결하는 것을 내보냈다.
그 방송을 본 사람들은 1차전의 결과를 잘 못 평가했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전장의 지배자의 압도적인 힘. 강력한 골렘에 탑승했음에도 전신은 전장의 지배자에게 너무 쉽게 패배했다.
그 방송을 본 수많은 사람들이 전신에게 배팅한 것이 실수라며 좌절했다. 다시 물릴 수만 있다면 물리고 싶다며 난리였다.
하지만 이미 결정이 된 터라 전신에게 배팅한 사람들의 어깨가 축 처질 수밖에 없었다.
싱거운 대회가 될 것이라고 관측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전신이 자신의 힘을 방송을 통해 보여주자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도 꽤 많이 생겨났다.
삼룡이의 새로운 힘을 보여 주면서 약간의 반전의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7 대 3으로 전장의 지배자가 우세하다는 평가였다.
많은 사람들은 과연 전신이 어떻게 이 난국을 헤쳐 나갈지 궁금해했다.
한데, 협박이라니.
“대체 누가 그런 협박을 한 겁니까?”
“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신을 아주아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건…….”
한 기자가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이내 말문을 닫아 버렸다.
괜히 말을 잘못해서 소송이 들어가면 낭패였다.
“설마…….”
“다른 기자분께도 기회를 드려야겠지요?”
김 기자가 반사적으로 재차 질문을 하려 하자 이설아가 제지했다.
이설아의 말에 기자들은 팔이 떨어져라 손을 번쩍 들었다.
“스포츠인에 최 기자님.”
큰 명패 때문에 다행히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설아의 지명을 받자 최 기자가 일어서서 질문을 했다.
“협박범이 누군지 자세히 말하지 못하는 걸 보니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는 것 같군요. 제가 궁금한 건 어떻게 그 협박범이 두 분의 관계를 알게 되었나 하는 것입니다.”
“협박범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말을 전해 준 사람이 전신이라는 건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고 전달한다고 하더군요. 뭐, 전신의 말은 그런데, 저희가 녹음과 녹화까지 해 둔 기록이 있으니 지금은 기자 분들에게, 그리고 기자회견이 끝나면 일반인도 다운받을 수 있게 해 둘게요.”
이설아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또박또박 말을 했다.
총기 있는 눈으로 자신감 있게 말하자 기자와 시청자들은 그녀에게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꽤 다수의 사람들이 이설아가 한 말 중에 전신에게 존칭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잡아 냈다.
그러자 실시간으로 여러 가지 추측들이 쏟아졌다.
“설아가 전신 님을 그냥 전신이라고 했어. 통화 내용에 분명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을 거야.”
“설아가 전신이라고 말할 때 약간 얼굴을 찌푸렸는데, 설마 전신이 이번 일을 주도한 거 아냐?”
방송을 시청하면서 이런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나왔고, 기자들의 머릿속에도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귀한 질문시간에 그 점을 묻지는 않았다. 녹취된 통화 내용이 있다니 그걸 들으면 된다.
이설아의 설명이 끝나자 이제는 빛의 속도로 손을 들었다. 기자들이 제발 날 좀 선택해 주세요 하는 눈빛으로 이설아를 바라보았다.
“네. **일보의 박 기자님.”
“전 전장의 지배자 님에게 질문을 드리고 싶군요. 괜찮을까요?”
“네. 괜찮습니다.”
“설아 씨처럼 미인과 어떻게 사귀게 되셨는지 궁금하네요.”
“하하하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기자들은 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으니 재치 있게 가벼운 질문을 해 주셨네요. 한데, 그건 제가 아니라 설아에게 물어봐야 될 것 같은데요? 분위기도 환기시켜 주셨으니 박 기자님께 한 번 더 질문할 기회를 드릴게요.”
“제 마음을 알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보니…… 전장의 지배자 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이서우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네. 제가 보니 서우 씨의 그런 센스 때문에 설아 씨의 마음을 훔친 것 같네요.”
“하하하하하.”
좋은 의미의 웃음소리가 또 한 번 터져 나왔다.
이서우도 미소를 짓고는 박 기자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질문을 드리죠. 이번 발표로 설아 씨도 큰 피해를 입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고, 서우 씨도 그런 것 같은데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대중 앞에 나섰나요?”
“사이버수사대에 신고는 했습니다. 물론 해킹과 관련된 것이죠. 협박범에 대해서는 오늘 경찰에 고발을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이렇게 먼저 시청자분들과 기자분들 앞에 선 이유는 당당해지기 위해섭니다. 저희가 잘못한 게 있다면 서로 사랑한 죄밖에 없습니다. 한데, 아름다워야 할 사랑이 고작 협박범 따위에게 훼손이 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와 설아는 이번 일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협박범이 누구라도 절대 물러서지 않고 함께 힘을 합쳐서 대응해 나갈 것입니다!”
이서우의 힘이 넘치는 말에 기자들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서우의 당당한 모습 속에서 그들은 전장의 지배자를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자들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고, 이설아와 이서우는 무려 2시간이나 성실히 대답했다.
그리고 녹취록이 공개되었고, 기자들과 시청자들은 그 속에 담긴 내용에 분노했다.
전신의 광기어린 목소리. 이서우와 이설아를 압박하면서 쾌락을 느끼는 그 목소리. 그들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녹취록에서 자신이 협박을 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지만 기자들과 시청자들은 누가 협박범인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추측만 할 뿐 소송이 두려워 그가 범인인 것처럼 기사를 내보내지는 못했다.
이서우와 이설아는 기자회견을 끝내고 그들의 보금자리로 갔다.
이제는 사람들의 반응을 지켜볼 때다.
두근거리지만 담담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 * *
“저, 저놈들이!”
와장창창.
손에 잡히는 건 뭐든 다 던져 버린 탓에 그 큰 창문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흥분한 채 씩씩거리는 사람은 바로 전신이었다.
전신은 우연히 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자신에 대한 이야기와 녹취록까지 나오는 것을 보며 극도로 흥분했다.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일 것처럼 방송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모든 방송이 끝나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감히 날 엿 먹여? 난 분명 기회를 줬거늘.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다 생각이 있지. 나와 네놈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이번 기회에 똑똑히 보여 주마.”
한 번 잃은 이성을 되찾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전신은 모든 잘 못을 이서우와 이설아에게 돌렸다.
전신은 독기를 가득 품은 눈으로 영상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전신의 눈빛이 광기로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