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레벨이 갑이다
175화
“이보게, 안 대표,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건가.”
“죄송합니다, 어르신.”
“5년 동안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깨어난 사람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네. 그래서 깨어난 이후 뉴 월드를 접속할 때마다 데이터를 수집했지만 왜 깨어났는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허허, 불쌍한 우리 민후…….”
노인은 투명 캡슐에 담겨 미동도하지 않는 젊은 남자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해결책을 찾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자네의 노력을 내가 왜 모르겠나.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만 간다네.”
글로벌사의 대표 안재훈은 묵묵히 고개만 살짝 숙였다.
손자를 잃을지도 몰라 깊은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까.
“참, 뉴 월드 안에서는 우리 손자를 찾았는가.”
“어디에 있을지 짐작은 됩니다. 하지만 워낙 은밀한 곳에 있어서 조금 더 시일이 걸릴 것 같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만 알면 반은 찾은 거지. 그 장소를 찾으면 민후를 데리고 나오는 게 한결 수월하다고 했지?”
“네, 회장님.”
“그래, 그건 반가운 소식이야.”
슬픈 표정이 가득하던 노인이 희망섞인 안재훈의 말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데, 안 대표.”
“네, 회장님.”
“그 아이를 한번 만나 보는 건 어떻겠나?”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습니다.”
“아직도 뉴 월드에 대해 반감이 큰 건가?”
“네. 뉴 월드를 통해 많은 부를 얻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앙금이 남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긴, 5년 동안 시체처럼 지내면서 가정이 다 파탄나 버렸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알았네. 그러면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네, 회장님.”
안재훈은 자신의 의견을 쉽게 수락하자 안도했다.
고집을 피우면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아 항상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정오균 회장이 있었기에 지금의 안재훈이 있을 수 있었다.
“바쁠 텐데 그만 가 보게. 다음에는 더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대하겠네.”
“네, 회장님. 꼭 좋은 소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시선을 손자에게로 돌렸다.
* * *
“민후 님.”
“무슨 일이야?”
“그게, 아래쪽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아서 보고차 왔습니다.”
“아래쪽? 그쪽은 신경 안 써도 된다고 했잖아.”
“하지만 벌써 다섯 명의 종속자들이 당했습니다.”
“걔들이 무슨 종속자야? 짝퉁이지.”
“하지만…….”
“됐으니까 이 근처까지 온 게 아니면 괜히 호들갑 떨지 마.”
“네, 민후 님.”
사내는 정민후가 크게 꾸짖자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나름대로 생각을 해서 보고를 했는데, 항상 이런 식이어서 의욕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꼬박꼬박 보고를 하는 것은 혹시 나중에라도 책임을 물을까 봐서였다.
워낙 다혈질의 성격이어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다른 종속자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민후 님!”
“넌 또 왜?”
“큰일 났습니다.”
“큰일 아니기만 해 봐.”
“정말 큰일입니다.”
“그러니까 큰일 아니기만 해 보라고.”
“정말 큰일이라니까요.”
“아, 됐고. 말해 봐.”
“지금 미친 모험가 하나가 민후 님의 영역까지 와서 지랄발광을 떨고 있습니다. 피해가 계속 늘어나고 있어 조치를 취해야 하기에…….”
“지금 모험가라고 했어?”
“네, 민후 님.”
“모험가 주제에 감히 여기까지 왔다고?”
“네, 민후 님.”
“잘못 본 건 아니고?”
“틀림없는 모험가입니다!”
“그럼 가 봐야지. 가자.”
“네!”
보고를 한 종속자가 얼른 앞장섰다.
정민후는 뒷짐을 진 채 그를 따라 어기적거리며 걸어갔다.
천천히 걷는 것 같은데도 앞에서 열심히 달리는 종속자와의 거리가 벌어지지 않았다.
“저놈이야?”
“네, 민후 님!”
“다 물려.”
“네.”
종속자가 목소리를 높이자 모험가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물러났다.
“넌 또 뭐냐?”
“그러는 넌 뭐냐?”
“나? 난 전신이다!”
“전신? 전신주할 때 그 전신? 아니면 신는 신발? 아니면 홀라당 벗은 나신할 때 그 전신이냐.”
“…….”
민후를 따르는 중년인들도 민망한지 시선을 회피했다.
평소 엉뚱한 모습을 자주 보지만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강력한 관리자가 있다고 해서 왔더니 저런 병신이 있을 줄이야.”
“병신이라. 맞아, 나 병신. 어디 병신에게 개 맞듯이 쳐 맞고 뒈져 봐라.”
정민후는 장난기 가득한 모습을 지우고 살기를 끄집어냈다.
그러자 주변에 있는 공기조차 송곳처럼 따끔거렸다.
전신은 깜짝 놀라 삼룡이의 힘을 불러내려 했다.
하지만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정민후에게 멱살을 잡히고 말았다.
“컥.”
“어디 다시 한 번 주둥이 놀려 봐.”
“병, 신.”
자존심 강한 전신은 지지 않고 한 자씩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컸다.
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퍽!
정민후가 엄청난 속도로 전신의 온몸을 구타했다.
어찌나 빠르게 주먹을 휘두르는지 전신의 다리가 땅에 닿을 새도 없었다.
북소리가 여기저기서 나는 것처럼 전신은 신나게 맞았다.
엄청난 고통이 뼛속부터 밀려 올라왔다.
“아아아아아악!”
비명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전신은 살면서 지금처럼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서우와 싸울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봐.”
“…….”
“쳐 맞더니 조용하네. 하지만 이미 넌 날 건드렸어. 그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지. 안 그래?”
“마, 맞습니다, 민후 님. 감히 민후 님의 신경을 건드리다뇨!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종속자가 옆에서 맞장구를 치자 정민후는 씨익 미소를 짓더니 다시 구타를 하기 시작했다.
“개자식, 안 그래도 병신처럼 20년을 넘게 여기서 나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감히 병신이라고 놀려? 어디 죽어 봐라. 이 개자식아!”
퍽퍽퍽퍽퍽퍽퍽퍽!
전신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정민후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아파 죽겠는데 그걸 들을 틈이 어디 있겠나.
전신은 그렇게 몇 시간 동안 미친 듯이 맞았고, 협박에 의해 장비까지 탈탈 털리고서야 고통에서 벗어났다.
너무 아파서 장비를 빼앗기면 삼룡이도 못 쓴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접속 종료를 하고 나니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더 강력한 아이템을 얻기 위해 오른 길이었는데, 모든 게 날아가고 말았다. 자만이 부른 결과였다.
“아아아아! 씨팔!”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목소리였다.
* * *
뉴 월드는 또 한 번의 지각 변동이 있었다.
30개의 마을을 운영할 수 있는 운영권.
이게 왜 중요한지는 다들 알고 있었다.
마을 하나당 10만 명 이상의 유저들이 활동했으며, 갈수록 규모가 커져 20만 명이 넘어가는 마을도 있었다.
이런 마을에서 나오는 각종 상점 수수료는 어마어마했다.
운영권을 가지고 있으면 이 수수료를 책정하고, 관리할 수 있다.
걷어진 수수료 중 45퍼센트는 백작에게 토해내야 하지만 55퍼센트만 해도 엄청난 액수였다.
특히 경매장과 거래중개소에서 나오는 수수료가 컸다.
현실 시간으로 하루에도 수백, 수천만 골드가 거래되니 수수료만 해도 수십만에 육박했다.
10만 골드만 받아도 5만 5천 골드가 길드 자금으로 들어온다.
현금으로 3억에 가까운 돈이다.
가만히 앉아서도 한 달에 100억 가까운 돈이 들어오니 누가 마다할까.
게다가 마을 규모는 나날이 커져 가고 있다.
비록 일정한 숫자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엘사둔에서도 많은 유저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들까지 포함하면 30만 이상의 마을로 만드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아주 난리네, 난리.”
“그러게. 팬카페가 이번 일 때문에 마비가 됐더라.”
“우리 방송에 댓글도 70퍼센트가 그 이야기야.”
“댓글 달려면 결제를 해야 하는데, 참 대단하다.”
“그러니까. 뭐, 그 덕분에 엄청난 수익이 생겨서 박 대표님은 싱글벙글하지만.”
주가가 떨어질 거라는 예상이 보란 듯이 빗나가고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었다.
다행히 이서우와 이설아는 조금씩 주식을 사들여 꽤 많은 양을 보유하게 되었다.
골드도 꾸준히 사들여서 현금보다 골드가 더 많을 정도였다.
“결정은 언제쯤 하려고?”
“여유 있게 여행 다녀와서 중국, 인도 오픈에 맞춰서 하려고.”
“아주 애를 태우네?”
“애 좀 태워야지.”
“하지만 너무 질질 끌면 백작님이 안 좋아하지 않을까?”
“아냐. 중요한 일이니 신중을 기하라고 하셨어. 사오 개월까지는 괜찮아.”
“그럼 여유는 있네.”
“3차 대결은 파토가 났으니 느긋하게 여행 다녀와서 진행하면 돼.”
전신은 3차 대결을 기권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갑자기 대결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도 기권으로 전신에게서 많이 돌아섰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의 사람들은 전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 때문에 이서우는 가장 많은 배팅을 할 수 있는 게임에서 배당금을 받을 수 없었다.
다행히 전체 승패는 맞춰서 50배 이상의 배당금을 받았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3승을 예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서우는 배당금으로 받은 골드를 현금화시키지 않고 인벤토리에 잘 보관해 두었다.
벌써 그의 골드가 수천만에 달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이서우와 이설아는 전용기에 올라 몰디브로 향했다.
몰디브는 그야말로 지상낙원이었다.
3차 대결이 취소되면서 보름이었던 일정이 사흘이나 더 늘어났다.
운영권 결정 문제만 아니면 더 머물러도 되지만 계속 미룰 수가 없어 18일로 만족했다.
몰디브에서 이서우는 드디어 이설아와 관계를 맺었다.
좋은 분위기에서 서로 조심스럽게 사랑을 나눴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두 사람은 매일매일 서로에 대한 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확인했다.
몇 달 동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열심히 달려와 몰디브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 무엇보다 달콤했다.
제대로 휴식을 취하니 표정도 한결 밝아졌고, 몸도 개운해졌다.
하지만 이서우는 몰디브에 와서도 운동을 쉬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2시간씩 운동을 하면서도 하루 종일 이설아와 많은 섬을 돌아다녔다.
그러고도 두 사람은 밤에 긴 시간을 사랑을 나누었다. 이 정도 강행군이면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져야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날이 갈수록 쌩쌩해졌다.
노는 것도 힘들다고 하는데, 두 사람은 놀수록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한창 여유를 즐기는데 김소연에게 전화가 왔다.
-야, 사람들이 미친 듯이 연락을 해 대서 내가 미칠 지경이다.
“그러게 내가 휴가 가라고 했잖아. 난 분명 누나한테 휴가 가라고 했다.”
-나까지 휴가가면 누가 일을 보냐?
“때론 일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어. 어차피 길드에 대한 자료는 있으니 하루만 여유가 있어도 결정을 내리는 데 아무 지장 없잖아. 그러니 누나도 종명이랑 얼른 휴가 가. 이건 명령이야!”
-에혀, 전화한 내가 잘못이지.
“나 진심인데? 진짜 휴가 다녀와. 안 그럼 정보 일에서 손 떼게 하는 수가 있어.”
-알았다. 알았어. 널 누가 말리냐?
“일주일 정도 푹 쉬다 와. 그럼 가서 봐.”
-알았다. 푹 쉬다 와라.
김소연은 마지못해 수락했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지만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할 줄 아는 그녀였다.
그렇게 김소연의 앓는 소리를 일축시킨 이서우는 남은 휴가를 즐겁게 보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김소연이 두 사람을 찾았다.
“휴가 끝나고 오니 아주 난리가 났더라.”
“좋은 데 다녀왔나 봐? 얼굴이 많이 좋아졌네.”
“딴소리는. 지금 길드들이 아우성치고 난리라니까 그러네.”
“어차피 대충 추려 놨잖아.”
“그렇긴 하지. 일단 300곳까지 추렸어.”
“좀 더 많았던 걸로 아는데, 꽤 많이 줄였네.”
“기준이 있으니 줄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어. 애매한 곳도 있기는 한데, 그런 곳은 따로 빼 놨어.”
“운영권 결정도 이제 이틀 남았네.”
“그렇지. 중국과 인도 오픈도 이틀 남았고.”
“글로벌사도 참 잔인해. 이렇게 박 터지게 경쟁하게 만들다니.”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게 그 사람들 일이잖아. 미친 듯이 경쟁해야 돈이 되니까. 뭐, 그 덕분에 우리는 사실 파티 분위기잖아.”
“그렇긴 하지. 그럼 슬슬 파티를 준비해 볼까.”
“Ok. let’s go party!”
김소연은 흥에 겨워 손을 번쩍 치켜들며 소리쳤고, 이서우와 이설아는 그녀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하루를 푹 쉬고 남은 하루는 밀린 일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드디어 그 날이 왔다.